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부터 광주까지 되풀이된 ‘여성 살해’…판결문 108건에 드러난 또 다른 ‘10번 출구’들

2026년 5월5일 광주 도심에서 17세 여성이 모르는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가해자 장윤기는 다른 여성 A씨를 노리다 피해자를 범행 대상으로 택했다. A씨는 교제를 거부했다가 장윤기로부터 성폭행과 스토킹을 당해 신고 후 피신한 상태였다. ‘광주 고교생 피살 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인 이 사건에선 강남역 살인사건(2016·일면식도 없는 여성 살해), 신당역 살인사건(2022·스토킹 살해), 의대생 살인사건(2024·결별 통보 이유 살해) 등 숱한 죽음이 읽힌다.
2016년 5월17일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성혐오 범죄’가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여성의 죽음은 쌓여왔다. 지난 10년 동안 여성혐오 범죄의 정의 및 실태 파악 논의가 법·제도적 개념 정립으로 이어지지 못하며 ‘묻지 마 범죄’ ‘분노 범죄’ ‘이상동기 범죄’ 등 모호한 범행 이름들만 늘었다. 경향신문은 정의되지 못한 채 반복되는 여성 살해 범죄의 구조를 들여다보기 위해 최근 5년간 남성이 여성을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죽임을 시도한 사건의 판결문 108건을 분석했다.
10명 중 9명은 ‘친밀한 파트너’에 죽었다…27%는 사전 징후
법원 판결문 검색 시스템을 통해 2021년 1월~2026년 5월 1심 판결문 중 ‘살인’ 또는 ‘살인미수’ 사건을 찾고, 유엔통계위원회가 개발 중인 ‘페미사이드 통계 수집을 위한 국제 통계 프레임워크’를 기준을 적용해 추렸다. 해당 기준은 ‘여성 살해’(페미사이드)를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 중에서도 친밀한 파트너에 의한 의도적 살인, 성차별적 동기가 나타나는 가해자에 의한 살인, 가족 구성원에 의한 명예살인 세 가지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로 규정한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집계한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한 여성 살해’ 피해자 수는 매년 평균125명(2021~2025년)에 달한다. 이번 판결문 분석은 1심 법원 판단을 받은 사건을 통해 친밀한 관계 내 여성살해 실태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는 의미가 있다.
25일 판결문 분석 결과 배우자(전·현·사실혼 포함)나 연인 등 ‘친밀한 파트너’에 의해 여성이 숨진 사건이 95건(88%)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친밀한 파트너에 의한 살인은 10건 중 약 3건꼴로 사전 징후가 있었다. 살인 또는 살인미수 범행 전 가해자의 ‘학대 전력’이 판결문에서 명확하게 확인된 사건만 26건(27%)에 달했다. 범행에 이르기까지 신체적 폭력뿐 아니라 협박, 감시 등 정서적 폭력, 스토킹 등이 수반되는 식이다. 특히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사건 중에선 이러한 학대 전력이 더해져 ‘잔혹한 범행’이 양형의 가중사유로 거론되는 경우가 많았다.
연인이던 피해자를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하기 한 달 전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고 피해자가 몸을 숨긴 화장실 문을 흉기로 찌른 사건(2025년·서울북부지법), 이틀 간격으로 전 연인이던 피해자의 목을 졸라 살해하려던 사건(2023년·서울중앙지법), 아내를 상대로 한 살인미수 사건의 집행유예 기간에 또다시 살해하려 한 사건(2022년·창원지법) 등이 대표적 사례다.
친밀한 파트너의 학대로부터 오랜 기간 벗어나지 못한 피해자의 고통을 조명한 판결도 있었다. 2023년 전주지법은 전 연인에게 2년 넘게 물리적·언어적 폭력에 시달리다 둔기에 맞아 숨질 뻔한 피해자의 사건에서 “피해자는 피해 당시 감정을 ‘피고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구나, 이제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며 “피해자는 결별 통보에도 계속되는 피고인의 집착과 보복으로 관계가 이어지는 데 큰 고통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살인미수·특수폭행·폭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가해자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친밀한 파트너에 의한 살인 범죄 현장은 피해자 집이 68건(72%)으로 가장 많았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주거지 안에서 말다툼을 하다가, 잠을 자다가, 도망을 가려다가 숨지거나 살아남았다.그밖에는 가해자의 거주지, 피해자의 직장, 차량 등 일상 반경에서 범행을 피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친밀한 파트너의 범행 동기를 보면 가해자의 비뚤어진 통제·소유욕이 드러나는 ‘외도 의심’이 27건으로 집계됐다. 결혼 생활 30년 동안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며 폭행을 일삼다가 살해하려 한 사건(2022년·춘천지법)이 대표적이다. 교제 폭력의 주된 사유로 꼽히는 ‘이별 통보’가 결정적으로 범행을 촉발한 사건도 13건에 달했다.
친밀한 파트너에 의한 살인 외에 ‘성차별적 동기가 나타나는 가해자의 살인’은 13건으로 전체의 12%를 차지했다. 대대적으로 보도된 2025년 서울 미아동 마트 흉기 난동 사건, 2023년 신림동 등산로 성폭행 살인사건 등이 있다. 친밀한 관계가 아닌 피해 여성이 성 산업에 종사한 경우, 편견을 이유로 여성을 표적으로 삼은 젠더 기반 범죄 특징이 나타나는 사건들도 파악됐다. 무슬림 문화권 등에서 다수 발생하는 ‘가족 구성원에 의한 명예살인’은 없었다.
접근금지도 막지 못한 죽음…피해자는 10대부터 80대까지

피해자를 보호하는 법적 조치도 살인 범행을 막지 못했다. 접근금지 명령 등 보호 조치에도 범행이 발생한 사건은 9건이었다. 지난 3월 경기 남양주시에서 사실혼 관계였던 여성을 스토킹 끝에 살해한 김훈(44) 사건과 유사한 사건들이다. 가정폭력처벌법상 임시조치와 스토킹처벌법상 잠정조치는 살인·살인미수 가해자를 가중 처벌하는 근거가 되지만, 피해자에 대한 접근과 범행을 사전에 막지 못하는 한계가 드러났다.
2024년 5월 경기 화성시에서는 사실혼 관계 여성을 폭행해 접근금지 임시조치 결정을 받고 3시간 만에 피해자 집을 찾아가 불을 질러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수원지법은 그해 11월 “피고인은 법원의 임시조치 결정을 받아 어떠한 이유로도 피해자의 주거지에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안내받고도 보복의 목적으로 피해자의 평온이 보장돼야 하는 집에 불을 질러 사망케 했다”며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법원의 피해자 보호조치 명령을 계기로 불만을 품고 범행에 나선 경우도 5건 있었다. 피해자를 강간·특수협박해 법원에서 접근금지 임시조치 명령을 받자 앙심을 품고 피해자를 흉기를 15차례 찔러 살해하려 하거나(2024년·인천지법), 피해자를 폭행해 접근금지 임시조치 명령을 받고 나서 피해자가 이를 취소 신청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살해한 사건(2024년·의정부지법)이 대표적이다. 결별한 연인을 상대로 스토킹을 일삼다 경찰의 긴급 응급조치가 내려지자 분노해 다음날 피해자를 살해한 사건(2022년·수원지법)도 있었다.
‘앙심을 품고’ ‘분노해서’ 같은 감정적인 동기는 판결문 전반에서 두드러지게 확인됐다. 강남역 살인사건 가해자 김성민 진술처럼 “무시당했다”거나 “자존심이 상해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가해자들이 다수였다.
전주지법은 2022년 헤어진 연인의 이별 통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B씨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하며 “피고인이 사건 범행에 이르는 과정과 범행 중, 그리고 범행 후 수사기관과 법정에 이르기까지 가장 빈번하게 거론한 단어가 ‘자존심’”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는 피고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감금·폭행당해 상해를 입고, 질식해 사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까지 처했다”고 지적했다.
판결문에서 살인과 살인미수 피해자 여성의 나이는 19세부터 80세까지 사실상 모든 연령대에 분포해 있었다. 60대(27명)가 가장 많고, 50대(24명), 40대(14명), 30대(12명), 20대(11명) 순이다. 주요 범행수법으로는 칼 등 흉기를 사용한 사건(48건)이 가장 많았다. 그 밖에는 질식(26건), 둔기(14건), 폭행(11건), 방화(3건) 등이었다.
김희진 기자 hjin@kyunghyang.com, 박민규 기자 mingyu01@kyunghyang.com, 김은송 기자 ss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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