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 엇갈린 김혜성과 개빈 럭스

김혜성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LA 다저스의 김혜성 계약은 매우 의외였다.

당초 다저스는 김혜성 계약 후보군에 있지 않았다. 그 시기 다저스의 최우선 과제는 우타자 보강이었다. 이후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를 잔류시킴으로써 야수 구성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상태였다. 완성된 팀에 가까운 다저스가 김혜성을 영입할 이유는 적어 보였다.

김혜성 계약은 마감 시한 근처까지 오리무중이었다. 전해진 소식들의 출처도 불분명했다. 시애틀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알려졌지만, <시애틀타임즈> 라이언 디비시는 회의적으로 바라봤다. 자신의 기사에도 "한국에서 막연하게 나오는 시애틀 관련 계약설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식으로 설명했다(But any information coming out of Korea about the situation, including a website loosely reporting that Kim had chosen to sign with the Mariners, should be considered speculative, if not specious).

샌디에이고 지역 매체 소식도 마찬가지였다. 해당 기자에게 문의한 결과, 샌디에이고 구단 관계자를 통해 확인된 점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생산된 소식이 현지에서 인용되고, 그 소식들이 국내에 중복 소개되면서 혼란이 가중됐다.

이러한 가운데 다저스의 등장은 매우 놀라웠다. 다저스는 마감 시한 막바지에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계약이 극적으로 이뤄지고 나서 오타니 쇼헤이가 김혜성의 입단을 환영했다. 둘은 같은 에이전시(CAA)로, 오타니가 김혜성에게 조언을 해줬다는 후문이다.

다저스
다저스는 현재 메이저리그 최고 구단이다. 지난해 1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어갔고, 이 기간 두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풀타임 시즌 우승 숙원도 마침내 풀었다.

다저스 왕조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자금력도 넘어설 팀이 없다. 다저스는 2014년부터 25년간 총 83억50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중계권료를 수령한다. 뿐만 아니라, 오타니를 비롯한 여러 선수들이 지불유예(defer) 계약을 하면서 현금 유동성을 확보했다. 특히 오타니는 7억 달러 중 6억8000만 달러를 지불유예로 두면서 다저스의 투자를 지원사격하고 있다.

오타니 쇼헤이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올해도 다저스는 우승을 노린다. 지난해 우승으로 만족할 리 없다. 다저스는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 차별화가 '연속 우승'이다.

메이저리그는 2년 연속 월드시리즈를 제패하는 팀이 사라졌다. 1998-2000년 3연패를 달성한 양키스가 마지막이다. 심지어 내셔널리그는 1975-76년 신시내티까지 거슬러 가야 한다. 포스트시즌 라운드가 확대되고, 과거보다 팀 전력이 평준화되면서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왕좌에 오르는 팀이 자취를 감췄다.

다저스는 이 역사를 다시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새로운 승부수를 던졌다. 후회할 수도 있지만, 결과가 나빠도 만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인다. 막대한 돈을 쓰는 팀이 가성비 투자로 약점을 보완하려는 행보가 특기할만하다.

김혜성
다저스는 작년 서울시리즈 연습 경기부터 김혜성을 주목했다. 데이브 로버츠 감독이 눈여겨봤다는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의례적인 관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 계약까지 도달하면서 김혜성을 향한 '진심'을 보여줬다.

당시 스카우트는 김혜성의 활동성을 칭찬했다. 다저스 브랜든 곰스 단장도 김혜성이 가진 남다른 운동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다저스 담당 기자는 '다저스가 김혜성을 다양한 역할을 맡아 줄 선수로 보고 있다(the club views as a super-utility option to start the season)'고 내다봤다.

여기서 김혜성이 어필해야 될 부분이 드러난다.

일단, 수비가 중요하다. 다저스는 선수층을 중시하는 팀답게 멀티 포지션을 소화하는 선수를 선호한다. 부상 변수가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KBO리그에서 김혜성은 주로 2루수를 맡았지만, 유격수와 좌익수, 3루수도 본 적이 있다.

김혜성 포지션별 수비 이닝

2루수 - 5156.2이닝
유격수 - 1924.0이닝
좌익수 - 291.2이닝
3루수 - 95.0이닝


내/외야를 담당한 크리스 테일러(4년 6000만)와 토미 에드먼(5년 7400만)은 각각 연장 계약을 받았다. 팀의 핵심 무키 베츠도 골드글러브 우익수에서 내야수를 겸하고 있다. 다저스는 김혜성 역시 팀의 공백이 생기면 능수능란하게 채워주길 기대한다. 김혜성으로선 2루수 외 다른 포지션에서의 수비 훈련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빈틈없는 수비를 보여줘야 다저스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다.

김혜성을 환영하는 다저스 (다저스 SNS)

다저스가 김혜성에게 바라는 또 하나는 스피드다. 다저스는 루상에서 위협적인 주자가 필요하다. 지난해 팀 도루 전체 10위였지만(136도루) 20도루를 넘긴 건 오타니(59도루)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타니는 올해 투수로 돌아옴과 동시에 부상 위험을 낮추기 위해 도루 시도를 줄일 것이다. 오타니 다음으로 많이 뛰었던 베츠(16도루)도 수비 부담을 고려하면 지금보다 더 많은 도루를 예상하는 건 어렵다.

그렇다고 규정상 유리해진 뛰는 야구를 무작정 외면할 수도 없다. 작년 포스트시즌에서 베이스런닝이 단기전에 미치는 영향을 똑똑히 목격했다. <팬그래프> 베이스런닝 지수에서 상위권 다저스(10.7)와 최하위 양키스(-16.9)의 월드시리즈는 이 부분에서 갈렸다. 어쩌면 올해 떨어질 수 있는 다저스의 기동력을, 김혜성이 막아줘야 한다.

물론, 수비와 스피드만으로 살아남기는 힘들다. 당연히 타격도 어느 정도 뒷받침 돼야 한다. 하지만 다저스가 김혜성에게 보고 싶은 것, 또 김혜성이 보여줘야 될 것은 명확하다. 다저스의 목표가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측면에서, 수비와 스피드는 단기전에 더 강조된다. 그리고, 이는 다저스가 개빈 럭스를 끝내 포기한 이유이기도 하다.

럭스
럭스는 다저스가 굉장히 아낀 선수다. 2020년 다저스 팀 내 유망주 1위였다. 다저스의 실세 중 한 명인 앤드류 프리드먼 사장이 "동나이대 가장 성숙한 선수"라며 총애했다. 아무리 다른 팀이 원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유망주가 바로 럭스였다.

프리드먼의 바람과 달리 럭스는 성장하지 못했다. 2023년 오른쪽 무릎 수술이 뼈아팠다. 십자인대와 측부인대가 모두 파열되면서 한 시즌을 통째로 날렸다. 지난해 무사히 돌아왔지만, 다저스의 오랜 기다림을 달래줄 수는 없었다(139경기 타율 .251 10홈런, OPS .703).

개빈 럭스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럭스의 문제는 수비였다. 유격수 불가 판정을 받으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외야도 적합하지 않았고, 2루 수비도 안정성이 떨어졌다. 수비율 .980은 지난해 내셔널리그 2루수 중 가장 낮았다(900이닝 이상). 수비 실점 방지를 의미하는 DRS와 평균 대비 아웃카운트 처리를 알 수 있는 OAA도 전부 마이너스였다(DRS -2 & OAA -4).

럭스 전/후반기 성적 비교

전반기 78G [타율] .213 [OPS] .562
후반기 61G [타율] .304 [OPS] .899


럭스는 후반기 공격에서 활로를 찾는 듯 했다. 후반기 타율 3할이 넘었다. 그러나 후반기도 정규시즌 마지막 22경기 타율은 .232, 장타율도 .268에 불과했다. 포스트시즌 12경기도 타율 .177(34타수 6안타) 장타율 .294에 그쳤다. 후반기도 초반에 좋았을 뿐, 포스트시즌 포함 마지막 110타석은 타율 .211, 장타율 .278였다. 나아졌다고 보기 힘들었다.

스피드도 줄었다. 2021년 초당 최대 스피드가 29.1피트로, 리그 평균을 상회했다. 하지만 무릎 수술 이후 27.7피트로 내려왔다. 홈에서 1루까지 도착하는 시간도 4.18초 수준에서 4.28초가 됐다. 어느덧 20대 후반을 향하는 시점에서 이 스피드가 개선될 가능성은 낮았다.

지난해 럭스는 사실상 플래툰 선수였다. 좌완 상대 50타석에서 46타수 7안타로 타율이 .152였다. OPS도 .394로 심각했다. 다저스로선 타자로서 럭스의 한계도 실감한 것이다.

결국, 다저스는 럭스를 트레이드했다. 럭스를 신시내티에 넘기면서 외야 유망주 마이크 시로타와 올해 드래프트 37순위 지명권(경쟁 균형 라운드 A)을 받아왔다. 현지에서는 '럭스를 대체할 수 있는 김혜성 영입이 트레이드의 기폭제가 됐다'고 분석했다.

전망
럭스의 이적은 김혜성에게 분명 청신호다. 럭스가 있었다면 출장 시간 따내기는 더 불리했다. 김혜성이 오자마자 럭스를 보낸 타이밍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김혜성이 당장 주전 2루수가 됐다고 보는 건 이르다. 다저스는 남은 겨울 동안 선수 영입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염두에 둔 다른 선수를 데려올 수도 있다. 다저스가 김혜성에게 보장한 연봉 자체가 많지 않은 점도 경쟁을 불가피하게 한다. 최대 5년 2200만 달러 규모는 다년 계약은 맞지만, 대형 계약이라고 보는 건 무리가 있다.

김혜성 연봉 구조

2025 - 250만
2026 - 375만
2027 - 375만
2028 - 500만 (팀 옵션)
2029 - 500만 (팀 옵션)

*계약금 100만 / 바이아웃 150만
*2028-29년 500타석 보너스 50만


다저스는 먼저 김혜성의 멀티 포지션 소화 가능 여부를 지켜볼 것이다. 김혜성은 럭스와 다르다는 인상부터 심어줘야 한다. 다저스가 럭스를 보낸 건 김혜성이 럭스보다 좋다고 판단해서가 아니다. 그냥 럭스에 대한 미련을 접은 것이다.

아직 메이저리그, 심지어 스프링 트레이닝 경기도 나오지 않은 김혜성이 럭스보다 더 뛰어난 선수라고 단정짓는 건 시기상조다. 반대로, 김혜성이 럭스보다 못할 거라고 단정짓는 것도 시기상조다. 그렇기 때문에 김혜성은 럭스에게 아쉬웠던 수비와 스피드를 보여줘야 한다. 그 부분이 기본적으로 장착돼야 더 많은 기회를 받을 수 있다.

쉽지 않은 상황이다. 럭스가 떠나도 다저스의 선수층은 여전히 두텁다. 김혜성 앞에 놓인 난관은 김혜성이 직접 넘어야 한다. 그래야 확실한 주전 자리를 받을 수 있다. 만약 김혜성이 다저스의 주전 자리를 쟁취하면 위상이 높아지는 건 시간문제다.

과정은 힘들지언정, 보상은 충분할 것이다.

- 이창섭
현 <SPOTV> MLB 해설위원
전 <네이버> MLB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