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어느 전설적인 한국인 기자의 죽음"

조회 22025. 3. 21. 수정
이경원(K.W. Lee) 대기자, 96세로 별세: 미국 이민 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한 언론인
그의 취재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을 인간적으로 조명하고 하나로 묶는 데 기여했다. 또한 사형수로 복역 중이던 한인 이민자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트립 가브리엘 뉴욕타임스 기자
https://www.nytimes.com/2025/03/19/business/media/kw-lee-dead.html?searchResultPosition=9
18Lee--02-fjgb-superJumbo.webp.ren.jpg NYT "어느 전설적인 한국인 기자의 죽음"
선구적인 아시아계 미국인 언론인 이경원(K.W. 리) 씨가 지난 3월 8일 새크라멘토 자택에서 9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의 취재는 캘리포니아에서 사형수로 복역 중이던 한인 이민자의 석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당시 표적이 되었던 코리아타운 공동체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다.
그의 사망은 두 딸인 소니아 쿡과 다이애나 리건을 통해 확인됐다.
이경원 씨는 1950년대 웨스트버지니아에 정착한 이민자로, 애팔래치아 지역의 선거 부정과 빈곤 문제를 취재하며 폭넓은 언론인으로서의 발자취를 시작했다.
1970년대 새크라멘토 유니온지에 실린 그의 기사, 특히 사형수 이철수 씨에 관한 보도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다양한 아시아 공동체의 사회복지사, 학생, 그리고 할머니들에 의해 복사되어 공유되며 그의 석방을 위한 연대 운동을 촉발했다. 이는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공유된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초기 정치적 행동주의의 중요한 사례로 기록된다.
1992년 4월, 흑인 남성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찰관 4명이 무죄 판결을 받자 폭력 사태가 발생했을 당시, 이경원 씨는 로스앤젤레스 코리아 타임스의 영문판 편집장이었다. 흑인 빈곤 지역 내 또는 인접 지역에 위치한 2,000여 개의 한인 소유 사업체들이 피해를 입었으며, 이는 도시 전체 폭동 피해의 절반에 달하는 규모였다.
이경원 씨는 한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 거주자 간의 복잡한 긴장 관계의 근원을 분석했다. 그는 격정적인 사설에서 "한국인 이민자들에게 이는 가난과 범죄에 시달리는 흑인 지역 사회의 허상과 실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희생양으로 유대인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씁쓸한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라고 기술했다.
그는 또한 주류 언론이 이러한 긴장을 과장 보도하여 무례하고 탐욕스러운 이민자 상점 주인이라는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그들에 대한 폭력을 부추겼다고 비판했다.
그는 "도심 지역에서 거의 모든 한인 상인들은 매일 상점 절도, 인종적 위협 및 괴롭힘에 직면한다"고 썼다.
그의 취재는 한인 이민자들을 인간적인 시각으로 조명하고, 인종과 민족의 경계를 넘어 소통의 다리를 놓고자 노력했다.
때로는 아시아계 미국인 언론계의 대부로 불린 이경원 씨는 1970년 새크라멘토 유니온에 합류하여 탐사 보도 기자로 수년간 활동한 후, 이른바 '민족 언론'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새크라멘토 유니온 재직 시절, 그는 캘리포니아 주 정부의 부패를 폭로하며 입법자들이 비밀리에 자신들에게 후한 연금을 지급하는 방식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유니온지의 편집장이었던 켄 하비는 1994년 새크라멘토 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부패에 극도로 분개했다. 그것은 그를 격분시켰다"고 회상했다.
이경원 씨는 12세에 서울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이철수 씨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생한 중국 갱단 두목 살인 사건으로 부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100편 이상의 기사를 집필했다. 1974년 유죄 판결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그는 칼싸움에서 다른 수감자를 살해했고(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샌 퀜틴 교도소의 사형수로 이감되었다.
이경원 씨는 한 기사에서 "오랫동안 고립되어 단절된 한인 사회에서 이 씨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해 왔다"며 "그의 간절한 정의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도움이 있었다 하더라도 너무나 부족했고 너무 늦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의 취재는 인종 간 용의자 식별의 어려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원심 판결의 허점을 드러냈다. 살인 사건은 차이나타운에서 대낮에 발생했지만, 경찰이 찾아낸 유일한 목격자는 백인 관광객이었다. 체포 경찰관은 이철수 씨를 "중국인"으로 지목했다.
2022년 다큐멘터리 "이철수, 자유를 향한 외침(Free Chol Soo Lee)"의 감독 줄리 하는 인터뷰에서 "그 사건은 다양한 민족 집단의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들은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과 차별을 경험하며 온전한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아왔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지지자들은 법원 밖에서 시위를 벌이고 법률 번호 자금을 모금했다.
1982년 재심에서 이철수 씨는 차이나타운 살인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교도소 내 칼부림 사망 사건에 대한 그의 유죄 판결은 이듬해 감형 협상을 통해 처리되었고, 그는 거의 10년간의 수감 생활 끝에 자유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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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원 씨는 이철수 씨와 자신 사이에 "아주 가느다란 선"이 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한 오랜 취재가 잠재되어 있던 그의 한국인 정체성을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경원 씨는 주류 신문사를 떠나 한인 언론계로 진출했다. 1979년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짧게 존속했던 코리아타운 위클리의 창립 멤버였으며, 1990년에는 코리아 타임스의 영문판 편집장이 되었다.
이경원 씨 밑에서 코리아 타임스 인턴으로 일했던 하 씨는 "그는 한인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소수 민족이었다"고 말했다.
코리아 타임스의 전 직원들은 UCLA 아시아계 미국인 연구 센터에서 2023년에 출판한 책 "사이구: 진실을 권력에 쓰는 한인 및 아시아계 미국인 언론인들"에서 이경원 씨를 추모했다. ("사이구"는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을 일컫는 한인 용어로, 폭력이 시작된 4월 29일을 의미하는 숫자 4-2-9를 뜻한다.)
책의 기고자 중 한 명인 존 리는 이메일에서 "이경원 씨는 본능적으로 약자에게 끌렸다"고 전하며, 이경원 씨가 "냄새를 따라가라" 등 많은 격언으로 유명했다고 덧붙였다.
이경원 씨는 1928년 6월 1일, 현재의 북한 지역인 개성에서 아버지 이형순 씨와 어머니 김순복 씨 사이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과 공장을 운영했지만, 1919년 한국의 일본 점령에 항의한 시위로 구금된 후 석방시키기 위해 가족은 공장을 팔았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경원 씨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공군 학도병 부대에 자원하여 비행 레이더 운용병으로 훈련받았지만,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실제 배치되는 것을 피했다. 그는 한국 전쟁 발발 6개월 전인 1950년에 미국으로 이민 와 테네시에 정착했다. 한국에서 고려대 영문과를 나온 그는 이후 웨스트버지니아 대학교에 입학하여 1953년 저널리즘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첫 신문사 직장은 1956년 테네시주 킹스포트 타임스-뉴스였다. 2년 후, 그는 웨스트버지니아 주도인 찰스턴 가제트에 채용되었다. 신문사는 그를 애팔래치아 깊숙한 곳에 있는 밍고 카운티로 보내 '킹 코울'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에 대해 취재하도록 했다.
그의 날카로운 폭로 기사는 지역 관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들은 신문사 편집국에 전화해 그의 편집자들에게 "그 중국인을 다시 이쪽으로 보내지 마시오"라고 말했다고 이경원 씨는 2017년 동문회지인 WVU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회상했다.
1959년, 그는 찰스턴에서 직장에서 만난 응급실 간호사 페기 플라워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2011년에 사망했다. 딸 소니아 쿡과 다이애나 리건 외에도 아들 셰인 리, 여섯 명의 손주, 세 명의 증손주가 남았다.
이경원 씨의 친가에는 간 질환 병력이 있었다. 그의 부모님과 여섯 명의 형제자매 모두 그 병으로 사망했다고 쿡 씨는 밝혔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당시 그는 간 이식을 기다리던 병실에서 코리아 타임스 영문판을 편집했다.
생명을 살리는 간 이식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해 말,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인권위원회로부터 존 앤슨 포드 상을 받았을 때, 그는 수상 소감에서 자신의 새 간이 흑인, 백인 또는 아시아인 기증자로부터 왔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라며 "우리는 모두 끊어지지 않는 상호 의존과 상호 생존이라는 인간적인 연대의 고리 속에 얽혀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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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원 씨는 평등·인권·정의 구현 등에 앞장서 온 공로로 2007년 미국의 대표적 인권 단체인 정의증진재단이 수여하는 정의상을 받았고, 아시아 아메리칸 저널리스트 협회 최초로 종신 업적상을 수상했다.
또한 미국 워싱턴DC 교외 '알링턴 언론 기념관'에 20세기를 빛낸 500명의 미국 언론인 가운데 유일한 동양계 기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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