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애는 어린 시절부터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성장했다.

판사를 꿈꿨지만 아버지의 잦은 음주와 폭력으로 인해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웠고,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몰래 행상을 나가야 했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어머니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자주 봐야 했고, 어머니는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경애는 "그때마다 엄마를 내가 살려냈다"며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고백했다.

1984년 KBS 개그콘테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연예계에 입문한 이경애는 80~90년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성 코미디언으로 자리 잡았다.


한 달에 1억 원을 벌 정도로 인기 절정에 있었고, 하루에도 여러 곳의 나이트클럽 무대에 서며 행사 출연료만 수천만 원을 받았다.
당시를 돌아보며 "한 달에 나이트를 30일을 다 돌았다. 열이 펄펄 나도 쉬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이경애는 그렇게 벌어들인 거액을 단 한 번도 직접 만져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매니저 역할을 맡아 모든 수입을 관리했고, 통장조차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경애는 "37살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내 통장을 가졌다"고 털어놨다.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의 말만 믿고 주식 투자에 나섰고, 결국 부도난 은행 주식에 전 재산을 올인했다가 모든 돈을 날렸다.

이경애는 전성기 시절 번 돈으로 가족을 부양했고, 부모님의 병간호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부모님이 동시에 중환자가 되며 병원비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났다.
"일주일 병원비가 870만 원씩 나갔다. 5년 동안 병간호하며 집 두 채를 팔아도 감당이 안 됐다"며, 결국 남은 재산까지 모두 병원비로 소진해야 했다.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낸 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고, 이경애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돈 벌 이유도, 삶의 뿌리도 사라진 것 같았다"고 고백하며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힘든 시기를 이겨내며 딸을 키우고, 방송 복귀와 사업을 병행하며 다시 삶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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