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통해 생태 민주주의까지, 신생언론 ‘스플란!’의 실험

파리·갱강/김다은 기자 2022. 11. 22.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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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환경 및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저널리즘 헌장’이 발표됐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이 ‘비키니’로 대표될 수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프랑스의 기후위기 저널리즘을 취재했다.

기후위기 시대다. 전방위적이고 가속화하는 기후 재난으로 저널리즘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프랑스에서는 2015년 파리에서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가 열린 이후 기후위기 관련 보도가 꾸준히 증가해왔다. 지난해 기후위기 보도의 위상이 달라지는 또 다른 계기가 있었다. 사회 각 분야에서 탄소 저감을 의무화한 ‘기후법’이 프랑스 의회를 통과한 것이다. 기후위기 보도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눈에 띄게 높아졌고, 주류 언론들은 뉴스룸을 재편하며 관련 보도를 강화했다. 솔루션 저널리즘·참여 저널리즘이 화두로 떠올랐다. 올해 9월에는 프랑스 최초로 ‘환경 및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저널리즘 헌장’이 언론인의 자발적 참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시사IN〉은 프랑스의 비영리 환경 전문 매체 〈르포르테르(Reporterre)〉, 브르타뉴 환경 탐사언론 〈스플란!(Splann!)〉, 청소년을 위한 생태기후 잡지 〈위 드맹 100% 아도(We demain 100% ado)〉를 현지 취재했다. 12월6일에는 ‘기후위기 시대, 언론의 역할’을 주제로 제6회 〈시사IN〉 저널리즘 콘퍼런스(sjc.sisain.co.kr)가 서울 중구에 있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

2019년 12월 프랑스 파리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환경운동가 100여 명이 마크롱 대통령의 초상을 들고 기후위기에 관한 정부의 대응을 촉구하고 있다. ⓒAP Photo

브르타뉴는 프랑스에서 가장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지방이다. 인구 330만명의 브르타뉴 사람들을 ‘브르통(Breton)’이라 부른다. 이 단어는 그들 언어인 브르타뉴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브르타뉴는 프랑스 내에서 유일하게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지방인데, 유네스코 소멸위기어로 지정된 브르통을 지키기 위해 몇몇 도시에서는 브르통을 이용해 방송을 제작하거나 문화 모임을 하면 지원금을 주기도 한다. 심지어 브르타뉴에는 ‘궨하두(Gwenhadu)’라는 이름의 고유한 지역 깃발도 있다. 그래서일까. 자존심 강한 브르통들이 살고 있는 이곳은 프랑스 내에서 신문구독률이 가장 높은 지역이자 지역 언론이 가장 많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이기도 하다.

10월7일, 고속열차 테제베(TGV)를 타고 파리에서 세 시간 떨어진 브르타뉴의 작은 소도시 갱강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관청 주변의 공터가 북적거렸다. 비닐 포장이 되지 않은 각종 채소와 과일이 가득한 마르셰(시장)가 열리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가 다가와 전단을 건넸다. 열흘 뒤에 파리 나시옹 광장에서 열릴 ‘물가상승과 기후위기 대책을 요구하는 시위’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그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파리로 상경해 집회에 참여할 거라고 말했다.

‘브르타뉴 농부들은 프랑스인 셋 중 한 명을 먹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프랑스인들의 식탁은 브르타뉴 지방과 연결돼 있다. 2021년에 발표된 브르타뉴 농업회의소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 전체 가금류의 57%, 유제품 52%, 돈육 75%, 육우 42%가 이곳에서 생산된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비옥한 땅과 자연은 브르타뉴 지방의 자랑이자 자부심이다.

농축산업 종사자가 많은 브르타뉴의 특성상 이곳 지역민들은 기후위기와 환경, 생태에 대한 관심이 높다. 잡지와 신문을 판매하는 가판대를 살펴봐도 이를 실감할 수 있다. 갱강에 본사를 두고 있는 브르타뉴 지역 언론 〈레코(L’Echo)〉의 이날 1면 기사 제목은 ‘식수가 부족해질까요?’였다. 기후위기로 가뭄이 길어지자 갱강 주변 댐의 저수량이 줄고 식수와 농업수 공급에 마찰이 생길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1면을 넘기자 언론인 이녜스 레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2019년에 발간된 그의 책 〈녹조류, 금지된 이야기〉가 영화로 각색돼 촬영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이녜스 레로는 브르타뉴의 가장 유명한 언론인 중 한 명이다. 그는 2018년 브르타뉴로 이주한 뒤 지역 내 농업협동조합 직원들이 겪는 살충제 중독 문제를 추적해 보도했다. 농가의 살충제 사용에 대한 공적 감시가 이뤄지지 않음에 따라 환경이 오염되고 노동자 역시 질병에 노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녜스 레로는 더 적극적으로 환경오염에 의한 건강 피해 문제를 파헤쳤다. 〈녹조류, 금지된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돼지 농가에서 나오는 가축 분뇨는 브르타뉴 해안에 거대한 녹조 띠를 만들었다. 녹조는 부패하면서 유독가스를 배출하고, 그 영향으로 19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수십 년간 지역민들이 죽거나 아팠다. 이 사건을 다룬 그의 연재만화는 책으로 묶였다. 5만 부가 판매될 만큼 관심을 받았지만 그는 익명의 협박과 수차례 소송을 겪어야 했다.

진실을 고발한 언론인을 향한 농축산업계의 압력과 공공기관의 침묵은 브르타뉴 시민사회를 흔들었다. 2020년 5월, 언론인 350여 명은 이녜스 레로를 지지하는 탄원서를 발표했다. 시민들도 합세했다. 이 사건은 지역 행정부에 ‘농식품 분야에 대한 정보 제공 및 언론의 자유 보장’을 요구하는 집단 투쟁으로도 이어졌다.

하지만 언론인에 대한 위협은 계속됐다. 이듬해 농식품 기업에 대한 국가보조금 지원 내역을 조사하던 브르타뉴 지역 방송사 ‘라디오 크레이즈 브레이즈(Radio Kreiz Breizh)’의 언론인 모르간 라르주는 누군가 자신의 자동차 뒷바퀴 너트를 제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농업 분야 로비단체의 지속적 협박이 언론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국경없는 기자회’는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안전을 위한 경찰 배치를 요청하며 사법 당국에 고발장을 제출하기도 했다.

연이은 사건들로 인해 그간 브르타뉴 지역에 만연한 농축산업 분야의 로비와 정경 유착, 그로 인한 환경파괴와 인권침해 문제가 재조명됐다. 시민들은 더 투명하고 명확한 정보를 원했다. 2020년 9월, 이녜스 레로와 젊은 프리랜서 기자 10여 명은 브르타뉴 탐사언론 〈스플란! (Splann!)〉을 설립했다.

‘스플란’은 프랑스어가 아니다. ‘선명한’이라는 뜻의 브르통이다. 〈스플란!〉의 모든 기사는 프랑스어와 브르통, 두 가지 언어로 제공된다. 이들은 기업 후원과 지방자치단체의 지원금, 광고를 받지 않고 편집 자율성을 지킬 것을 시민들에게 약속했다. 브르타뉴의 시민 1756명은 〈스플란!〉의 기사를 보기 위해 9만4000유로(약 1억3000만원)를 후원했다.

〈스플란!〉의 첫 기사 ‘브르타뉴, 암모니아 공기를 마시다’는 2021년 6월에 공개됐다. 대규모 축산농가가 배출하는 암모니아 때문에 주민들의 건강과 삶이 위협받고 있지만 공공기관은 예산을 이유로 방관하고 있었다. 주민들과 농장 노동자들은 “코를 찌르는 냄새로 숨쉬기가 버겁고 알레르기 증상처럼 목구멍, 눈, 코가 따가워지는” 피해를 오랫동안 겪어왔지만 어느 언론도 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올해 7월 보도한 ‘랑덩베스의 돼지 농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시민 집회를 일으킨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이 기사는 지역 환경조사관과 유착해 자신의 돼지 농장을 확장하려 한 양돈협회 임원의 비리를 폭로했다. 행정법원은 학교와 주택단지, 유기농 경작지 등 주민들의 생활 터전에서 불과 300m 떨어진 거리에 연간 2만7000마리 돼지를 사육할 거대 농장 증축 계획을 승인했다. 〈스플란!〉이 공개한 농장 증축 승인서를 살펴보면, 이곳은 폐수 방류와 대기·토양 오염,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환경정화 장치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기사가 나가고 한 달이 지난 8월27일, 시민 450여 명은 농장이 위치한 랑덩베스에 모여 검은색 장화를 신고 ‘장례식 시위’를 벌였다. 여론을 뒤집기 위해 양돈협회 측도 반대 시위를 열면서 양측이 첨예하게 맞섰다. 하지만 행정법원은 돼지 농장 증축 승인 여부를 재검토하기로 했다. 현재 시민들과 〈스플란!〉은 그 결정을 기다리는 중이다.

 

“아, 〈스플란!〉 기자들이군요”

〈스플란!〉에는 월급을 받는 상근기자가 없다. 편집위원 다섯 명을 포함한 모든 기자·번역가·디자이너가 자원봉사자다. 편집국 사무실도 없다. 편집위원인 궨바엘 델라노에, 쥘리에트 카바소로제, 실뱅 에르노를 만난 장소는 ‘갱강 직업훈련센터’ 내에 있는 빈 사무실이었다. 하지만 〈스플란!〉은 지역의 어느 언론사보다 많은 제보를 받으며 독자들과 신뢰를 쌓고 있다. 세 편집위원에게 물었다.

〈스플란!〉의 편집위원. 왼쪽부터 궨바엘 델라노에, 쥘리에트 카바소로제, 실뱅 에르노. ⓒ시사IN 김다은

〈스플란!〉은 어떻게 운영되나?

델라노에 : 현재 전체 멤버는 30명 정도지만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은 편집위원 다섯 명을 비롯해 10~15명이다. 탐사보도 한 건에 기자 1~2명이 붙는데 짧게는 두 달, 길게는 여섯 달씩 취재를 이어간다.

에르노 : 〈스플란!〉의 운영 예산은 거의 100% 독자들의 기부로 이루어진다. 타 언론사와의 제휴도 수익이 된다. 〈르포르테르(Reporterre)〉 〈메디아르(Mediart)〉 같은 탄탄한 기성 언론뿐만 아니라 ‘라디오 크레이즈 브레이즈(Radio Kreiz Breizh)’ ‘프랑스 3(France 3)’ 같은 방송사와도 온라인 매체로는 최초로 파트너십을 맺었다.

지역 내 환경 비리를 파헤치는 탐사보도를 한다. 단서는 어디서 찾나?

카바소로제 : 정부, 환경단체, 기업에서 환경·생태에 관한 다양한 지표와 보고서를 발표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보고서를 살펴보지 않는다. 시민들뿐만 아니라 전문가나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오픈소스로 개방된 문헌들을 포함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런 자료들을 계속 찾아보고 읽는다. 이렇게 자료를 읽고 반복하고 익히면 수치들 사이에 숨겨진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 감각이 생긴다.

에르노 : ‘랑덩베스(Landunvez)의 돼지 농장’ 기사를 준비할 때는 초반에 해당 돼지 농장에 대해 조사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농장을 신축하거나 증축할 때는 분뇨 배출과 악취, 토양의 산성화, 수질오염 대책까지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들을 충족해야 한다. 그런데 관련 부처의 자료를 살펴보고 실제 현장을 찾아보니 모든 내용이 엉터리였다. 그 과정에서 실제 피해를 입고 있는 지역민들로부터 증언과 해당 농장에 대한 숨겨진 비리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시민들의 제보가 굉장히 중요했다.

왜 사람들이 신생 언론 〈스플란!〉에 제보할까?

카바소로제 : 이유는 하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언론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거대 기업이 환경을 파괴한다는 걸 체감하고 있지만 확실한 정보를 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지역 행사나 프로그램에 자주 초대받는데 가보면 많은 시민들이 먼저 다가온다. “아, 당신들이 〈스플란!〉 기자들이군요”라며 말을 건다. 그들은 자신이 겪은 일, 이웃과 가족이 겪은 일을 우리가 말해줄 거라고 굳게 믿는다. 그 믿음을 지켜나가는 게 지역 언론이자 환경·생태 이슈를 다루는 우리의 역할이다.

〈스플란!〉의 목표는?

델라노에 : 시민들에게 행동할 수 있는 동력을 주는 언론이 되는 거다. 독자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우리가 제시할 필요는 없다. 시민들은 정의롭지 않은 진실이 숨겨져 있다는 게 드러날 때, 그것이 곧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움직인다. 시민들이 움직이면 정부와 기업은 반드시 움직이게 된다. 변화는 시민들로부터 시작된다. 환경이라는 희소한 가치가 민주적으로 분배되지 않아 사회적 약자의 생존이 위협받는다는 사실에 시민들이 분노하고 변화를 도모하는 게 곧 ‘생태 민주주의’다.

에르노 : ‘환경·생태 보도’라는 테두리에 우리를 가두려고 하진 않는다. 기후위기가 가속화할수록 우리가 대처해야 하는 삶의 불안과 위험은 모두 환경·생태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좋은 환경 기사’를 쓰려 하기보다 그냥 ‘좋은 기사’를 쓰면 된다.

〈시사IN〉 저널리즘 콘퍼런스 SJC 2022 : 기후위기 시대, 언론의 역할을 묻다 https://sjc.sisain.co.kr/

파리·갱강/김다은 기자 midnightblu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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