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역량만 본다더니 지원서엔 '스펙' 칸만 13개... 안 채우면 다음 단계 불가

한소범 2026. 1. 2.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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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표류기]
<2> 20세기 스펙
'학력무관' 공고 달리... 학교·성적 입력 '필수'
공고 요구 스펙은 2.3개, 지원서엔 10.4개 더
편집자주
청년들은 불안하다. 어느 세대보다 준비된 세대이지만, 첫 직장을 얻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매년 역대급이다. 졸업 후 구직이 공식이 되면서 단기 경험을 전전하는 '조각 청년'이 늘고 있다. 2026년 새해, '아프니까 청춘'이 아닌 '불안이 일상'인 청년들의 취업 현실을 구조적으로 짚어보고, 그들의 희망과 대안을 함께 모색한다.
지난해 12월 9일 서울 시내 한 대형서점의 취업 관련 서적 코너. 연합뉴스

청년들이 자격증을 비롯한 '스펙 쌓기'에 매몰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기업의 요구가 과거의 '정량적 스펙'에 여전히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역량 중심 채용'을 내건 기업들의 그럴 듯한 구호는 입사지원서라는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진다.

1일 본보가 입수한 재단법인 '교육의봄'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매출액 상위 1,000대 기업 대부분은 입사지원서에서 평균 12.7개에 달하는 스펙 기재를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교육의봄은 지난해 하반기 채용 시즌(6~10월) 동안 채용 포털 잡코리아에 신입 채용 공고를 올린 기업 159곳을 전수 조사했다. 이중 '무스펙 전형'이나 '자유 양식'을 채택한 17곳을 제외한 142곳(매출 1,000대 기업 121곳·일반기업 21곳)을 분석한 결과, 84.5%(120곳)가 입사지원서에 10개 이상의 스펙 기재란을 유지하고 있었다.

매출액 1,000대 기업 채용공고와 입사지원서 요구 스펙 비교. 그래픽=이지원 기자

"학력 무관"이라더니… 지워지지 않는 '출신교·성적' 기재란

조사 대상 기업들이 요구하는 항목은 촘촘했다. 최종학력(95.1%·135곳)과 출신학교명(93.0%· 132곳)은 기본이었고, 외국어 공인 점수(94.4%· 134곳)와 자격증(96.5%· 137곳) 기재란도 사실상 필수였다. 이외에도 성적(89.4%· 127곳), 수상 경력(66.2%· 94곳), 학내외 활동(59.9%· 85곳), 봉사활동(43.0%· 61곳) 등이 지원자의 화면을 빼곡히 채웠다. 특히 상당수 기업은 이 칸들을 '필수 기재 항목'으로 설정했다. 내용을 입력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도록 한 것이다.

대부분의 스펙 기재란은 검색란뿐만 아니라 펼침 메뉴 기능을 제공하여 외국어, 해외경험, 봉사, 대내외활동 등 과도한 정보를 구직자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교육의봄 제공

더 큰 문제는 채용 공고와 실제 지원서 사이의 '이중성'이다. 분석 결과, 기업들이 채용 공고상에서 명시적으로 요구한 스펙은 평균 2.3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작 입사지원서 창을 열면 10.4개의 추가 스펙 기재란이 지원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학력 무관'이라고 홍보하면서 지원서에는 학력과 성적 입력란을 버젓이 띄워둔 곳도 있었다. '서류 전형 없음'을 내세우고도 지원서에는 '풀스펙' 입력을 요구하는 기만도 여럿 확인됐다. 직무에 따라 요구되는 역량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98.5%(140곳)의 기업은 모든 직무에 동일한 '스펙 백화점식' 지원서 양식을 고수했다.


빈칸이 주는 공포… "기업의 게으름이 청년 착취로"

구직자들에게 입사지원서의 '빈칸'은 단순한 공백이 아닌 '결격 사유'로 읽힌다. 기업이 "평가에 반영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구직자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김선희 교육의봄 책임연구원은 "많은 기업이 역량 중심 채용을 지향한다고 홍보하지만, 정작 지원서 양식을 재설계하지 않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구직자 입장에서는 빈칸으로 남겨두었을 때의 불이익을 우려해 무한 스펙 경쟁에 내몰리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연구원은 "기업이 채용 평가에 반영하지 않는 항목은 과감히 삭제하고, 직무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만 요구하도록 지원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쇄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일보 특별취재팀
팀장: 김동욱(경제부)•신은별(엑설런스팀)
취재: 한소범•이유진(엑설런스팀), 황은서 인턴기자

 

청년 표류기: 일자리를 찾아서

  1. ① 조각 경력
    1. • '한 식구'라더니 또 계약 종료... 몇 달짜리 '조각 경력'만 남았다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1718410005914)
    2. • "끈기가 없어" 병 치료한 청년에게 돌아온 말...'쉬었음' 72만 시대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1817470003874)
    3. • "젊고 경력도 있으면 좋겠어요"...신입 취업, 불가능한 도전이 된 이유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1611540003908)
    4. • 경력 절실 청년들 위해 '확' 늘린 '일 경험'... "실제 채용에 연계되도록"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1413560002931)
  2. ② 20세기 스펙
    1. • "시간이 나만 두고 간다"...'풀스펙' 청년 갉아먹는 22개월의 '무한 경쟁'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2211040002760)
    2. • 역량만 본다더니 지원서엔 '스펙' 칸만 13개... 안 채우면 다음 단계 불가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1812440000689)
    3. • SNS 홍보시키고 활동비는 0원...청년 서포터스 대체 뭐길래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1717230005955)
    4. • 취준생 불안 먹고 자란다… 몸집 불리는 '스펙 비즈니스' 생태계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1916120002659)
  3. ③ 동상이몽
    1. • "고스펙 아니어도, 인턴 경험 없어도 된다"...기업 인사팀이 전하는 '채용의 기준'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1716550001615)
    2. • "서울사무소 냅니다, 대학생 뽑으려고"...지방 중기의 생존 구애, 외면하는 청년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1815190004124)
    3. • 대학은 현실을 외면하고, 중소기업은 친절하지 않다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1415000004668)
    4. • 부산으로 해수부가 내려왔지만… 청년 일자리는 따라오지 않았다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2210300003815)
  4. ④ 답은 있다
    1. • 청년 일자리 정부 정책이 2000개나 되는데...청년들은 여전히 "일자리가 없다"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1416350001728)
    2. • 유럽 청년들도 취업 현실은 고달프다… "그래도, 바꿀 수 있다"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1913190003569)
    3. • "쉬었음 청년? 책임 떠넘기는 나쁜 말... 불안, 청년 탓 아니다" [인터뷰]
      (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5121921010004743)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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