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대구(1) 257년 전 대구읍지에 ‘민업경직’ 섬유도시 DNA 기록…대구 섬유패션산업 부활해야

최미화 기자 2025. 12. 1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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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8년 발간 대구읍지에 ‘사상순질 민업경직’(士尙淳質 民業耕織) 이미 기록돼
대구 섬유도시의 면모 재조명
대구는 한때 도심에 섬유공장 굴뚝이 높이 서있을 정도로 유명한 섬유도시다. 대구의 섬유도시 DNA는 257년전 『대구읍지』에 이미 기록돼 있을 정도이다. 최미화 기자
대구는 257년 전에 이미 섬유도시의 DNA가 뿌리내려 있었다. 지금은 기계·금속·자동차부품 등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근대 시기 대구경제를 선도한 업종은 섬유였다. 이는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에 이미 '사상순질 민업경직'(士尙淳質 民業耕織)을 당시 풍속으로 기록할 정도로 대구에 섬유 관련 DNA가 뿌리내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대구읍지 이후 계속 이어지는 출간물에도 "(대구의) 선비는 순수하고 질박함을 숭상하며, 읍민들은 농사와 길쌈을 생업으로 삼는다"고 적고 있다.
1930년 대구상공안내도. 대구도심의 주요 관공서와 당시 대구경제를 이끌던 섬유공장들이 높은 굴뚝을 앞세우고, 기계소리를 내며 섬유를 짰다. 대구근대역사관 제공
근대시기 대구의 3대 섬유공장. 동양염직소는 굴뚝이 서있는 중간 공장이다. 대구근대역사관 제공.

1876년 개항 직후, 외국산 양포(기계로 짠 면포)가 유입되며 국내 직물업과 면업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면제품은 대부분 영국산, 견과 마는 청나라 제품이었다. 옥처럼 곱고 하얀 서양무명이라는 뜻으로 이름지어진 '옥양목'은 19세기 후반 영국 제품으로 인기를 끌었다.

실제로 1930년 대구상공안내도를 보면 대구부청과 공설시장, 대구지방법원과 대구형무소, 경상북도청과 조선식산은행(현 대구근대역사관), 대구사범학교와 대구공립상업학교, 대구역을 품고 있는 대구도심에는 잠업취체소, 가타쿠라제사방적회사 대구제사소, 이시이(石井) 염공장, 동양염직소 영업부, 대동염직소, 동양염직소 공장, 조선견사회사, 야마주제사주식회사 대구제사소, 조선생사주식회사, 스즈키조면공장, 오노다(小野田)제사소 등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일제 강점기에 대구는 이미 섬유산업이 왕성했다. 1911년 미와조테츠(三輪如鐵)는 『조선대구일반』 출간물에서 "대구경북은 전국 최고의 양잠업 산지"라며 그 근거로 서리 피해를 걱정할 필요가 없고, 습기피해가 절대로 없고, 소요경비가 일본의 절반이라는 점을 꼽았다.

이 시기에는 '거대한 재래 뽕나무', '누에 애벌레 매매', '야외에서 누에를 대발에 올려두기', '누에알 말리기', '고치에서 실뽑기' 등을 주제로한 사진엽서까지 다양하게 남아있어 대구를 포함한 경상북도 잠업 전성기를 보여준다.

◆섬유도시 대구직물공업 선구자 추인호

근대 대구 섬유산업이 일본인 자본과 기업 중심으로 발전됐지만 대구출신 일본유학파 추인호씨가 동양염직소를 경영하면서 큰 활약을 했다.
동양염직공장을 운영한 추인호씨는 섬유도시 대구 직물공업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1926년 1월5일자 조선일보 지면. 최미화 기자
일본 유학시기 직물과 염색일을 처음 접한 추인호는 귀국 후 대구 동구 지묘동(당시 달성군 공산면 지묘동)에서 직물생산을 시작했고, 1917년 대구부 수정(현 대구시 중구 인교동 75번지)으로 이전하였는데 일제의 회사령 규제 속에서도 경북의 대표 방직공장으로 성장발전시켜 해방후까지 운영되었다.
대구 섬유산업의 근대기를 보여주는 '대구근대 섬유읽기' 전시회 구성 순서도. 대구근대역사관 제공

당시 동양염직소에는 남녀 50여명이 근무했으며, '동양직'·'동양주'·'동양단' 등 대여섯 종류의 섬유제품을 연간 1만5천필이나 생산하여 연 8만3천790원(1926년 당시 화폐) 수입금을 올렸다. 이후 동양염직소는 경남 진주 읍내에도 지점을 설치하여 연 3만원의 수익을 더했다.

동양염직소가 달성공원 부근으로 이전한 이후 주변에 20여개의 소규모 방직공장이 생겨나 당시 달성동 일대에는 기계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을 정도였다. 추인호는 섬유도시 대구직물공업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일제 시대 대구에서 경영되던 주요 섬유공장 중에 추인호 씨의 동양염직소가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대구근대역사관 제공

◆국채보상운동 참여 추교정의 다섯아들과 대구섬유

지난 1990년에 출간된 『대구섬유산업사』에는 추교정이 대구섬유산업 발전과 국채보상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고 적혀 있다. 추교정의 장남 추인호는 일본 시즈오카현 누마쓰에서 학교를 마치고, 제직 기술을 익혀 바로 아래 동생 추의호와 함께 동양염직소를 설립하였다. 추교정의 삼남 추겸호는 경남 진주에서 동양염직소 지점을 운영했고, 오남 추신호는 견면교직물 제품인 금춘사를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동양제사염직소를 설립한 이가 추신호다.
동양염직소의 성장 추이. 1912년에 26반(反)이던 생산량이 1926년에는 1만9천447반으로 폭증했고, 종업원은 1명에서 200명(1930년)으로 늘었다. 최미화 기자

◆동양저를 아시나요

동양염직소에서 생산한 인기제품 중의 하나는 '동양저'(東洋苧)이다. 동양저는 1916년에 개발된 것으로 면직물을 명주처럼 보이기 위해 잔털을 태워 광택을 내고, 다시 모시처럼 깔깔한 감촉을 살린 여름옷감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대구근대지도에 나오는 대구섬유공장들. 왼쪽 윗부분에 동양염직소가 위치해있다. 최미화 기자

특히 1919년 고종황제 국상 때 백립 등의 재료가 되는 동양저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다시 1926년 순종황제 국상 때도 같은 현상이 반복됐다.

동양저는 일본직물경진대회에서 여러번 수상할 정도로 품질이 뛰어나 일본은 물론 만주에서도 인기를 끌었고, 서간도에까지 수출하였다.
'대구도심 공장굴뚝, 기계소리' 특별기획전시실 입구가 섬유전시회답게 각종 천으로 인테리어 되어 있다. 최미화 기자

동양염직소는 동양저 인기를 증명하듯 경성·개성·인천 등 여러 도시에 판매 특약점을 두고 전국적으로 판매망을 넓혔다.

◆추인호, 대구섬유산업군 조성 계기 만들어

당시 여학생 교복 치맛감은 동양저를 검게 물들인 것이라 할 정도로 인기를 끌던 동양염직소의 성공은 대구섬유산업군을 조성하는 단초가 되었다. 추인호의 휘하에서 독립한 사람들이 새로 사업을 시작하면서 대구시 서구 비산동 인근에 직물공장들이 들어섰다. 동양저는 일본·서간도까지 수출되었는데, 이에따라 대구서문시장과 동문시장 포목상들도 호황을 누렸다.

추인호는 기업경영 외에 대구상공협회 활동을 통해 지역경제 부흥에 앞장섰다. 특기할 점은 신문사들을 경제적으로 뒷받침 하기 위해 꾸준히 자사 광고를 게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구에서 큰 행사나 재해가 있으면 앞장서서 구호품 등을 내놓았다. 추인호는 가진자·배운자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자연스레 실천한, '열린 대구'의 정체성을 실천한 섬유인이었다. 1950년대 이후 시대의 변화 속에서 추인호와 동양염직소란 이름은 섬유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전국 제사공장의 중심 대구
잠령탑(높이 3. 55m, 한국학중앙연구원). 대구 잠령탑은 1930년 누에고치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대구 수성4가동에 건립되었다. 이후 이 잠령탑은 상주시 복룡동으로 이전되었다가, 2013년 함창명주테마파크로 옮겨졌다. 최미화 기자

일제 강점기 대구의 섬유산업은 누에고치에서 실을 생산하는 제사공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제사공장은 1912년 미치다 사다오가 대구최초의 제사공장인 자구리(座機) 공장을 설립한데 이어, 1915년 이천동(李千同)이 이천동 제사소를, 나카노 마오시가 나카노제사공장을 설립했다. 1918년 야마주구미 대구제사소, 1919년 조선생사주식회사, 가타쿠라 제사방적주식회사 대구제사소가 설립되었다.

경북 전역에서 대구로 모여든 고치는 생사로 만들어져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1930년대 후반 대구제조업에서 제사공업 제품의 비중은 22%였다. 또한 대구의 제사제품은 조선 전체 생산의 38%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대구의 3대 제사공장은 야마주제사, 가타쿠라제사, 조선생사(주)로 이 3대 제사공장에서 각각 2만7천625관, 2만1천250관, 1만9천125관씩 생산했다.

◆여공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수많은 노동자가 있었다. 대구의 제사공장은 수백 대의 기계와 수백 명의 여공을 고용한 근대식 공장이었으며, 대구를 제사산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대구 제사공장의 굴뚝은 근대 산업화의 상징이자 근대기 섬유도시 대구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그 이면에는 여성 노동자의 고단한 삶이 있었다.
홍양희 한양대학교 연구교수가 이번 특별전과 연관하여 지난 10일 '식민지 시기 한국 여성의 삶과 여공들'에 대해서 특강했다. 최미화 기자
공장에는 수백 대의 조사기(繰絲機)를 돌리기 위해 수백명의 여성이 투입되었다. 이들은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았으며, 좁은 기숙사에서 집단생활을 했다. 임금은 낮았고, 일본인 관리자와 조선인 노동자 사이에는 엄격한 구분과 차별이 존재했다. 여공(여성노동자)들의 노동은 대구가 제사공업 중심지로 성장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성장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섬유도시 대구의 근대시기를 잘 느낄 수 있는 특별기획전이 대구근대역사관에서 열리고 있다. 최미화 기자

어버이와 어린 동생들을 위해 고사리손으로 대구3대 제사공장에서 실을 뽑던 여성노동자는 약 2천200명이었다. 이 가운데 달성군 출신이 전체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가장 많았고 그 뒤를 군위·경산·칠곡·선산·김천·청도·상주·밀양 출신 여성노동자들이 이었다.(『조선향토지리의 실제:대구편』, 1933년)

◆대규모 섬유공장 기세이제사 대구방직공장 설립

기세이제사는 1940년대 초 대구에 설립된 대규모 섬유공장이다. 30년대까지 일본 가타쿠라제사와 함께 양대 제사 기업으로 성장하여 대구 진출 이전에 청주와 대전에도 공장을 설립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로부터 군수품인 마제품의 제조와 원료의 거래구역을 경상남북도로 제한하는 것을 조건으로 대구에 공장설치를 허가 받으면서 변화를 맞았다.
가타쿠라 제사공장 내부 모습. 출처 『일본지리대계 조선편』 중. 출처 '근대대구 섬유읽기' 팜플렛.

해방 직후, 1945년 9월30일 대구방직공장에서 큰 불이 나서 공장설비의 절반이 타버렸고, 1947년에야 영업을 재개했다.

기세이제사 대구방직공장은 1947년 가동을 재개했으며, 1949년 조선방직 대구공장으로 운영되다가 1955년 대한방직 대구공장으로 바꾼 후 1997년까지 운영되었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3대 제사공장은 해방 후 한국인 자본가 소유로 재편되었다. 가타쿠라제사 대구제사소는 편창공업(주)으로, 조선생사주식회사는 대한생사(주)로, 대구제사주식회사는 신흥공업(주)으로 바뀌었다.
대구근대역사관과 국립대구박물관이 공동 특별기획한 '대구도심 공장굴뚝, 기계소리'를 주제로한 근대대구 섬유읽기전이 대구근대역사관(경상감영공원 앞)에서 열리고 있다. 최미화 기자

◆50년대 후반 대구공장 80%가 섬유업체, 대구 섬유도시로

대구의 섬유산업은 6.25로 인해 전환점을 맞았다. 전쟁 피해를 입은 지역의 공장들이 대구로 이전해왔고, 정부가 의류수급을 위해 면방직을 우선 복구대상으로 지정하면서 대구는 섬유산업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대구에 소규모 직물메리야스 공장이 빠르게 증가했고, 대규모 직물공장도 등장하였다.

대한방직·삼호방직·내외방직을 비롯해 제일모직(1954)·한국나이론(1957) 같은 대기업도 들어서면서 면직물 모직물로 섬유산업이 다각화되었다.
내외방직 면직물 제품 '백합' 상표.

1950년대 후반 대구지역 공장의 80% 이상이 섬유업체였으며 종사자 대부분이 섬유 노동자일만큼 지역 경제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당시 내외방직은 '백합'이라는 브랜드의 면직물도 생산했다.

1970년~80년대 대구섬유산업은 합성섬유의 도입과 수출 확대로 국가경제를 이끌 정도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으나 1990년대 이후 해외 경쟁 심화로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대구 섬유산업은 기능성섬유·첨단소재·친환경섬유 등 분야를 개척하여 IT 바이오와 결합한 새로운 미래산업으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향후 대구섬유가 의류용을 넘어 방탄섬유, 의료용섬유, 특수산업용섬유 등으로 성장하면서 섬유르네상스가 꽃필 날을 기대케 하고 있다. 최고급 의료용섬유를 만들어내는 스위스의 경우 값싼 외국인노동자를 쓰지 않고, 대다수 자국의 고급 섬유노동자를 비싼 임금을 주면서 프리미엄급 각종 산업용 섬유를 만들어내고 있다.

◆2025년 10월 현재 제조업 중 섬유업체 17.3%

2025년 10월 기준, 대구 섬유·패션 산업은 제조업 중 사업체 수 기준 17.3%, 고용 기준 13.2%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부가가치는 약 1조3천321억 원 규모이고, 종사자는 2만6천397명에 이른다. 여전히 전국 섬유산업 중 생산과 수출에서 각각 전국 3위를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에는 대구 제조업 종사자의 절반 이상(약 51%)이 섬유 산업에 종사했을 정도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으나 약화된 상태다.

이번 전시를 열고 있는 신형석 대구문예진흥원 박물관진흥본부장은 "대구에 일찌기 섬유DNA가 있었음을 알게 돼 깜짝 놀랐다"며 "섬유도시 대구의 근대기 섬유공장과 그 실태에 대해서는 덜 알려졌다"면서 이번 전시를 통해 대구 근대섬유사를 더 잘 이해하기를 당부했다.

전시실은 입구에서부터 △'민업경직(民業耕織)', 섬유도시 DNA △대구잠업전습소, 경상북도 원잠종제조소 △대구, 동양염직소 △'동양저'를 아시나요? △대구 3대 제사공장 △'여공'이라는 이름으로 △대구, 섬유도시라는 7개 주제로 이어지고 있다.

전시실에서는 지도상에 표기된 100년전 동인동·대봉동·달성동·칠성동 섬유공장 공장굴뚝과 위치를 만날 수 있으며, 길쌈 자료, 무명‧명주 옷, 일제강점기 양잠 관련 사진엽서와 서적, 면화공출통고서 등의 실물 자료와 추인호와 동양염직소, 대구 3대 제사공장·여공 등에 대한 당시 신문 기사와 자료까지 볼 수 있다.

"대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섬유도시'인데, 지금까지 근대 대구 섬유에 대해서는 모르는게 너무 많았다"는 관람객들은 이번 전시회를 보면서 대구섬유 DNA를 부활시켜야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대구근대역사관 김주란 팀장은 "국립대구박물관이 복식문화에 특화되어 있고, 대구섬유박물관은 광복 이후의 대구섬유역사에 대해서 주로 전시를 하고 있다. 근대시기 대구의 섬유산업은 비교적 덜 알려진 공백기라고 보고, 섬유도시 대구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것을 돕기위해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며 많이 관람하기를 기대했다.

최미화 기자 cklala@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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