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제가 이 책의 작가입니다 [사유와 자유의 시간]

한 통의 전화를 끊은 뒤, 잠시 창밖에 보이는 하늘을 바라봤다. 한동안 ‘순수한 기쁨’이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느꼈던 순수한 기쁨은 언제인지도 생각했다. 서점 크레타기 정식 오픈했을 때, 좋아하는 작가를 모시기 위해 제안서를 쓴 뒤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을 때, 하루 일 매출 최대치를 기록했을 때 등이 떠올랐지만, 과연 이런 기쁨이 ‘순수한’ 것인지 되묻자 선뜻 ‘그렇다’라는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지난 북토크가 그에게 얼마나 특별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난 3월, 크레타에는 강민호 작가의 신작 <어나더레벨> 북토크가 있었다. 그는 유독 ‘처음’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강의 전 일면식도 없는 참가자와 식사하는 것도 처음, 기업이 아닌 동네서점에서 북토크를 하는 것도 처음, 본인이 먼저 나서 하겠다고 제안한 적도 처음이라 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수액까지 맞은 상태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새로운 장난감을 고른 뒤 포장을 뜯는 순간만을 기다리는 아이의 설렘이 느껴졌다. 수많은 강의와 교육을 진행하며 무대에 셀 수 없이 섰을 텐데, 동네서점에서 진행하는 소규모 북토크에 마음을 졸이는 모습이 낯설기도 했다.

마지막 참가자의 입장을 확인한 뒤 본격적인 시작을 위해 입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소개를 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자리에 앉았다. 본인을 소개한 뒤 이 자리가 생기게 된 이유를 참가자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나 역시 처음이라 순간 당황했다. 한 기업을 운영하는 대표이자, 이미 두 권의 베스트셀러 책을 펴낸 작가이며, 수많은 강의 경험이 있는 그가 행사의 순서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나서는 모습을 보며, 그가 이 만남을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기는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잠시 멈춰 그가 전하는 만남의 뒷 이야기를 경청했다.


‘사실, 제가 이 책의 작가인데요...’

지난 연말, 우리는 크레타에서 진행한 독서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약 4년 전 펴낸 그의 책 <브랜드가 되어간다는 것>으로 독서모임을 진행했는데, 우연히 모임 하루 전 부산 강의가 있어 내려오는 일정이 잡혔다고 한다. 책을 출간한 뒤 정말 가감 없는 생생한 독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본인이 책의 저자인 것을 아는 자리에 초대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인의 이름을 빌려 참가 신청을 한 뒤, 몰래 온 손님처럼 한 명의 참가자로 참여한 것이다.

<브랜드가 되어간다는 것> 독서모임 (제공 : 크레타)

책의 작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널리 알려진 모습과 헤어스타일이 달랐고, 서울도 아닌 부산에서 진행되는 작은 독서모임에 저자가 몰래 온 손님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마친 뒤 ‘책의 작가님과 너무 많이 닮으셨어요.’라고 농담처럼 말을 건넸지만, 정말 농담 수준의 말이었다. 그도 그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웃음으로 넘겼다.

선정도서가 본인의 인생 책이라는 참가자를 포함해, 보통 수준이라 할 수 있는 별점 3점을 주면서 특별한 점을 찾지 못했다는 분, 책은 읽지 않았지만 주제에 대한 관심으로 참여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질문은 현실을 바꾸는 힘을 갖고 있다.’, '빈도, 강도, 기간의 조건을 갖춘 열정이 만들어내는 습관은 곧 실력이 된다.'라는 책 속 내용을 바탕으로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는 소극적이었지만 다른 참가자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경청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독서모임에 참여 중인 강민호 작가 (출처 : 크레타)

창업가, 프리랜서, 직장인, N잡러, 취업준비생, 개그맨 지망생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이 모인 덕분에 다양한 관점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고 참가자의 만족도도 높았다. 개인적으로는 400번 넘게 진행한 수많은 독서모임 중 한 번으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임이 끝나기 전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손을 들고 얘기를 시작했다. ‘사실, 제가 이 책의 작가인데요...’ 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원래 계획은 이야기만 듣고 조용히 떠나려 했는데, 다들 진솔하게 본인의 생각과 경험을 나눠 준 덕분에 자신을 밝히기로 한 것이다. 모임은 자연스레 ‘작가와의 만남’으로 바뀌었고, 미리 준비된 2부 코너처럼 이어졌다.


‘이렇게 순수한 기쁨을 느낀 적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는 떠나기 전 새해가 되면 본인의 새 책이 나올 예정인데 꼭 크레타에서 북토크를 하고 싶다 얘기했다. 살아오면서 손에 꼽을 만큼 특별한 시간이었다며 보답을 꼭 하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정말 감사했지만 ‘언젠가 밥 한번 먹자.’와 같은 지나가는 말이라 생각했다. 50회가 넘는 북토크를 진행하다 보니 작가님을 모시는 데 필요한 대략적인 거마비가 예상된다. 그의 몸값은 25명 내외가 입장 가능한 작은 서점에서, 지원사업 없이 참가비 수익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큰 기대 없이 새해를 맞이했고, 특별한 이벤트 같았던 그 날이 잊힐 때쯤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새 책이 출간된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부담을 느낄 것으로 생각했는지 강의비도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공식적인 행사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나더레벨> 북토크를 진행 중인 강민호 작가 (출처 : 크레타)

책 출간과 동시에 많은 관심을 받으면서 다양한 북토크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첫 북토크는 꼭 크레타에서 하고 싶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고 한다. 강의자료 없이 진행하는 것도 처음이라 했다. 혹시나 해서 다양한 질문을 미리 준비했지만, 끊이지 않는 참가자의 현장 질문으로 2시간을 꽉 채울 수 있었다. 북토크에 대한 만족도는 그날 몇 권의 책이 팔렸는지로 대략 알 수 있는데, 준비했던 25권의 책은 모두 판매되었다. 나는 뒷정리를 하면서, 책에 사인을 받는 모든 이에게 눈을 맞추고 사진을 찍어 주는 그를 유심히 바라봤다. 수많은 처음으로 가득 채워진 하루가, 그에게는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했다. 그는 이틀 뒤 내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순수한 기쁨을 느낀 적이 정말 오랜만이다.’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아주 많은 우연한 사건 속으로 나를 노출시키는 용기'

<계획된 우연 이론(Planned Happenstances Theory)>이 있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존 크롬볼츠는 성공한 사람들의 커리어 개발 과정을 연구하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잘 짜인 계획에 따라 성공한 사람은 20%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80%는 우연히 발생한 일이나 예기치 않게 만난 사람을 통해 성공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론을 접한 뒤 ‘아주 많은 우연한 사건’ 속으로 나를 노출시키는 용기가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만드는 비밀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돌이켜보니 이 만남은 다양한 사건들이 계획된 우연처럼 연속적으로 발생해서 만들어졌다. 나는 ‘브랜딩’이라는 새로운 주제의 모임을 진행하고 싶었고, 처음으로 외부 리더를 섭외해 독서모임을 만들었다. 그 리더는 <브랜드가 되어간다는 것>을 추천도서로 선택했는데, 10월 예정이었던 모임이 내부 사정으로 인해 11월로 연기가 되었다. 강민호 작가는 오래전 출간된 자신의 책으로 진행되는 독서모임을 우연히 발견했으며, 마침 모임 하루 전날 부산에서 강의가 잡혔다. 연속적으로 발생한 우연한 사건들은 예상치 못한 만남을 성사시켰고, 특별한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어나더레벨> 북토크 참가자 단체 사진 (출처 : 크레타)

서점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들을 한 번씩 바라보는 시간이 있다. 책을 펼쳐보기 전까지는 그 속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책이라도 읽게 되면 그 사람의 삶은 손금만큼이라도 변한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도 크고 작은 용기를 내어야만 우리에게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수없이 존재한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 한 명의 독자이자 책방지기로서, 서점을 한다는 것은 손님들의 삶에 자기만의 서사를 만들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이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 공간에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기를 바래본다. 크레타가 이야기로 넘실대는 공간이 된다면, 분명히 이곳을 찾는 독자의 삶에도 서사가 생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사유와 자유의 시간
골목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책과 사람이 만나 펼쳐지는 소소하지만 진솔하고, 일상적이지만 이상적인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 글쓴이 - 강동훈
부산 전포동에서 '크레타'라는 작지만 단단한 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게 만드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책을 잘 파는 서점인이 꿈이자 목표입니다.

* 인스타그램 :
www.instagram.com/bookspace.cr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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