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석동 빼고 서반포" "신월동 빼고 목동"…집값 상승 노린 아파트 꼼수 작명
[분양 청문회] "이러다 다 강남 아파트 되겠네~" 옆 동네 이름딴 아파트 작명 언제까지?
[땅집고] “나는 ‘서반포 써밋 더힐’ 살아!”
이 아파트 이름만 들으면 제가 어느 지역에 사는 것 같나요? ‘서반포’니까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서 좀 서쪽에 있나보다,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실 듯 한데요. 완전 틀렸습니다. 이 단지는 반포동이랑 전혀 상관 없는 동작구 흑석동 흑석뉴타운 11구역에 짓는 아파트거든요.
흑석11구역 위치를 한번 볼까요? 북쪽으로는 한강을 끼고 있고요, 지하철 9호선 흑석역과 동작역 사이에 있습니다. 흑석역이 좀 더 가까운데 걸어서 10분 정도. 총 1509가구 규모 대단지인데요. 올해 하반기 분양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일단 서울 아파트면서 핵심 업무지구인 강남·여의도 접근성이 나쁘지 않은 입지라 청약 열기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런데 단지명에 가져다 쓴 반포와는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요. 흑석11구역에서 국립서울현충원 넘어 동쪽으로 직선 1.5㎞ 정도 되는 거리에 서초구 반포동이 있습니다. 반포동은 서울 부동산 시장에서 예전부터 부촌으로 유명한 동네입니다. 다들 한번쯤 들어보셨을 ‘반포 자이’, ‘래미안 원베일리’처럼 강남권에서도 집값이 비싼 아파트가 몰려있고요.
그러니까 흑석11구역이 이런 반포동과 나름 가깝다는 점을 내세우려고 ‘서반포 써밋 더힐’이라는 아파트 이름을 생각해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다보니까 온라인에서는 “진짜 반포 아파트도 아니면서 단지명을 이렇게 지어도 되냐”, “집값 올리려는 꼼수 작명 아니냐”, 이런 비판이 나오기도 했는데요.
논란이 커지자 흑석11구역 조합은 “‘서반포 써밋 더힐’ 명칭을 확정한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냈습니다. 아파트 단지를 홍보할 때 ‘서반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조합 사업 대행을 맡은 한국토지신탁이 최근 자료에서 이 명칭이 들어간 홍보자료를 만든 것이 잘못 퍼졌다는 설명입니다. 이번 흑석11구역의 서반포 명칭 논란은 이렇게 일단락되는 듯 합니다.
사실 그동안 아파트마다 집값이 더 비싼 옆동네 이름을 쓰는 관행은 이미 수차례 있어왔습니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있는 ‘목동 센트럴 아이파크 위브’가 대표적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유명 입시학원가가 있는 목동은 우리나라에서 대치동과 함께 손꼽히는 학군지입니다. 그만큼 집값도 비싸고요. 그런데 이 아파트가 신월6동 입지인데도 바로 옆에 목동이 있다는 이유로 ‘목동 센트럴 아이파크 위브’라고 이름을 붙인거에요. 2020년 분양한 ‘신목동 파라곤’도 마찬가지로 목동이 아니라 신월동 아파트입니다.
은평구에 있는 수색증산뉴타운 일대에도 비슷한 사례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 뉴타운이랑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이 경의중앙선 수색역인데도 여기 있는 아파트 이름들을 보면 죄다 ‘DMC’라는 명칭을 쓰고 있어요. 수색역에서 한 정거장 거리에 경의중앙선이랑 공항철도선, 6호선 총 3개 노선을 끼고 있는 디지털미디어시티(DMC)역이 있거든요. 지하철 노선이 딱 하나 지나는 수색역보다는 트리플 역세권인 DMC역이 부동산 시장에서 좀 더 유명하고 그만큼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렇다보니 아파트 이름에도 수색 대신 DMC를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개명을 불사한 사례도 있습니다. 2020년 서울 마포구 대흥동에 입주한 ‘마포 그랑자이’입니다. 이 아파트는 원래 연세대·이화여대·서강대 등 신촌 명문대학들과 가까운 점을 들어서 ‘신촌 그랑자이’라는 이름으로 분양했어요. 그런데 몇년 전 부동산 상승기 때부터 서울 강남3구(강남·서초·송파)에 이어 마포·용산·성동구, 이른바 ‘마용성’ 집값이 큰 폭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마용성이 신흥 주거지가 되자 2022년 ‘마포 그랑자이’로 단지명을 바꾼 겁니다. 이제는 신촌보다는 마포가 더 유명해졌으니까요.
이렇게 모든 아파트가 강남·목동·판교 등 집값 비싼 옆동네 이름을 막 갖다 쓰다보니까 시장에 큰 혼란을 주고 있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새로 분양하는 아파트 이름에 특정 동네 이름이 들어가면 행정구역이 정확히 어디인지 소비자들이 직접 확인해야 할 정도니까요.
아파트 개명 절차가 너무 쉬운 것도 꼼수 작명 문제를 키우고 있습니다. 소유자 80% 이상 동의를 받은 다음, 구청같은 지자체에 단지명 변경 신청하고 승인만 받으면 바꿀 수 있도록 되어있거든요. “이럴거면 충청도·전라도·경상도·제주도도 한강 밑에 있으니까 모두 강남 아파트라고 이름 바꿀 수 있는거 아니냐”, 이런 극단적인 우스갯소리도 보여요.
꼼수 작명이 판을 치니까 지자체가 어느 정도 제지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신정뉴타운 1-4구역 재개발로 지은 ‘신정뉴타운 롯데캐슬’ 아파트가 있는데요. 2020년 말 양천구청에 단지명을 ‘목동 센트럴 롯데캐슬’로 바꿔달라는 변경 신청을 냈어요. 그런데 양천구청이 ‘아파트 소재지가 신월동인데 목동으로 바꾸는 것은 부적절하다’면서 거부했습니다. 분노한 입주자들이 일단 문주에 목동 이름을 박고 양천구청장을 고소했는데, 법원이 구청 손을 들어주면서 항소 등으로 2년 넘게 법정 싸움을 벌였습니다.
서울시도 2023년 12월 아파트 이름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습니다. 단지명을 지을때 ▲고유 지명을 사용하고 ▲다른 행정동·법정동 이름을 가져다 쓰지 말라는 등 작명 기준점을 세워준 것인데요. 하지만 말 그대로 단순히 가이드라인일 뿐입니다. 법적으로 구속하는 효과는 없어서 지금처럼 집값 비싼 동네 이름을 차용하는 꼼수 작명 세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글=이지은 땅집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