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 파도가 새긴 시간의 미학, 경주 양남 ‘주상절리 파도소리길’

조현석 기자 2025. 4. 23.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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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km 짧은 길에 담긴 자연·지질·문화의 감각적 풍경
전망대·카페·맛집까지…걷기 여행의 품격을 완성하다
주상절리 파도소리길 출렁다리. 경북일보

둘레길은 어느새 대한민국 여행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전국 곳곳에서 둘레길이 조성되고 있지만, 진짜 '걷는 맛'을 느낄 수 있는 길은 드물다. 경북 경주시 양남면에 자리한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은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명품길로, 길 위에서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공존을 체감하게 한다.

파도소리길은 양남 읍천항에서 하서항까지 이어지는 약 1.7km의 짧은 해안 산책로다. 2012년 개통 이후 꾸준히 사랑받아온 이 길은 길의 길이보다 풍경의 깊이로 평가받는다. 길을 따라 걷는 이들의 오감은 파도소리와 해풍, 그리고 동해의 푸른 수평선과 조우하며 활짝 열린다.

이 길의 백미는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된 '양남 주상절리군'이다. 신생대 말기 마그마가 차가운 바닷물과 급격히 만나면서 생긴 육각형 현무암 기둥들이 절벽을 따라 펼쳐져 있다. 특히 선명한 부채꼴 형태로 벌어진 주상절리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하며, 동해의 거친 파도와 만난 모습은 한 편의 예술작품처럼 다가온다.

파도소리길은 누구에게나 열린 길이다. 급경사도 없고, 고된 산행도 요구하지 않는다. 흙길과 목재 데크, 벽돌 포장이 어우러진 산책로는 하이힐을 신은 여행자에게도 부담 없다. 짧지만 다양한 걷기 리듬이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암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귀를 채운다. 자연이 들려주는 해양 교향곡은 도심의 소음을 잠시 잊게 한다.
나무데크로 잘 조성된 파도소리길. 저 멀리 전망대가 보인다. 이동욱 기자

최근에는 이 길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새로운 공간들이 생겨나고 있다. 2024년 말에는 해안을 내려다볼 수 있는 엘리베이터 전망대가 완공됐다. 이곳에 오르면 동해안의 수평선과 파도소리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 인근에는 '카페베네 주상절리점', '콘크카페', '카페 팔코' 등 바다 전망을 살린 휴식 공간들이 생겨나고 있으며, 특히 콘크카페는 대형 통창과 야외 테라스가 인상적이다. 해풍을 맞으며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길 위의 여정에 호사를 더한다.

입 안에 바다를 담고 싶다면 지역 맛집을 찾는 것도 좋다. '양남해물칼국수'는 해산물 본연의 맛을 살린 시원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로 오랜 시간 사랑받아왔으며, '진주냉면 남가옥'은 여행객들의 피로를 달래는 깔끔한 한 끼로 손꼽힌다. 주말이면 지역민과 외지인으로 붐비는 '돌고래횟집'은 신선한 회와 해산물 요리를 제공해 또 다른 별미를 선사한다.
양남 주상절리 파도소리길 안내판이 주상절리에 대한 설명을 한다. 경북일보

파도소리길을 찾는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를 품고 있다. 건강을 위해, 대화를 위해, 혹은 혼자만의 사색을 위해. 그러나 이 길은 그 모든 이유를 하나로 품는다. 이정표는 분명하고 길은 단순하다. 준비물 없이, 예약 없이, 그저 걷기만 하면 되는 곳. 매 순간 선택의 피로에 지친 도시인의 마음을 위로하는 길이다.

주차는 읍천항과 하서항 어느 쪽에서도 무료로 가능하며, 길과 전망대 역시 입장료 없이 개방돼 있다. 누구나 무심히 찾았다가 깊이 남는 시간을 갖고 돌아가게 되는 길.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은 오늘도 누군가의 하루를 조용히 바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