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아니면 옳은 일?'...45년 전, 이란 혁명을 돌아보다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15년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1979년 귀국해 이란 최고 지도자가 됐다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공화국을 세운 이란 혁명이 발생한 지 45년이 지난 지금 당시 변화를 위해 싸웠던 이들은 어떤 마음일까.

후회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으며, 옳은 행동이었다고 굳게 믿는 이들도 있다.

1979년 혁명 당시 샤(이란의 국왕)에 맞서 거리 시위를 벌인 수백만 명 중 하나였던 사데그 지바칼람은 “45년 전만 해도 그 어떤 혁명 참여자도 사람들이 자신을 범죄자로 보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45년이 지난 지금, 많은 이란 청년들은 이란의 지도부와 혁명을 지지했던 이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2022년엔 22세의 여대생 아흐사 아미니가 도덕경찰에 구금된 이후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반정부 시위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인권 침해와 사회적 자유 제한에 더해 좋지 못한 경제 상황 또한 불만이 커지는 이유 중 하나다. 지난달까지 12개월간 물가 상승률이 무려 43%를 기록하는 등 이란의 핵 활동에 대한 서방의 제재로 이란 경제는 휘청이고 있다. 게다가 미국은 최근 이란이 지원하는 군사 단체에 미사일을 발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청년들은 조국이 걸어온 길에 의문을 제기하며 당시 혁명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과연 무슨 목표를 위해 싸운 것인지 비난하고 있다.

2022년 이란에선 여대생 마흐사 아미니의 사망 이후 시위가 벌어졌다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지바칼람은 “내가 고집이 있어서도, 증오심이나 자부심 편견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1979년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난 똑같은 일을 할 것이다. 똑같이 혁명에 참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우리가 무엇을 원했냐고요? 우리는 자유로운 선거를 원했습니다. 정치범이 없는 세상, 지도자 마음대로 국가를 이끌지 못하는 세상을 원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바칼람은 이란이 현재 안고 있는 문제는 혁명 때문이 아닌 이란의 현 지도자들 탓이라고 지적했다.

“저처럼 당시 혁명에 참여했던 이들이 저지른 실수라고 한다면 자유와 민주주의와 같은 혁명의 목표를 추구하는 대신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 ‘이스라엘을 파괴하자’와 같은 반제국주의 구호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지바칼람은 1970년대 자신을 시위로 이끌었던 원칙인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여전히 신봉한다고 했다. 그는 테헤란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쳤으나, 이란의 ‘여성, 생명, 자유’ 운동에 대한 당국의 잔인한 탄압에 항의하다 직장을 잃었다.

지바칼람은 45년 전 이슬람 공화국의 창시자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시민들에게 거듭 약속했던 가치가 바로 자유였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호메이니는 프랑스 망명 중이던 1978년 “자유는 국민의 권리이다. 한 국가의 독립은 모든 이들의 권리이다. 국민을 감옥에 가두거나 이들의 자유로운 발언을 막아선 안 된다”고 연설한 바 있다.

특히 호메이니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는 오늘날 이 연설을 들으며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사회운동가들과 현 체제 간 투쟁을 떠올리게 된다.

이란 혁명 당시 국왕과 호메이니의 역할

1970년대 겨울 휴가 중인 이란 팔라비 왕조의 마지막 국왕과 가족들

팔라비 왕조의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는 37년간 이란의 샤(국왕)로 군림하는 동안 서구화 및 경제 성장을 꿈꿨으며, 이슬람 이전 시대 이란의 고대 역사에 대한 국민적인 자부심을 심어주고자 애썼다.

그가 통치하던 1960년대 이란 여성들은 투표권을 인정받는 등 남성과 비교적 동등한 권리를 누렸다. 당시 수도 테헤란은 나이트클럽과 카바레가 있는 파티의 도시로 유명했으며, 이란에서 생산한 와인은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이렇듯 사회적 자유를 이끌긴 했지만 팔라비 국왕은 통치 스타일이 독재에 가까우며, 민주주의를 억압한다는 비난에 면하게 된다.

특히 시아파 성직자들은 국왕이 이슬람 가치를 훼손한다고 거듭 목소리를 높였으며, 이란 북부 소련의 영향을 받은 좌파 단체들은 사회적 평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1978년 중반까지만 해도 이란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릴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막상 혁명이 일어나자 좌파 지식인, 민족주의자 세속주의자, 이슬람주의자 등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국왕에 반대하며 일어난 시위는 점 더 종교적인 측면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구체화하게 됐다. 그렇게 1년쯤 지나자 이란의 거리에선 이슬람주의가 팽배하게 된다.

호메이니는 아주 능숙하게 자신을 다양한 의견을 통합하는 이슬람주의 정부를 이끄는 지도자로 포장했다. 수백만 이란 시민들은 그를 이란을 코란에 나온 약속된 이슬람 사회로 변화시키려는 신성한 인물이라 생각하며 존경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호메이니는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라는 뜻의 ‘이맘’이라는 호칭도 얻었다.

이란으로 돌아온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열렬히 환영하는 이란 시민들

1979년 당시 TV보도를 보면 이란 국민 수백만 명은 테헤란 거리를 가득 메우며 지난 15년간의 국외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는 호메이니를 열렬히 맞이했다. 시민들은 그가 타고 있는 차량 앞에서 그에게 천 조각을 던지며 축복을 빌었다.

호메이니가 도착하기 전부터 특정한 날 밤 10시에 하늘을 보면 달에서 호메이니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소문이 이란 전역을 휩쓸 정도였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를 믿고 시행했다.

팔레비 국왕의 아내로 현재도 국외 망명 중인 파라 전 왕비는 “우리는 무엇이 사람들을 저렇게 믿게 했나 자문했다. 충격이었다”고 회상했다.

파라 전 왕비는 지금은 사망한 남편, 세 자녀와 함께 1979년 초 ‘휴가’를 떠난 이후 지금껏 이란에 돌아간 적 없다.

혁명이 일어나기 몇 주 전을 회상하며, 파라 전 왕비는 “남편은 조국을 위해 정말 노력했는데, 이러한 일을 겪게 돼 매우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주로 학자와 지식인이었다며 “어떤 조직적인 단체가 이렇게까지 사람들의 머리에 특정한 사상을 주입하고 거리로 나오게 할 수 있었는지 끊임없이 자문했다”고 말했다.

모하메드 레자 팔라비 전 국왕과 파라 왕비는 혁명 이후 이란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편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좌파 및 반종교 단체 중에는 공상주의 정당인 ‘투데당’도 있었다.

현재 영국 런던에 거주하는 샤란 타바리는 과거 투데의 당원이었으며 그의 삼촌이 투데당의 지도자였다.

타바리는 왕조를 뒤집자는 결정에 현재는 의문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타바리는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반대하던 이들 중엔 벌어지는 상황에 동의하지 않지만 침묵을 지키던 이들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타바리는 “모두가 어떻게 해서든지 샤를 끌어내리고 싶어했다”면서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마치 우리 모두가 세뇌당하고 조종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했습니다’

혁명 당시 테헤란대학의 교수였던 호마 나테그도 타바리와 같은 의견이었다. 2016년 사망한 나테그는 심지어 자신에겐 특별히 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좌파 성향 혁명 주동자 중 하나였던 나테그는 혁명을 지지하는 책과 기사를 번역하고 저술했다.

그렇게 혁명 정권이 집권한 지 몇 달 후, 나테그는 종교적인 당국에 환멸을 느끼고 프랑스로 망명해 혁명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반성했다.

나테그는 1990년대 쓴 기사에서 “나는 다른 이들보다 더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다”면서 “혁명 당시 나는 교육자 및 연구자였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열기에 휩쓸려버렸고, 의구심이나 지식 따윈 내버리고 거리 시위에 합류해 군중의 무지에 동조했다”며 후회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나테그는 BBC와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창작물이 샤를 끌어 내리도록 군중을 선동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한편, 1970년대 자신이 썼던 내용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나테그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했다”면서 “우리는 자유를 달라고 요구했지만, 자유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선 거의 무지했다. 나도 그 누구도 자유의 본질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관계에 맞게 자유의 의미를 (마음대로) 해석했다”고 회상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45주년을 기념하고자 지난 1일 호메이니의 묘에 몰려든 이란 시민들

그러나 지바칼람은 당시 시민들이 세뇌당하고 조종당했다는 말엔 이의를 제기했다.

지바칼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기 사진들을 보라”면서 “이들에게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말할 순 없다. 누가 혁명에 참여했는가? 이들은 학생, 대학교수였다. 이들이 선전선동에 휩쓸려 혁명을 일으켰다고 말하는 건 무례하다”고 말했다.

비록 혁명 이후 여러 좌파 단체가 금지되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공화국 수립을 도왔던 좌파 지도자들과 일부 유명 혁명가들이 처형된 건 사실이지만, 지바칼람은 혁명 자체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란의 지도자들은 당시 혁명으로 조국이 외국, 특히 미국과 서방 강대국의 지배로부터 해방됐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립 국방의 증거로 이슬람혁명수비대(IRGC)와 국가 무기 산업의 시작을 든다. 그러면서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의료 및 교육 시스템이 개선됐다고 주장한다.

‘쓰디쓴 앙금을 안은 채 살고 싶진 않으니까요’

그러나 팔레비 통치를 끝낸 혁명이 발발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현재 일부 시위대는 “레자 샤, 당신의 영혼이 축복받기를”, “왕이 없는 이란은 옳지 않다”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으며, 당시 혁명에 참여했던 이들 중엔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파라 전 왕비는 “수년간 선전선동이 이어져왔지만 이제라도 시민들이 국왕이 이란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이해해준다는 건 매우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제게 당시 혁명에 참여했으나 지금은 후회한다는 이메일을 보내옵니다. 제게 용서를 구하죠.”

취재진은 “용서할 수 있나”고 물었고, 파라 전 왕비는 “당연하다!”고 답했다.

“쓰디쓴 앙금을 안은 채 살고 싶진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