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년 전 '만세의 함성'.. 무오법정사 항일항쟁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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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보다 5개월 앞선 1918년 10월 7일.
이 항쟁은 민족 항일의식을 확산시키는 신호탄이 돼 조천 만세운동과 제주해녀 항일운동으로 이어졌고, 3·1운동 등 전국적인 항일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리기 위해 106년이 지난 오늘(6일) 서귀포시 중문중학교에서 기념식이 거행됐습니다.'항일항쟁의 시작, 독립의 빛을 밝히다'를 주제로 열린 이번 행사에는 독립유공자 유족과 도내 주요 인사 등 5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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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보다 5개월 앞선 1918년 10월 7일.
승려 김연일과 방동화 등을 중심으로 신도와 선도교도, 민간인 등 무려 700여 명이 서귀포시 도순동 산 1번지에 있는 법정사에서 단체로 무장을 했습니다.
일제의 탄압에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민국의 주권 회복을 위해 이틀간 일제에 저항한 이들의 1차 목표는 서귀포순사주재소를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하자 2차 목표인 중문리 순사주재소를 습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고이즈미세이싱, 장로교의 윤식명과 일행 부용혁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중문순사주재소에 불을 지른 이들은 출동한 순사들에 의해 총격을 받고 퇴각하면서 결국 흩어졌습니다.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주요 가담자 66명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송치돼 징역 등을 살았고, 재판 전과 수감 중 옥사한 이들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제주도내 최초이자 1910년대 종교계가 주도한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 항일운동으로 기록된 이 항일운동은 '무오법정사 항일항쟁'입니다.
이 항쟁은 민족 항일의식을 확산시키는 신호탄이 돼 조천 만세운동과 제주해녀 항일운동으로 이어졌고, 3·1운동 등 전국적인 항일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기리기 위해 106년이 지난 오늘(6일) 서귀포시 중문중학교에서 기념식이 거행됐습니다.
'항일항쟁의 시작, 독립의 빛을 밝히다'를 주제로 열린 이번 행사에는 독립유공자 유족과 도내 주요 인사 등 5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인공지능(AI) 기술로 독립유공자 66인의 초상화를 복원해 참석자들에게 감동을 안겼습니다.
복원된 초상화와 공적은 추모공간과 특별 전시공간에 전시됐습니다.
제주자치도는 후손을 찾지 못해 전달되지 않은 독립유공자들의 훈장과 표창장도 전국 최초로 국가보훈부로부터 이관 받아 전시했습니다.
오영훈 제주자치도지사는 "항일투쟁의 불씨를 지핀 제주의 자랑스러운 역사인 무오법정사 항일항쟁을 후대에 고스란히 전할 수 있도록 그 가치를 조명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JIBS 제주방송 김재연(Replaykim@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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