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데탕트' 깨진 영풍그룹, 물러설 곳 없는 3세 '장세준·최윤범'

해방 후 70년 동안 갈등없이 이어지던 영풍그룹에서 3세 경영 체제를 맞아 '전운'이 감돌고 있다. 두 가족은 지난 8월 한차례 지분 경쟁을 벌였다. 현재 소강 상태로 보이지만, 작은 변화도 계열분리를 추동할 '단초'가 될 수 있다. 과연 두 가문은 3세 경영 체제에서 '따로 또 같이' 갈 수 있을까.

장세준 코리아써키트 부회장(왼쪽), 최윤범 고려아연 부회장.(사진=각사)

오너기업인 영풍그룹의 지주사는 ㈜영풍이다. 사업 지주인 ㈜영풍은 아연 등 유가 금속을 제조해 판매한다. 종속회사로는 △영풍전자 △코리아써키트 △시그네틱스 △테라닉스 등 14개의 자회사가 있다. 관계기업으로는 영풍그룹의 핵심인 고려아연을 비롯해 39개의 계열사가 있다. ㈜영풍은 사업지주로서 6개의 상장사와 47개의 비상장사를 직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영풍그룹은 오너기업이지만, 오너 중 누구도 지주사(㈜영풍)에 재직하고 있거나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지 않다. 장형진 영풍그룹 회장은 2015년 ㈜영풍 대표이사 회장에서 물러났고,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은 2016년을 끝으로 ㈜영풍의 비상무이사에서 물러났다. 이후 ㈜영풍은 최씨 가문과 장씨 가문의 일원 없이 전문경영인이 이끌고 있다.

영풍그룹은 장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공동경영하고 있는데, 지주사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겨 경영권 갈등의 불씨를 차단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장씨는 ㈜영풍과 전자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고, 최씨는 고려아연을 맡고 있다. 계열사의 '콘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지주사에 오너가 참여할 경우 의도치 않게 경영에 간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풍그룹, 장세준·최윤범 3세 체제로

현재 영풍그룹은 본격적인 3세 경영 체제로 전환됐다. 3세는 각자 그룹의 핵심회사를 맡아 이끌고 있다. 장형진 회장의 장남인 장세준 부회장은 코리아써키트의 단독 대표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코리아써키트는 인쇄회로기판(PCB)을 생산하고 있으며, 연 6000억원 안팎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장 회장의 차남인 장세환 대표이사는 2013년부터 비철 금속을 수출입하는 서린상사를 맡고 있다. 장 회장은 지난해 투자 회사인 에이치씨를 설립했으며, 경기도 안산 코리아써키트 공장에 사무실을 냈다.

고려아연은 최창걸 명예회장의 장남인 최윤범 부회장이 맡고 있다. 최기호 창업주의 삼남인 최창근 회장이 고려아연의 등기임원으로 활동하고 있어 여전히 3세 경영의 과도기에 있다. 창업주 장남인 최창걸 명예회장과 차남인 최창영 명예회장도 고려아연의 임원으로 활동 중이다.

고려아연은 3세인 최민석 상무가 원료구매 담당으로, 최주원 상무가 기획담당으로 있다. 오너가가 대거 고려아연에 포진해 있다. 이중 장세준 부회장과 최윤범 부회장이 그룹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영풍그룹 지배구조.(자료=NH투자증권)

장씨 가문의 핵심 회사로는 사업지주인 ㈜영풍을 제외하면 영풍전자와 코리아써키트가 있다. 장 부회장은 2009년 반도체 패키징 계열사인 시그네틱스 전무로 입사했다. 이후 2010년 영풍전자에 입사했으며, 2013년 대표이사에 올랐다. 2018년 코리아써키트에 입사했으며, 현재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그룹 핵심 회사를 거치면서 경영을 배웠다.

1974년 생인 장 부회장은 고려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에서 생화학 석사를 땄다. 페퍼다인대학교 최고 경영자(MBA) 과정을 거쳤다.

1975년 생인 최윤범 부회장은 미국 애머스트대 수학과와 컬럼비아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했다.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는데, 2007년 고려아연 온산제련소 경영지원본부장으로 입사했다. 이후 페루와 호주 법인에서 근무했으며, 2019년 대표이사에 올랐다.

가문의 '운명' 쥔 장세준 부회장, '디딤돌'이 없다

장세준 부회장은 최윤범 부회장과 달리 경영능력을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현금창출력이 높은 비철 제련사업과 달리 전자산업은 전방산업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이다. 코리아써키트는 스마트폰과 메모리 모듈 LCD 등에 사용하는 PCB와 반도체 패키지용 PCB 등을 생산한다. 전방산업의 업황이 좋을 경우 수요가 늘어나지만, 업황이 둔화될 경우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다.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은 1조4241억원, 영업이익은 851억원을 기록했다. 순이익은 721억원으로 집계됐다. 매출은 전년 대비 57.8%(5220억원)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535%(717억원) 증가했다. 팬데믹에 따른 펜트업 효과로 IT 기기의 수요가 늘면서 실적이 크게 개선됐다. 영업이익률은 5.9%를 기록해 '미들 싱글 디짓' 수준의 수익성을 나타냈다.

팬데믹 이전인 2019면 매출은 5434억원, 영업이익은 138억원에 그쳤다. 영업이익률은 2.5%에 그쳤다. 2018년에는 178억원의 영업손실을, 2017년에는 110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면서 1.8%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이는 PCB 사업이 수익성이 높지 않다는 의미이다.

지난해 가동률은 89.8%로 2019년 대비 9.4% 포인트 늘었고, 가동시간은 1224시간 증가했다. 지난해 펜트업으로 이례적으로 수요가 늘었고, 판매 단가가 인상되면서 수익성이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코리아써키트의 연결 기준 실적에는 PCB 제조사인 테라닉스와 인터플렉스, 반도체 패키징 회사인 시그네틱스의 실적이 합산됐다. 영풍그룹 PCB 사업이 지난해 이례적으로 실적이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올해 상반기 기준 이익잉여금은 3338억원으로 최초로 3000억원을 돌파했다. 1980년 설립돼 50년 이상 사업을 운영했는데, 이익잉여금이 3000억원에 그치는 점은 PCB 사업의 수익성이 열악하다는 의미이다.

지난해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668억원으로 전년(188억원) 대비 소폭 개선됐다. 현금흐름이 마이너스(-)가 아닌 점은 긍정적이지만, 매출 규모 대비 낮은 수준이다. 코리아써키트는 올해 2분기 기준 자산 규모가 1조2741억원에 달해 작지 않은 회사이다. 하지만 고려아연과 비교하면 성장성과 수익성이 열악하다.

고려아연은 지난해 매출이 10조원에 육박했다. 연결 기준 매출은 9조9767억원, 영업이익은 1조961억원에 달했다. 영업이익률은 10.9%를 기록해 '하이 싱글 디짓' 수준의 수익성을 보였다. 팬데믹으로 전 산업이 역성장을 했던 2020년에도 매출은 전년 대비 13.2% 늘었고, 영업이익은 11.4% 증가했다. 이를 보면 비철 제련 사업은 매해 안정적인 수익을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순이익은 8111억원을 기록했으며, 순이익률은 8.1%에 달했다. 지난해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6068억원을 기록했다. 비철 제련사업은 매해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해 주주에 안겨주고 있으며, 현금흐름도 매우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어 사업의 안정성을 높이고 있다.

최윤범 부회장은 3세 경영을 맞은 고려아연의 사령탑을 맡아 수소와 2차전지 소재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국내 많은 대그룹이 수소와 2차전지 소재 회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싶어하는데, 고려아연은 이를 기회로 한화그룹과 LG그룹과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했다. 한화그룹이 고려아연의 유상증자에 참여해 6.88%의 지분을 확보한 점도 향후 사업적으로 성과를 공유할 수 있어서다. 한화그룹은 태양광 밸류체인을 강화해 친환경 에너지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고려아연은 수소 사업을 키우고 있어 두 그룹은 사업적으로 주고 받을 게 많다. 고려아연은 LG화학과 황산니켈을 제조하는 합작사를 만들었다. 진입장벽이 높은 동박(케이잼) 사업까지 추진 중이다. 신사업에 투자하려면 본업(비철 제련)에서 안정적인 현금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현금창출력이 없이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할 경우 자칫 본업까지 위태로워 진다.

경영권 없는 장씨 가문...고려아연서 얻을 건 '배당금' 뿐

최윤범 부회장이 친환경 에너지로 사업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도 고려아연의 안정적인 성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 장세준 부회장은 PCB 사업의 안정성이 뒷받침되지 못해 사업 영역을 확장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코리아써키트는 2016년 이후 배당을 한차례도 하지 못했다.

장씨 가문은 ㈜영풍의 지분 29.29%(영풍개발 지분 제외)를 보유한 최대주주이다. 고려아연의 지분은 31.57%를 갖고 있다. ㈜영풍은 고려아연으로부터 연간 2000억원 이상의 지분법 손익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는 ㈜영풍의 배당 재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난해 ㈜영풍은 172억원을 배당했는데, 장씨 가문은 약 50억원을 배당받았다. 고려아연은 같은해 2651억원을 배당받았는데, 장씨 가문은 836억원 규모의 배당금을 받았다.

장씨 가문은 고려아연의 경영에 간섭할 수 없지만 배당금만으로 매해 수백억원을 받고 있다. 비록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갖지 못해 사업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없지만, 배당금을 통해 부를 쌓고 있다.

고려아연은 영풍그룹의 핵심 계열사이며, 장씨 가문의 '곳간' 역할을 하고 있다. 재계에 따르면 최씨 가문은 3세 경영을 맞아 영풍그룹에서 독립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장형진 회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두 가문의 공동경영 체제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지난 8월 한화그룹을 고려아연의 우호세력으로 초청하면서, 계열분리를 둘러싼 두 가문의 '총성없는 전쟁'은 서막이 올랐다.

최씨 가문의 계열분리가 어떻게 정리될지 현재 알 수 없다. 다만 최씨 가문이 지난 8월 고려아연에서 장 회장을 '패싱'하고, 한화그룹을 '백기사'로 초청한 만큼 두 가문의 공동경영은 어떻게든 결말이 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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