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콜라와 동서식품이 던지는 생존의 교훈 [안재광의 대기만성's]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이 코카콜라 주식을 사랑한 것은 잘 알려져 있죠. 버핏 회장은 1988년부터 코카콜라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해 총 13억 달러를 투자해 4억 주가량을 확보했는데 이 지분의 가치는 현재 약 280억 달러에 달합니다. 또 연간 8억 달러 이상의 배당금도 받고 있어요. 코카콜라는 버핏 회장의 투자 철학을 한마디로 담고 있어요. 탄산음료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고 사업 구조가 비교적 단순해 예측 가능한 데다 현금 창출 능력도 뛰어납니다.
그런데 한국에도 코카콜라와 비슷한 기업이 있어요. 이 회사는 믹스커피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보유하고 있고 사업 구조 또한 간단해서 사업의 불확실성도 비교적 낮아요. 또 코카콜라처럼 이익을 따박따박 매년 잘 내고 있고요. 여기에 사람들이 끊기 어려운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소비를 하는 탄산과 커피란 특징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만약 버핏 회장이 한국 사람이었다면 코카콜라 대신에 이 회사 주식을 아마도 사지 않았을까요. 이번 주제는 ‘조선의 코카콜라 동서식품’입니다.
◆전설의 월급쟁이, 커피제국 일궈
커피는 1970년대에 들어서기 이전까지 한국에서 낯선 음료였어요. 다방에서 마시는 비싼 기호식품이었죠. 일반 가정집에서 커피를 내려 마신다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어요. 바로 그때 인스턴트 커피라는 새로운 문화를 한국에 뿌리내리게 만든 기업이 등장합니다. 바로 동서식품입니다.
시작은 부도 위기와 함께였어요. 1968년 설립된 동서식품은 미국 제너럴푸즈(현 몬델리즈)와 손잡고 인스턴트 커피 ‘맥스웰 하우스’를 생산했어요. 하지만 커피 시장이 열리기도 전에 자금난으로 흔들렸습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김재명입니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을 35년간 보좌하며 ‘삼성의 제조업 확장’을 실무에서 이끈 전설적인 월급쟁이였죠. 이병철 회장은 그를 “평생 고마운 사람”이라 불렀을 정도로 아꼈다고 해요.
그런 김재명이 50대 초반의 나이에 삼성에서 독립해 처음 인수한 회사가 바로 동서식품이었어요. 사람들은 의아해했어요. 삼성의 실력자가 왜 커피 회사 같은 걸 하나. 하지만 김재명의 판단은 정확했어요. 한국은 곧 커피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사실’로 바뀝니다.
김재명은 부실한 재무구조를 정리하고 커피, 프리마, 설탕을 한 번에 섞은 세계 최초의 믹스커피를 내놓습니다.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노란색 맥심 커피믹스의 원형이었요. 이후 동서식품은 미국식 브랜드, 마케팅 방식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맥심 한잔 하시죠”란 광고 문구 하나로 시장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어요. 망하기 직전이던 합작사는 1970년대 인스턴트 커피 시장점유율 1위, 1980년대 맥심 출시, 현재는 한국 믹스 커피시장의 70% 이상을 장악한 절대강자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영광은 영원하지 않았어요. 2010년대 이후 웰빙 트렌드가 강하게 불면서 믹스커피는 몸에 해롭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한 겁니다. 커피는 잠을 깨우고 일상에 활력을 주는 기호식품이란 좋은 이미지에서 설탕과 프림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부정적 이미지로 금세 바뀌었어요. 한때 ‘국민 커피’였던 맥심은 어느 순간 ‘아재 커피’로 불리기도 했고요.
이런 부정적 인식은 실적으로도 잘 드러나요. 동서식품은 2008년 처음 매출 1조원을 넘겼고 2009년 1조3000억원, 2010년 1조4000억원, 2011년 1조5000억원을 차례로 달성했어요. 하지만 이후 10여 년간 1조5000억원대에 갇혀 있었어요.
설탕과 지방, 카페인이라는 믹스커피의 핵심 요소가 모두 건강 이슈에 걸리며 구조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겁니다. 게다가 해외 판권이 합작사 몬델리즈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코카콜라처럼 글로벌 시장으로 뚫고 나갈 수도 없었어요. 내수는 줄고 건강 트렌드는 커지고 수출은 막혀 있는 ‘삼중고’였습니다.

◆‘카누’ 출시로 위기 돌파
하지만 동서식품은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어요. 생존 전략을 완전히 다시 짭니다. 본진인 커피믹스를 건들지 않고 커피믹스 시장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파괴적인 선택을 해요. 바로 ‘카누’를 내놓은 겁니다.
카누는 기존 커피믹스와는 완전히 다른 커피였어요. 믹스커피가 설탕, 프림, 커피 3종을 한 봉지에 넣어 뜨거운 물만 따르면 완성되는 즉석 커피였다면 카누는 반대로 커피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뺀 제품이었어요. 커피 원두를 미세하게 추출, 동결건조한 뒤 가루 형태로 만들었는데 이건 가정용 캡슐커피 회사들이 쓰던 기술과 사실상 동일했어요. 다만 캡슐이 아니라 스틱형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형태였죠. 뜯고 붓고 물만 따르면 원두커피 못지않은 커피 맛이 난다는 개념이었습니다.
기존 맥심 믹스커피가 ‘어디서나 쉽게 마시는 국민 커피’를 표방했다면 카누는 타깃을 젊은층으로 잡았어요. 믹스커피를 ‘아저씨 커피’라고 부르던 2030세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직장인, 캡슐머신을 사기엔 부담되던 1인 가구, 그리고 ‘설탕 없이 커피만 마시고 싶다’는 소비자 집단을 정조준한 것이죠.
마케팅 방식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맥심이 대중적 TV광고를 썼다면 카누는 커피 향을 강조하는 감각적 영상에 배우 공유, 전지현, 박서준 같은 ‘세련된 이미지’의 모델을 기용했어요. ‘믹스보다 진짜 커피’란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주입했어요.
카누는 2011년 처음 나와 약 300억원의 매출을 거뒀어요. 이후 3년 만에 매출 1000억원을 돌파했고 5년 만에 2000억원 선을 넘었습니다. 현재 카누 매출은 연간 1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요. 믹스커피 시장이 쪼그라드는 것을 카누가 상쇄해 주고 있는 것이죠. 카누 덕분에 동서식품의 매출은 2022년 10여 년 만에 1조5000억원대에서 벗어나 1조6000억원을 뚫었고 작년엔 1조8000억원에 육박했어요.
물론 여전히 믹스커피가 동서식품의 주력 제품이고 카누 비중은 약 15% 수준에 불과해요. 중요한 점은 카누가 믹스커피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신규 시장을 창출했다는 사실입니다. 믹스커피를 줄이고 카누를 마신 것이 아니라 믹스를 마시는 사람은 그대로 마시고 믹스를 기피하던 사람이 카누를 마시기 시작한 겁니다.
이러한 동서식품의 전략은 코카콜라가 위기를 극복한 방식과 거의 같습니다. 코카콜라 역시 한때 ‘중독성 있는 액체 도파민’으로 불리며 세계 음료시장을 장악했지만 2000년대 이후 웰빙 트렌드가 강해지면서 강한 역풍을 맞았습니다. 미국 소비자 단체들은 탄산음료를 ‘액상 설탕 폭탄’이라고 불렀고 각국 정부가 설탕세(Sugar Tax)를 도입하면서 북미 시장 탄산음료 판매량은 2004년부터 10년 넘게 감소했어요.
코카콜라가 선택한 방법은 콜라를 버리지 않고 설탕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2005년 ‘코카콜라 제로’를 출시했고 2017년에는 ‘제로 슈거’로 전격 리뉴얼했습니다. 단순히 칼로리만 없는 ‘다이어트 음료’가 아니라 기존 코카콜라 맛을 99% 재현한 제로 칼로리 제품이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주입했습니다. ‘맛은 그대로, 죄책감은 제로’란 전략이었습니다. 결과는 극적이었어요. 코카콜라 매출은 2010년대 꾸준히 떨어졌지만 2021년부터 극적으로 반전해 성장세로 돌아섰어요. 수익성도 크게 좋아져 이익률이 최근 30%에 이르렀습니다.
◆“시장과 소통 더 해야” 지적도
동서식품과 코카콜라를 비교하는 게 온당한가 하는 지적도 당연히 나올수 있어요. 여러 부족한 부분이 있죠. 먼저 눈에 띄는 건 수익성입니다. 한때 15% 안팎을 기록하던 영업이익률은 최근 10%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이는 커피 원가 부담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장 장악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지배구조 문제도 있죠. 동서식품은 지금도 몬델리즈와 5대 5 합작 구조로 묶여 있어 해외 판권을 스스로 가져올 수 없습니다. 모회사인 동서 지분은 창업주 일가가 지분을 분산해 보유 중이고 2세 경영 체제로 넘어간 뒤에는 의사결정 구조가 더 복잡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주가가 안 올랐어요. 올 들어 11월 중순 기준 동서 주가는 3.75% 오르는 데 그쳤습니다.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는 67.2% 상승했어요. 버핏 회장이 사랑한 코카콜라는 배당, 주가 모두로 투자자 신뢰를 증명한 기업인 반면, 동서는 꾸준히 돈을 벌면서도 시장과 잘 소통하지 않고 있고 주가 관리에도 소홀하다는 지적을 받아요. 동서식품이 코카콜라처럼 제품 혁신에 성공했듯 주가 혁신에도 성공하길 바랍니다.
안재광 한국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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