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의 '땅볼 타구'를 걱정하지 않는 이유

테드 윌리엄스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메이저리그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는 자신의 저서 <타격의 과학>에서 "투수가 던진 공에 대응하는 최적의 스윙 궤적이 있다"고 했다. 윌리엄스는 공이 가라앉는 순간 살짝 올려치는 스윙을 해야 더 좋은 타구가 나온다고 생각했다.

윌리엄스의 타격관이 재조명된 건 2015년이다. 타자들이 친 타구의 정보를 제공하는 <스탯캐스트>가 등장했다. 막연하게 표현된 '좋은 타구'가 숫자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타구 속도와 발사 각도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대두됐다.

'세이버 선구자' 톰 탱고는 안타를 위한 최적의 발사 각도는 12도라고 전했다. 그리고 홈런을 위한 최적의 발사 각도는 28도라고 덧붙였다. 이를 바탕으로 탄생된 용어가 '배럴 타구'다. 타구 속도와 발사 각도가 가장 이상적인 조화를 이뤘을 때 생산되는 타구다.

배럴 타구는 <타율 0.500, 장타율 1.500 이상>을 기대한다. 통계에 따르면 99마일 속도를 가진 타구는 발사 각도가 25도에서 31도일 때 배럴 타구가 형성된다. 속도가 1마일이 빨라진 100마일 타구는 24도에서 33도로 범위가 늘어난다. 공을 강하게 맞히면 타구가 조금 높이 떠올라도 더 멀리 날아가는 것이다. 참고로 올해도 959개의 배럴 타구가 타율 0.695, 장타율 2.319라는 엄청난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타구의 '끝판왕'이다.

배럴 타구 구간 (이미지 - 베이스볼서번트)

타구 속도와 발사 각도가 공개된 건 혁명이었다. 현지에서는 '타격의 새로운 과학'이라고 치켜세웠다. 최고의 타격을 위한 결정적 단서를 내놓은 것처럼 보였다.

<스탯캐스트>가 나오기 직전 2014년 메이저리그는 경기 당 평균 4.07득점의 투고타저 시대였다. 그런데 <스탯캐스트>가 나오면서 타자들은 위협적인 타구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 건 2019년이었다. 타구 속도와 발사 각도 이론이 널리 퍼진 그 해, 홈런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졌다. 한 시즌 6,776홈런은 처음 접한 숫자였다. 대부분의 팀들이 각종 홈런 기록을 세웠다. 경기 당 평균 홈런 수 1.39개도 스테로이드 시대를 넘어선 단일 시즌 최다 기록이었다.

타구 속도와 발사 각도는 좋은 타구가 무엇인지 알려줬다. 그러나 부작용도 발생했다. 그저 배럴 타구만 노리는 타자들이 생긴 것이다. 무조건 강하게, 무작정 퍼올리는 타격은 무수한 삼진을 불러왔다. 2021년 리그 타석 당 삼진율 23.2%는 역대 최고 수치였다.

그러자 최신 타격 트렌드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데이빗 로스 전 컵스 감독은 "야구를 하지 않고, 홈런만 치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통산 563홈런으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 레지 잭슨도 "타격에 대한 담론보다 숫자에 더 의존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타격왕 출신이자 다저스와 마이애미 감독을 지낸 돈 매팅리는 "타자들이 의도적으로 발사 각도를 바꾸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어느 분야든 '만능론'은 위험하다. 모든 투수가 강속구를 던질 수 없듯, 모든 타자가 홈런을 칠 수 없는 법이다. 타고난 특성을 파악해서 자기 스탠스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정후가 메이저리그에 발을 내딛었다. 시범경기 타격감이 시즌 출발까지 이어졌던 이정후는 살짝 주춤하는 미니 슬럼프에 빠졌었다. 하지만 어제 시즌 5번째 멀티히트 포함 3출루 경기를 선보이면서 다시 시동을 걸고 있다. 최근 7경기 연속 안타 기간 동안 성적은 31타수 10안타로, 타율 0.323다. 시즌 타율은 0.200에서 0.258가 됐다.

이정후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이정후는 분명 선전하고 있다. 신중해진 메이저리그 투수들을 상대로도 적응하는 중이다. 시즌 초반부터 견제를 받은 타자가 그에 맞춰 빨리 접근법을 수정한 것도 놀라운 일이다. 아직 메이저리그에서 20경기도 뛰지 않은 '신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도 욕심은 끝이 없다. 이제는 타구의 질이 논쟁거리다. 땅볼 타구가 너무 많다는 지적이다. 이에 발사 각도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정후의 땅볼 비중이 높은 건 사실이다. 땅볼 비중 49.2%는 리그 평균 43.2%를 상회한다. 평균 발사 각도 6.3도 역시 리그 평균 13도에 미치지 못한다. 규정 타석을 충족한 타자 190명 중 26번째로 낮다. 발사 각도가 낮기 때문에 땅볼이 많은 건 당연한 이치다.

그러면 땅볼 비중이 높고, 발사 각도가 낮으면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A [GB%] 57.4% [발사각도] 3.5도
B [GB%] 52.2% [발사각도] 5.7도
C [GB%] 51.9% [발사각도] 6.7도


지난해 이정후처럼 땅볼 비중이 높고, 발사 각도가 낮았던 타자 세 명이다. 세 선수는 이정후보다 땅볼 비중이 높았다. 이 가운데 A와 B는 발사 각도도 더 낮았다.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지난해 나쁜 타자로 분류됐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A [타율] .278 [OPS] .818 [홈런] 19개
B [타율] .330 [OPS] .932 [홈런] 22개
C [타율] .275 [OPS] .930 [홈런] 35개


A는 크리스찬 옐리치다. 옐리치는 지난 3년간의 침묵을 깨고 반등하는 시즌을 보냈다. B는 얀디 디아스다. 디아스는 아메리칸리그 타격왕을 차지하면서 커리어 하이를 작성했다. C는 후안 소토다.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리그 최정상급 타자다. 소토도 직전 시즌의 부진을 만회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소토와 디아스는 각각 실버슬러거를 수상했다.

옐리치와 디아스, 소토는 타구의 질이 달랐다고 반론할 수 있다. 실제로 세 선수는 타구의 질이 좋은 축에 속했다. 평균 타구 속도가 빨랐고, 95마일 이상의 하드 히트 비중도 높았다.

옐리치 [속도] 91.7마일 [Hard%] 50.1%
디아스 [속도] 93.4마일 [Hard%] 54.0%
소 토 [속도] 93.2마일 [Hard%] 55.3%


흥미로운 건 이정후의 타구 속도가 세 선수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정후는 타구 속도 평균 92.3마일, 강하게 맞은 하드 히트 비중도 49.2%였다. 표본이 적기 때문에 세 선수와 동일하게 바라볼 수 없지만, 단순히 땅볼이 많고 발사 각도가 낮다는 이유로 이정후가 만든 타구의 질이 폄하되는 건 적절하지 않다.

만약, 이정후가 친 땅볼 타구의 질이 나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타구 속도가 느린 땅볼은 콘택트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수비수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타구다. 또한 땅볼이 특정 구역에 지나치게 몰리는 것도 금물이다. 시프트에 가로막힐 수 있기 때문이다.

땅볼 타구 평균 속도 순위 (25개 이상)

92.5마일 - 이정후
92.1마일 - 케텔 마르테
91.3마일 - 후안 소토
90.9마일 - 매니 마차도


이정후는 땅볼 타구를 25개 이상 친 타자들 중 땅볼 타구의 평균 속도가 가장 빠르다. 20개로 기준을 낮춰 범위를 확대해도 전체 7번째로 빨랐다(1위 카일 슈와버 93.8마일).

그렇다고 이정후가 강한 타구를 양산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잡아당기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이정후는 29개 땅볼 타구 중 잡아당긴 타구가 12개, 밀어쳐서 반대 방향 혹은 중앙으로 보낸 타구가 17개였다. 그리고 반대 방향 혹은 중앙으로 보낸 17개의 타구 평균 속도가 97.5마일에 달했다. 결코 땅볼 타구의 질이 나빴다고 볼 수 없다.

이정후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일각에서는 뜬공 타구에 힘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했다. 그런데 이는 거의 모든 타자에게 적용되는 현상이다. 파워 히터는 뜬공 타구에도 힘이 실리지만, 이정후는 홈런을 펑펑 날리는 파워 히터가 아니다. 그래서 무리하게 발사 각도를 높여 뜬공을 노리는 건 독이 될 수 있다. 한편, 이정후는 뜬공 10개의 평균 타구 속도가 90.2마일이었다. 리그 평균(92마일)보다 느리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긍정적인 신호가 있다. 이정후의 콘택트 능력이 메이저리그에서도 건재하다는 점이다. 이정후는 KBO리그에서 극한의 콘택트 능력을 앞세워 높은 타율과 적은 헛스윙, 낮은 삼진율을 기록했다. 최상위 레벨에서도 이 강점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스트라이크존 콘택트율(91.6%)과 헛스윙률(9.2%) 삼진율(9.5%)이 모두 리그 상위권이다. 특히 헛스윙률은 전체 타자들 중 가브리엘 모레노(8.7%) 다음으로 낮았다.

아웃존 콘택트율 순위

89.6% - 루이스 아라에스
86.4% - 코빈 캐롤
85.0% - 얀디 디아스
84.6% - 이정후
82.1% - 김하성
82.1% - 마이크 트라웃


이정후의 콘택트 능력은 영역을 가리지 않는다.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난 아웃존 콘택트율도 84.6%에 이른다. 전체 4번째로 높다. 애당초 볼에 방망이를 잘 내지 않지만, 결심해서 방망이를 내면 공을 맞히고 있다.

보통 아웃존 콘택트율이 높으면 맞히기 급급한 나머지 타구의 질이 떨어진다. 그런데, 이정후는 여기서도 질적 하락을 최대한 피하고 있다. 아웃존 콘택트율 상위 15명 중 평균 타구 속도가 가장 매서웠다(아웃존 8개 타구 속도 평균 85.2마일, 리그 평균 80.4마일).

이정후 타구 유형별 성적

땅 볼 [타율] .207 [장타율] .207 - 29개
뜬 공 [타율] .125 [장타율] .500 - 10개
라이너 [타율] .588 [장타율] .706 - 17개

물론 이정후의 궁극적인 목표는 라인 드라이브 타구다. 라인 드라이브 타구는 땅볼보다 발사 각도가 높아야 한다. 이정후의 라인 드라이브 타구 발사 각도는 평균 12.6도였다. 이정후도 이 부분을 조정하고 있다. 7경기 연속 안타 이전 발사 각도가 평균 3.3도, 연속 안타 기간 동안 발사 각도는 9.8도였다.

이정후는 아쉬운 점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왔다. 땅볼 타구와 발사 각도도 적합한 결과를 들고 나올 것이다. 일단, 지금은 이정후를 믿고 기다려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