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제 통일 정책의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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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전국(戰國)시기에는 일곱 나라로 나눠져 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폭군 정도로 알려져 있던 진시황제는 중국 왕조시대의 문물과 제도 등 많은 부문에서 통일의 기틀을 다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문자, 도량형, 화폐 등의 통일은 뒷날 여러 왕조의 통합과 분열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통일 중국의 모양새를 갖추게 하는 문화적 기반이 됐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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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 통일 정책의 핵심은 공교롭게도 그가 가장 미워했던 유가(儒家)의 주요 경전인 「중용」 28장의 "오늘날 세상에서 글은 같은 문자를 쓰고, 수레는 같은 굴대를 쓰고, 행동은 같은 윤리규범을 쓴다(今天下, 書同文, 車同軌, 行同倫)"라고 한 것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서동문(書同文)'은 문자의 통일을 시도한 것이다. 한자는 기원전 1천300년 전 상나라 시기 갑골문자로부터 비롯됐는데 각 지역마다 점점 다르게 변하는 바람에 1천여 년이 지나면서 그 지역 사람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게 됐다. 물론 언어의 통일이 통일 진나라에서는 우선이었겠지만, 이는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오늘날과 같이 대중매체가 발달한 시대에도 여전히 지방의 방언이 남아 있어 지역 간 소통이 어려운데 2천 년 전 당시 언어의 통일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나마 문자라도 전서(篆書)라는 글자체로 통일해 각지의 백성들에게 황제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때 통일된 전서가 한나라 때 예서(隸書)라는 글자체로 거듭 조정됐는데 이것이 오늘날 쓰고 있는 한자의 바로 이전 형태다. 그래서 중국의 문자가 한나라 때 제정된 것이라고 해서 한자(漢字)라고 부른다.
'거동궤(車同軌)'는 도량형의 통일을 의미한다. 인류 문명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한 수레를 만들기 위해서는 길이 단위인 도(度), 크기 단위인 양(量), 무게 단위인 형(衡)의 통일 역시 필요하고 나라를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데 있어서도 무엇보다 중요하게 작용했다. 세금을 거두고 병사를 징집하기 위해 각종 문서를 발급하는데 각 지방에서 이게 뭔지 잘 모르거나 헷갈린다면 온전한 통일국가라고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편리하게 상품을 거래하는 등 원활한 경제활동을 위해 화폐를 통일했다. 이전에는 칼 모양의 도전(刀錢)이나 수건 모양의 포전(布錢)을 사용했었는데 진나라에서는 둘레가 동그랗고 가운데 네모난 구멍을 뚫은 반냥전(半兩錢)이 사용됐다. 반냥전의 둘레를 동그랗게 한 것은 각이 진 이전의 도전이나 포전에 비해 둘레가 매끄러워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하고, 제작 원가를 줄이면서 무게를 가볍게 해 줄로 꿰어 휴대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 가운데 구멍을 뚫었다고 볼 수 있다.
행동은 같은 윤리 규범을 쓴다는 '행동륜(行同倫)'은 도덕 질서와 사회 규범의 통일을 이루고자 했던 정책이다. 앞서 밝혔듯이 진나라는 법가(法家)를 채택, 신상필벌의 합리적인 통치체계를 실천해 부국강병을 통한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했다.
진시황제는 이전 춘추와 전국시대에 공자·맹자의 유가, 노자·장자의 도가, 묵가 등 다양한 학설이 난무했던 것이 세상을 큰 혼란에 빠뜨렸던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보고 법가를 제외한 다른 학파의 책들을 불질러 없애고 학자들을 파묻어 죽이는,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도 서슴지 않았다.
이밖에 전국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도록 일종의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는 치도(馳道)와 수도로 향하는 대규모의 운하를 건설하는 등 그가 황제로 있었던 10여 년 동안 오로지 통일 사업에만 매진했고, 이것이 이후 중국문화의 기틀을 세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책이 이후 중국의 발전에 긍정적으로만 작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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