[이응준의 포스트잇] [42] 인간과 개

그저 사람과 인생사에 관한 상념(想念)일 뿐이다. 79세로 작고하신 한 선생님이 계셨다. 당신이 생각하는, ‘지켜야 할 세 가지’를 종종 상기시켜 주시곤 했다. 첫째, 금전 보증을 서지 마라. 둘째, 의형제(義兄弟)를 맺지 마라. 셋째, 몸에 문신(文身)을 새기지 마라. 유쾌한 괴짜 풍모가 있는 분이었기에 아무 질문 않고 유머러스한 뉘앙스로만 받아들였더랬다.
한데 오늘 문득 저 빤한 듯 아리송한 유언을 정색해 들여다보고 싶었다. 우선, 선생님의 개인적인 상처에서 연유된 말씀은 아닌 것 같다. 선생님은 일생 금전 보증을 서거나 서게 한 적이 없기에 그로 인해 피해를 입거나 입힌 적 자체가 없다. 두 번째 항목도 마찬가지다. 벗과 제자가 많은 다정한 분이었으되 정확한 판단 성정으로 매사에 맺고 끊는 게 분명했다. ‘사회적 피’를 섞는 걸 감당하기에는 예민한 양반이셨다. 좋은 의형제도 괴로운 의형제도 둔 적이 없다.
이제 세 번째, ‘문신’이 남는다. 39년생인 선생님은 교사를 거쳐 교수로 일생 봉직했다. 꽉 막힌 분이 절대 아니었지만, 교육자적 보수성 정도는 당연히 있으셨다. 문신이 요즘 시대에 어떤 평가를 담보하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이 역시 확인해본 바, 당신의 식솔 가운데 문신을 새겨서 속 썩인 이는 없다. 그렇다면 저 세 가지는 선생님의 ‘철학적 기조’가 관통하는 메시지라고 봐야 할 텐데, 내가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바로, ‘인간에 대한 불신’이다. 문신도 순수한 목적이 아닌 경우 조폭들의 연대 표지(標識)인 게 보통이고, 웬만한 인간들도 그렇고, 어쩌면 고위층일수록 더욱더 조폭다운지도 모르니까. 사실은 보이지 않는 문신의 울타리로 그 위세를 누리며 사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깜짝 놀랐다. ‘선생님이 그토록 비관적인 분이셨던가?’ 하긴 인간이란 변덕과 교만의 농축(濃縮)이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 바다처럼 넓다가도,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게 인간이다. 밤에 산길을 가다가 앞에서 뭔가가 따뜻하면 귀신이고, 섬뜩하면 사람이라고 하지 않던가. 사람 무섭고 더러운 줄 알라는 게 나쁜 훈육은 아닐 것이다.
불신(不信)은 아무나 믿는 것에서 온다. 사이가 틀어졌더라도, 배신을 할 바엔 홀로 사라짐으로서 미학(aesthetic)과 품위를 지키는 사람은 드물다. 남 탓할 것도 없다. 사람 못 알아보는 죄가 더 크다. 하지만 소인배와 사기꾼과 사이코와 악연(惡緣)이라는 게 버젓이 있는데, 그걸 미리 알아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선생님이 당신의 아들이 어렸을 적에는 개를 키우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씀이 기억난다. 내가 그 까닭을 묻자, 미소뿐 침묵하셨더랬다. 혹시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어려서 개에 정을 붙이면, 인간도 개와 같은 줄 착각할까 봐 그러셨던 게 아닐까? AI 답변으로 선생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인간은 개가 아니다. 인간은 배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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