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 없이 혈세를? 국가 R&D사업 예타 면제론 '위험한 발상'

김정덕 기자 2024. 10. 21.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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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실패 줄이려 도입한 예타
기술성 평가 어려워 한계 직면
국가 R&D엔 면제하자는 정부
하지만 면제 둘러싼 우려 많아
정치적 결정 막을 대안은 없고
국가 R&D 평가 수단도 사라져
응용 분야 평가 못할 것도 없어
예타 면제만이 정답일까 의문

총사업비가 500억원 이상이고 국가의 재정지원 규모가 300억원 이상인 신규 사업은 예비타당성조사를 받는다. 이를 통해 사업 진행 여부를 결정한다. 국민의 혈세를 투입하는 정부 사업의 실패 확률을 줄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예타조사 대상 사업의 절반 이상은 이런저런 이유로 예타조사를 면제받는다. 정부는 최근 국가 R&D사업의 예타조사도 면제해 주기로 방침을 정했다. 괜찮은 결정일까.

정부가 국가 R&D사업의 예타조사를 폐지하는 법안을 내놨다. 사진은 정부가 지난해 R&D 예산안을 발표하던 모습.[사진=뉴시스]

지난 8일 정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을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대상에서 제외하는 내용의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그동안 국가 R&D사업은 기술성 평가(과기부 장관)를 통과한 국가 R&D사업 중 '총사업비가 500억원 이상이고 국가의 재정지원 규모가 300억원 이상인 신규 사업(국가재정법 기준)'을 추려 기획재정부 장관이 예타조사를 실시해 왔는데, 그 절차를 없애겠다는 거다. 여기서 기술성 평가란 해당 사업이 R&D를 통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인지, 그 기술이 사업성은 있는지 등을 따져보는 절차를 뜻한다.

정부는 "국가 R&D사업의 신속성과 적시성을 제고하기 위해 사업 기획부터 착수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예타조사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대형 가속기나 우주 발사체 등 '구축형 R&D사업'은 그 특성을 감안해 별도의 심사제도를 신설하기로 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구축형 R&D사업은 관리의 난도가 높고, 사업 실패 시 막대한 매몰비용이 발생할 수 있으며, 구축 이후에도 운영비와 같은 경직성 예산을 지속적으로 투입해야 하기 때문에 사업의 타당성과 추진 계획의 적정성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일반적인 국가 R&D사업의 예타조사는 없애고, 대규모 예산이 불가피한 '구축형 R&D사업'은 별도의 심사시스템을 만들어 예타조사를 대신하겠다는 거다.

■ 쟁점 R&D 예타의 태생적 한계 = 사실 국가 R&D사업의 예타조사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은 어제오늘 나온 얘기가 아니다. 무엇보다 저만큼 앞서 있는 기술을 이를 평가하는 기관이 제대로 분석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컸다.

예타조사가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꾸준히 나왔다. 예타조사를 처음 도입한 게 1999년인데, 당시 사업비 기준을 현재에 적용하면 웬만한 사업들은 모조리 예타조사 대상이 된다는 거다.

예타조사 대상 사업의 사업비 기준을 상향조정해야 한다는 취지를 담은 국가재정법 개정안이 숱하게 발의돼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참고: 다만, 이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 이유는 후술했다.]

국회의원들은 여야 할 것 없이 모두 예타조사 면제 확대에 열을 올리고 있다.[사진=뉴시스]

■ 쟁점 R&D 예타의 장점들 = 문제는 국가 R&D사업의 기술성 평가에 한계가 있다는 이유로 예타조사 자체를 면제해주는 게 합당하냐는 점이다. 예타조사가 가진 장점들이 적지 않아서다.

우선 예타조사는 대상 사업을 여러 측면에서 검토한 후 국민경제적 득실을 따져 추진 여부를 판단하는 장치다. 예타조사를 대상 사업과 구체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 제3의 기관에 맡기는 것도 그래서다. 국가 R&D사업을 예타조사에서 배제하겠다는 건 국민경제적 득실을 따져보지 않겠다는 거나 다름없다.

특히 예타조사는 향후 대상 사업의 결과를 평가할 때 중요한 판단 기준을 제공한다. 예타조사 과정에서 수집한 각종 자료나 통계, 정보 등을 평가에 활용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예타조사는 정치적 판단에 따라 사업을 추진했다가 예산이 낭비되는 걸 막는 역할도 한다. 정치인 입장에선 지역 사회의 지지를 받을 만한 사업을 추진하고 싶지만, 일정 규모의 사업은 예타조사를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여야 할 것 없이 예타조사 무력화를 시도해왔다. 국가 R&D사업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은데, 22대 국회도 마찬가지였다. 22대 국회의원(국민의힘 3명, 더불어민주당 7명, 조국혁신당 1명 대표발의)들이 예타조사 면제나 예타조사 기준 상향조정을 담아 내놓은 국가재정법 개정안만 벌써 11개에 이른다.

■쟁점 예타 면제론의 함정 = 이런 이유로 "국가 R&D사업은 예타조사를 면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번쯤 곱씹어봐야 한다.

예컨대 예타조사의 대상인 국가 R&D사업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초기술개발 사업이 아니다. 명시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기초기술개발 사업의 경우, 학계나 산학연이 연계된 연구가 많은데, 이런 사업들은 예산 규모가 작아서 예타조사 대상에서 제외하는 게 일반적이다. 면제가 필요한 국가 R&D사업은 이미 면제하고 있다는 얘기다.

예타조사를 받아야 하는 국가 R&D사업은 응용 분야 연구가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실시한 예타조사 사업들을 봐도 알 수 있다. 민간 전용 위성 발사장을 만드는 '우주산업 클러스터 삼각체제 구축사업', AI반도체 기반의 클라우드 기술을 개발하는 'K-클라우드 기술개발사업', 차세대 첨단패키징 선도 기술 확보를 위한 '반도체 첨단패키징 선도 기술개발사업' 등 모두 응용 분야 연구다. 기초기술개발 사업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예타조사 대상인 국가 R&D사업의 기술성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특히 윤석열 정부가 추진 중인 반도체 분야 국가 R&D사업은 일부 대기업만을 위한 것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예타조사 대상인 국가 R&D사업은 대부분 기초개발연구가 아닌 응용연구 분야다.[사진=뉴시스]

앞서 언급했던 물가상승률에 따라 예타조사 대상 사업의 기준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검증해봐야 한다. 이 주장대로라면 예타조사 대상 사업 수가 매년 늘어야 한다.

하지만 나라살림연구소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예타조사 대상 사업 수는 크게 늘지 않았다. 2019년 27개, 2020년 20개, 2021년 25개, 2022년 22개, 2023년 14개였다. 예타조사 대상 사업 수는 정부의 정책 방향과 관계가 있을 뿐 물가상승과는 상관관계가 부족하다는 얘기다.

박상인 서울대(행정대학원) 교수는 "국가 R&D사업의 미래 편익을 사전에 분석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고 주장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놨다.

"그럼에도 예타조사를 통해서 연구 내용을 구체화하고, 예산을 통제할 수 있다. 예타조사를 폐지한다면 이런 통제가 어려워진다. 또한 예타조사를 받지 않으면 관련 예산안은 곧바로 국회에서 심사할 텐데, 이렇게 되면 정치인들이 국가 R&D사업을 정치적으로 악용할 수 있다. 당초 예타조사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부작용들이 생겨날 것이다."

어떤 시스템이든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래서 존속이나 폐지를 결정할 땐 명확한 근거와 명분이 있어야 한다. 국민경제성을 판단하는 첫번째 관문인 국가R&D 산업의 예타조사를 이렇게 없애도 괜찮은 걸까.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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