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산체스의 큐 끝에서 또 하나의 역사가 나왔다. 스페인 3쿠션의 전설이자 이제는 PBA의 ‘현재형 최강자’로 자리 잡은 산체스가 8차 투어 하림 PBA-LPBA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2개 대회 연속 우승과 통산 3번째 트로피를 동시에 들어 올렸다. 하이원리조트 챔피언십 정상에 오른 지 고작 26일 만에 또 한 번 정상을 밟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현재 그의 경기력이 어떤 수준에 도달해 있는지 충분히 설명된다.

결승 상대는 SK렌터카의 강동궁이었다. PBA 출범 초창기부터 ‘결승 감각’을 증명해 온 강동궁은 통산 5번째 우승을 노리며 결승에 올랐고, 1년 만의 왕좌 탈환을 꿈꿨다. 하지만 흐름은 결국 산체스의 손을 들었다. 세트 스코어 4-2(9-15, 15-9, 15-8, 15-0, 9-15, 15-9), 한 번 밀리면 그대로 주저앉는 선수가 아니라, 1세트를 내준 뒤에도 차분하게 전세를 뒤집을 줄 아는 노련한 챔피언의 얼굴이었다.
승부의 분기점은 3세트와 4세트였다. 1세트를 9-15로 내주며 다소 무거운 출발을 했던 산체스는 2세트에서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단 4이닝 만에 15-9로 세트를 가져오며 ‘오늘 컨디션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3세트 2이닝에서 11점 하이런을 꽂아 넣으며 분위기를 통째로 뒤집었다. 하이런 11점은 단순히 스코어 상의 우위가 아니라, 상대 멘탈에 깊은 금을 내리기 충분한 한 방이었다. 15-8로 3세트를 가져온 산체스는 이어진 4세트에서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퍼펙트에 가까운 내용으로 15-0 완승을 만들어냈다. 단 2이닝 만에 끝난 이 세트는 ‘지금 이 결승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아주 간명하게 보여준 장면이었다.
강동궁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5세트를 따내며 3-2까지 간격을 좁혔고, 마지막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산체스는 마지막 6세트 초반 0-9까지 끌려가던 흐름마저 자신의 쪽으로 다시 회수했다. 일반적인 선수라면 사실상 세트를 포기할 수도 있는 점수 차였지만, 산체스는 거기서부터 경기를 새로 시작하듯 점수를 쌓아 올렸다. 결국 15-9 역전을 만들어내며 승부를 종결했다. 이 한 세트만 떼어놓고 봐도, 어느 정도의 집중력과 흐름 통제 능력을 갖춘 선수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이번 우승으로 산체스는 PBA 통산 3승을 채웠다. 더 인상적인 건 속도다. 그는 2023~2024시즌 PBA에 합류한 이후 이제 겨우 세 번째 시즌을 치르고 있을 뿐인데, 이미 투어 상위권을 넘어 시즌을 대표하는 ‘절대 강자’ 레벨로 올라섰다. 올 시즌만 놓고 보면 8개 투어 중 무려 4번 결승에 올랐고, 그중 두 번을 우승으로 마쳤다. 6차 투어부터는 3개 대회 연속 결승에 오르며 ‘결승 단골손님’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페이스를 이어가고 있다.
성적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상금과 랭킹도 따라온다. 이번 하림 챔피언십 우승 상금 1억 원을 더한 산체스는 시즌 상금 2억8150만 원으로 상금 랭킹 1위를 굳게 지켰다. 누적 상금 역시 4억200만 원까지 끌어 올리며 종전 11위에서 단숨에 통산 6위로 점프했다. PBA 입성 후 몇 시즌 지나지 않아 누적 4억 원 고지를 넘었다는 건, 단순한 인기 선수가 아니라 결과로 증명하는 ‘수입형 에이스’라는 의미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그의 발언이다. 산체스는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이번 시즌 4번 결승에 올라 좋은 성적을 거둬 만족스럽다. PBA에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내 경기력에 매우 만족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적응 중’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실제 결과는 이미 리그를 대표하는 최정상급이다. 월드 클래스 3쿠션 선수로서 유럽식 룰과 세계 연맹 무대에서 다져 온 감각이, 이제 PBA의 세트제와 빠른 흐름, 스피디한 진행에 완전히 맞물리기 시작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PBA 입장에서 산체스의 존재는 리그 브랜드를 설명하는 중요한 상징이다. PBA 출범 초기부터 유럽과 세계 정상급 선수 영입은 늘 화두였다. “진짜 세계 최고들이 한국 리그에 모인다”는 메시지를 증명해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산체스는 그 기대에 가장 정확하게 부합하는 카드다. 스페인 3쿠션의 전설이라는 이름값, 현역 최고의 기술 수준, 그리고 이제 PBA에서까지 만들어내고 있는 성적이 그걸 뒷받침한다. 단순히 팬서비스 차원에서 초청된 스타가 아니라, 토너먼트의 승부 구조 한 가운데에서 실제로 우승을 양산하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결승 상대였던 강동궁의 존재도 산체스의 가치를 더 부각시킨다. 강동궁은 준결승까지 2점대 애버리지를 기록하며 본인의 장기인 공격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PBA 초창기부터 한국 팬들에게 익숙한 ‘우승 설계자’ 가운데 한 명이고, 통산 5번째 우승에 도전할 만큼 아직도 위력적인 선수다. 그런 강동궁을 상대로 1세트 패배 이후 2·3·4세트를 연달아 가져오고, 마지막 세트마저 극적인 역전으로 정리했다는 건, 지금 산체스가 리그 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번 대회에서는 산체스 말고도 또 하나의 기록이 조명됐다. 단일 경기 최고 애버리지를 기록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웰컴 톱랭킹’은 베트남의 응우옌 꾸옥 응우옌(하나카드)이 차지했다. 그는 64강에서 애버리지 3.750이라는 놀라운 수치를 찍었다. PBA가 단순히 몇몇 스타에 기대는 리그가 아니라, 다양한 국가에서 온 선수들이 기록 싸움을 벌이는 환경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지표다. 그 중심에서 산체스는 ‘지속적으로 결승에 올라 우승을 따내는 선수’라는, 결코 흔치 않은 롤을 수행하고 있다.
8차 투어를 마친 PBA는 이제 팀리그 5라운드로 무대를 옮긴다. 산체스 입장에서는 개인전에서 쌓은 이 상승세를 팀리그로 연결할 수 있느냐가 다음 과제가 된다. 웰컴저축은행 소속으로 출전하는 팀리그에서, 그는 단식뿐 아니라 복식에서도 팀의 흐름을 바꾸는 키 플레이어 역할을 맡게 될 가능성이 크다. 개인전에서 이미 증명된 집중력과 하이런 생산 능력이 팀리그의 세트제에서도 재현된다면, 웰컴저축은행 역시 상위권 경쟁에서 한층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결국 지금 PBA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은 하나의 문장으로도 정리할 수 있다. “산체스 시대가 열리고 있다.” 아직 시즌은 절반을 향해 가는 중이고, 다른 강자들도 살아 있다. 하지만 8개 투어 중 4번 결승, 2번 우승, 2개 대회 연속 정상, 상금랭킹 1위, 누적 상금 랭킹 상승. 숫자는 이미 그의 이름을 향해 정렬되고 있다. 이 흐름이 시즌 끝까지 이어진다면, 우리는 몇 년 뒤 “PBA 초창기, 산체스가 리그의 기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던 시기”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기록은 아직 끝이 아니라, 서막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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