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 되어서야 묻는다, 지금 내 모습을 사랑해 줄 수는 없냐고

한겨레 2025. 2. 5.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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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333333;">동그란의 마음극장 </span> 영화 ‘서브스턴스’(The Substance)
영화 ‘서브스턴스’의 한 장면. 찬란 제공

저는 잘 놀라는 편입니다. 돌발적인 소리가 울릴 때나 엉뚱한 장소에서 뜻밖의 누군가를 만났을 때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접했을 때 당황하는 것이야 이상할 것이 없지요. 그런데 그 정도가 제 경우는 좀 유별나서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그렇게 크게 놀랄 일이라서기보다는 내 정신이 멍하니 다른 차원을 헤매고 있었던 터라 현실로 돌아오는 속도에 까무러치듯 놀라게 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소스라치듯 놀라는 내 모습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더 깜짝 놀라곤 하죠. 하품처럼 기침처럼 놀람도 그렇게 잘 옮겨지는 것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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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큼 나이가 들면 별로 놀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지간한 일은 혀를 한번 차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고, 미간에 생성되는 주름을 의식해서 놀라운 사태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것도 습관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여전히 크게 놀라고 자주 놀라요. 우주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표정도 몸짓도 순간 정지가 된 채로 아주 오랫동안 ‘얼음’ 역할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이번엔 또 얼마나 경악의 상태를 유지하게 될까 기대를 하기도 하는 걸 보면 경악의 무아지경을 즐기게 된 것 같기도 하지요. 가끔은 놀래주려는 상대편의 의도에 충분히 반응할 준비를 하고(각오를 하고?) 극장에 가기도 합니다.

영화 ‘서브스턴스’의 한 장면. 찬란 제공

영화 속에서 충분히 놀라기 위해서는 사전 정보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이번 영화는 사정이 그리되지는 못했습니다. 마치 영화의 예고편처럼 데미 무어의 성형 중독 관련 가십이 오래도록 자극을 받아온 데다 최근 글로브 시상식에서 그녀의 수상 연설이 화제가 되어 영화의 주제를 알게 되었고, 작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뒤로 줄곧 단말마의 경악으로 요약되는 감상소감을 들어왔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으악,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냐, 좀 심했다…. 이제야 제가 놀랄 차례가 되었을 때 저는 극장에 앉아 여유로운 자세로 내가 짐작한 놀라움의 순간들을 실컷 만끽했습니다. 전하려는 주제가 선명하고 여백이 없이 꽉 차서 어떤 의문도 남기지 않는 후련한 이야기였다고나 할까요. 그래도 새로운 놀람이 있었어요. 사람들은 이미 아는 이야기에 빠져들고, 저 끔찍한 모습이 바로 자신을 거울처럼 비춰주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그러곤 그 불쾌한 기분을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털어버려요.

영화 ‘서브스턴스’의 한 장면. 찬란 제공

영화 ‘서브스턴스’(코랄리 파르쟈 감독, 2024년)의 스토리는 오래전부터 아는 거였어요. 새로울 게 없죠.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배경을 할리우드로 가져오고 여성 버전으로 바꾼 이야기예요. 한쪽이 젊음을 누리는 대가로 다른 쪽이 망가져 간다는 설정이 가져오는 처절한 파국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절제를 모르는 우리의 주인공은 관객의 심장을 오그라붙게 만들면서 자꾸 어리석은 선택을 해요. 그럴 때 관객석에서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그래선 안 된다는 탄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욕망에 빨려들어 주인공 수와 심장을 공유하고 어느새 그 욕망의 맥박에 박자를 맞추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돼요.

이미 느껴본 감각이었어요. 어디선가 들어본 음악, 히치콕의 영화에서 본 눈동자, ‘비디오드롬’ 등의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은 장면들도 그렇고요. 그중에 가장 익숙했던 건, 차갑게 버려진 느낌이었어요. 내가 나를 버린 것 같은 그 서늘한 느낌이요.

영화 ‘서브스턴스’의 한 장면. 찬란 제공

일단 새롭고 더 젊고 더 아름답고 더 완벽한 나로 일주일, 그리고 지금의 나(50세 생일에 일터에서 쫓겨난)로 돌아와 일주일. 이렇게 교대로 살아보지 않겠느냐는 흥미로운 제안이 악마의 유혹인 줄은 알지만, 시도해 보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그런데 그 시도에서 원본 나와 다른 버전의 나는 서로를 돌보지 않아요. ‘현재의 나’(엘리자베스)라는 원본에서 태어난 ‘좀 더 나은 버전의 나’(수)는 ‘원본 나’를 차가운 욕실 바닥에 그냥 버려두어요. 수건 한장 덮어주지 않은 채로요.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니 벽장에다 숨기고는 굶기기까지 해요. 그게 왜 그렇게 슬프게 느껴졌나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나에게 오랫동안 저질러온 짓이란 걸 알겠어요.

숱하게 들어온 경고였어요. 30년이나 젊어진 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연민도 없이 50년을 성실히 살아온 엘리자베스를 착취해요. 엘리자베스 역시 수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혀 제정신이 아니고요. 제품 판매 업체에서는 ‘둘은 하나’라는 걸 명심하라고 경고했건만, 결국 ‘둘로 나뉜 나’는 자신을 잡아먹으며 괴물이 되고 말지요. 이 체인지 프로그램에서 주의할 점은 ‘시간을 지킬 것’과 ‘멈출 수는 있지만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에요.

영화 ‘서브스턴스’의 한 장면. 찬란 제공

모든 사회생활에서 시간을 지키는 건 가장 기본이에요. 내 욕망에 내가 속아서 저지른 실수의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최종적인 파국에 이르기 전에 멈출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 건지, 그렇지만 어리석은 나는 그런 현명한 선택을 못 한다는 걸 알아요.

영화 속 ‘원본 나’(데미 무어)의 모습은 곧 나의 지금 모습이고, ‘좀 더 나은 버전의 나’는 지금의 내가 버리지 못하는 욕망이에요. 내가 결코 손에 쥘 수 없고 가질 수도 없는. 둘은 함께 있을 수 없는데 하나라는 이 모순적인 상황이 지금 이 순간 내가 처한 실존의 문제인데 생각하면 괴로우니 철학자들에게 대신 고민하라고 맡겨놨어요. 세상이 원하는 모습의 나를 내가 원한다면 그 욕망의 주인은 누구일까, 생각하기 시작하면 골치가 아파져요.

찬란 제공

일단은, 영화가 거울처럼 보여준 두 버전의 나에게 좀 더 잘 대해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살아서 세상을 돌아다니는 동안 어둡고 차가운 방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나에게 좋은 음악을 틀어주고, 따뜻한 이불을 덮어주고요. 얼굴에는 팩도 붙여주고 은은한 조명 곁에 있게 하고 싶어요. 과거의 나를 위해서 그때보다 좀 더 늙은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내게서 반짝였던 것들을 잊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때 바쳤던 시간과 열정을 깎아내리지 말라고.

미래의 나한테 지금의 나는 ‘좀 더 나은 버전의 나’이겠죠. 그녀에게 절제하는 법을 배우라고, 시간을 지키라고, 자신이 지닌 힘을 가치롭게 사용하는 지혜를 주라고 말하고 싶어요. 우리는 모두 또 다른 버전의 나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감각을 일깨워 준 이 놀라운 영화 속에서 각자가 반응한 놀라움의 장면들을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영화 칼럼니스트 이하영 ha02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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