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여자 좋다” 부용이 왜 사라졌나…드라마 ‘정년이’ 원작 웹툰 비교 [선넘는 콘텐츠]

이호재 기자 2024. 10. 2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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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정년이’ 중 춘향전에서 방자를 연기하는 윤정년(김태리). 배우 김태리는 “평소에 내지 않은 성량을 내고 생전 처음 듣는 노래를 공부하며 판소리의 매력을 알게 됐다”며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성격이 동력이 됐다”고 했다. tvN 제공

“울지 마쇼. 이쁜 얼굴 마 미워져부렀나.”

1950년대 서울의 한 거리. 사내아이처럼 머리를 짧게 자른 소녀 윤정년은 가냘픈 외모를 지닌 또래 소녀 권부용을 이렇게 위로한다. 부용이 거리에서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모습을 본 정년이 끼어들어 대신 싸워주고 구해준 것이다. 부용을 위로하기 위해 손수건까지 챙겨주는 정년은 실제론 여자지만 마치 숙녀를 보호하는 ‘멋쟁이 신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후 부용은 자신을 구해 준 소리꾼 정년에게 푹 빠진다. 부용은 국극 공연이 끝난 뒤엔 정년을 찾아가 “앞으로 영원히 널 응원할래”라며 백합(여성 동성애를 의미)을 건넨다. 정년이 국극단에서 쫓겨나 텔레비전 방송국으로 전향하러 간 뒤에도 정년이 대배우로 성장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빨리, 빨리 (공연을) 내게 보여줘. 내가 아직 여학생이어서, 너를 진심으로 축하해줘도 이상하지 않을 때”, “난 그때 지독한 마법에 걸린 것이 분명하다. 에로스의 화살이나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온 사랑의 묘약 같은”라는 부용의 대사에 비춰보면 둘 이야기를 사랑이라 봐도 이상하지 않다. “나는 여자가 좋다”, “여자애들은 여자 ‘친구’를 사귄다. 자라면 여자가 된다” 같은 부용의 혼잣말에서 느껴지듯 2019~2022년 네이버웹툰에 연재된 웹툰 ‘정년이’엔 동성애 코드가 농후하다.

웹툰엔 허영서, 윤정년, 권부용 3명이 주연으로 등장한다. 네이버웹툰 제공

● “나의 사랑”…레즈비언 캐릭터, 퀴어 코드 지워

하지만 12일부터 tvN에서 방영되며 12.7%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동명의 드라마엔 부용이란 캐릭터가 아예 없다. 원하는 작품만 골라볼 수 있어 동성애에 대해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웹툰 플랫폼과 달리 채널을 돌리다 누구나 볼 수 있는 드라마 시장의 상황을 고려해 구성 인물에 변화를 줬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는 지난해 3월 국립창극단이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창극 ‘정년이’과는 다른 각색이다. 당시 창극에선 정년과 부용의 동성애 코드도 가감 없이 담겼다. 부용이 부모의 바람에 따라 남자 약혼자와 결혼하자 정년은 상심을 노래로 표현하기도 했다. “나의 사랑”이라는 대사를 통해 둘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드라마는 부용을 제외하고 정년(김태리)과 영서(신예은) 2인 라이벌 구도로 각색됐다. tvN 제공

● 마치 ‘대장금’처럼…여성 동료 간 경쟁 구도 부각

대신 드라마는 정년(김태리)이 성공하기 위해 라이벌 허영서(신예은)와 경쟁하는 구도를 부각했다. 웹툰이 정년, 영서, 부용의 3인 구도라면 드라마는 정년, 영서 2인 구도로 압축한 것이다. 특히 집안에서 골칫거리 취급을 받는 영서는 정년을 꼭 이기려는 마음에 가득 차 있다. 타고난 소리꾼인 정년과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영서가 소리 대결을 펼치며 성장하는 서사인 것. 여성 동료들 간의 경쟁이라는 익숙한 서사로 시청자의 시선을 끈 것이다.

드라마를 연출한 정지인 PD는 올 8월 언론 인터뷰에서 “각색 과정에서 부용이 사라졌지만 부용이 갖고 있던 정서는 다른 캐릭터에 녹이는 식으로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며 “드라마 대장금’(2003)의 장금(이영애)과 금영(홍리나)처럼 드라마 ‘정년이’는 정년과 영서의 관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또 “최종적인 각색 방향은 작품 제목처럼 정년이를 중심으로 주변 인물과 매란국극단 내부의 서사를 끌고 가야 한다는 거였다. 회차가 더 있었다면 이야기를 확장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드라마는 부용을 제외하고 정년(김태리)과 영서(신예은) 2인 라이벌 구도로 각색됐다. tvN 제공

● 3년 동안 판소리 연습한 김태리

웹툰은 여성으로만 구성된 배우들이 모든 배역을 맡는 여성국극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주목 받았지만, 소리 없이 말풍선으로만 공연 장면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주제의식과 서사는 호평받았지만 각종 공연에서 등장하는 대사와 몸집이 부분 컷으로만 전달되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드라마에선 배우들이 직접 부른 판소리가 시청자의 시선을 끈다. 예를 들어 ‘춘향전’에서 정년은 “방~자 분부 듣고 춘향 부르러 건너간다” 같은 대사로 너스레를 떠는 방자 역할을 제대로 소화한다. 김태리는 정년이를 연기하기 위해 3년간 판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전라도 출신 인물의 억양을 자연스럽게 구사하기 위해 주 2, 3회씩 목포에서 사투리 수업을 받기도 했다.

김태리를 가르친 소리꾼 권송희는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김태리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지만 파워풀 해 소리꾼으로서 엄청난 가능성이 있다”며 “변신하고 싶어하는 욕심과 열정이 느껴져서 함께 정년이를 찾아가는 동반자라고 생각하며 지도했다”고 했다. 국극 무대를 만든 박민희 공연연출가는 “국극은 한국 최초로 미러볼을 사용하는 등 파격적인 시도를 하면서도 세련된 공연을 선보였다”며 “국극 무대가 만들어내는 환상적 에너지가 화면을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게 노력했다”고 했다.

문옥경(정은채)는 정년(김태리)을 가르치는 역할로 확장됐다. tvN 제공

● 사제-모녀 서사 확장

인기 국극 배우인 문옥경(정은채)의 역할을 키워 사제 서사로 확장한 것도 각색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웹툰에서 정년은 목포에서 서울로 상경한 뒤 옥경을 만나지만, 드라마에선 옥경이 목포의 시장판에서 우연히 재능 넘치는 정년을 발굴하고 국극을 연습시킨다.

정년이 어머니인 채공선(문소리)의 비밀에도 차이가 있다. 원작은 처음부터 정년이가 채공선의 딸인 것을 알고 있다는 설정이지만, 드라마에서는 정년이가 극단에 들어온 이후 나중에 가서 채공선의 딸임을 알게 되는 것으로 변했다. 원작은 정년이가 어머니의 판소리를 어려서부터 자주 들어왔다는 설정이지만, 드라마에서는 정년이가 어머니의 비밀을 모르고도 타고난 소리꾼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모녀 갈등의 극적 긴장감을 높인 셈이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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