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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나를 믿는 게 어려워
“넌 너를 믿어?” 라는 질문에 쉽사리 “응” 이라고 답하지 못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2017 . 06 . 15
가지 않았던 길에 당당히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적어도 나는 아니다. 부끄럽지만, 가고 있던 길의 다음 걸음 조차 ‘이게 맞는 걸까? 잘 가고 있는 걸까?’ 묻고 또 묻는 것이 나의 일상이니까.
그럴 때마다, 힘을 내서 살아가야 할 시간에 스스로를 의심하는 것 같아서 늘 속상했었다. ‘사서 걱정’이라며 핀잔도 많이 들었다. 나는 왜 나를 믿어주지 않는 걸까. 나는 왜 나를 믿지 못하는 걸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 자신’이라서 뭐라 모진 말도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
얼마 전, 한 달에 한 번 진행하는 독서 모임에서 김연수 작가의『청춘의 문장들』을 다시 읽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건 20대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30대가 된 지금, 오히려 더 뜨겁고 아프게 읽혔다.
“1999년쯤이었다. 그즈음 나는 내게 돈도 명예도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사회나 문학을 쇄신하는 사상이 담기지도 않을 게 분명한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다. 퇴근한 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매일 써 내려갔다. / 그렇게 한 달 정도 썼을 때쯤이었다. 컴퓨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밤하늘이 보였다. 문득, 고독해졌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오직 그 문장에만 해당하는 일을 나는 하고 있었다. 그 소설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그 소설로 인해 내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지,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그 문장뿐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받았던 모든 상처는 치유됐다.”
아름답게만 읽혔던 이 문장들이 이토록 야속했던가. 작가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절을 돌아보면서 ‘치유’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 의미 없을 것 같은 문장들을 써 내려가던, 매일 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의 괴로움과 외로움이 절절하게 와 닿았다. 어쩌면 나 또한, 독자라고는 오로지 나 하나뿐인 이야기들을 쓰며 ‘이게 뭐하는 짓일까’하고 울상 짓는 밤들을 겪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반년 넘게 공부해도 더 이상 늘지 않는 일본어를 들여다볼 때, 디지털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영상 편집을 배우다가 파일을 통째로 날려버릴 때, 아침 조깅을 위해 맞춰둔 알람을 꺼버리며 다시 잠들 때… 나는 똑같이 괴롭고, 이렇게 살아가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어 불안해졌다.
김연수 작가가 적어 내려간 문장처럼, 시간이 지나면 바보같게만 느껴지는 이 시절도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우리는, 그 순간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흔들린다. 그 ‘훗날’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과연 오기나 할는지… 믿을 수가 없어서.
멋들어진 ‘훗날’이란 누군가에게 설레는 꿈이기도, 커다란 욕심이기도, 무거운 책임감이기도 할 것이다. 어떤 형태든 누구도 그 생각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으리라. 내 경우를 들자면, 내가 꿈꾸는 ‘훗날’은 강박에 가까웠다.
잘 살고 있는 건지 스스로를 믿을 수 없을 때마다, 나는 내가 이뤄야 하는 것들에 매달렸다. 그러지 않고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너무 괴로워서 버티기 힘들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라는 믿음이 필요했다. 그렇게 30여 년을 살았다. 나 자체를 믿기 위해 노력해본 기억은 없다. 내가 하고 있는 ‘무엇’을 믿기 위해 노력했을 뿐.
그게 전부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내일이면 나아질 거야. 취업하면 괜찮아질 거야. 돈을 조금만 더 벌면, 더 높은 위치에 가면, 더 많은 인맥을 가지면…. ‘지금의 나’를 믿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내가 믿을 만한 목표들을, 그 ‘훗날’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손에 거머쥐기 위해 아등바등 했던 많은 목표들이 과연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줬었나? 하나의 시점에 다다르면 그곳에 있는 건 다음 목표 혹은 또 다른 목표였다. 그럴 때 마다 나 자신에게 ‘믿음’이란 선물을 건네줄 시기를 미뤘다. 그저 이 모든 걸 다 해내면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삶이 흔들릴 때, 혹은 중요한 것들을 선택해야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가 다다라야 할, 먼 곳을 바라본다. 그래야 한다고 배웠다. 하루빨리 완성형이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이야기 하는 세상 속에서, 방금 틔운 파릇한 싹을 고이 아껴주는 건 쉽지 않은 일 이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쓸지, 어떤 책을 낼지, 등단은 언제할지, 어떻게 유명해질지 묻는다. 영어를 잘 하고 싶은 사람은 토익이나 토플 점수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 운동을 시작했다고 하면 ‘식스팩’ 얘기부터 꺼낸다.
실은 그게 아니라,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글을 쓰는 나, 마음에 드는 영어 한 문장을 되뇌는 밤, 느릿느릿 뛰면서 느끼는 새벽 공기의 시원함… 이런 작고 명확한 순간들이 ‘진짜’인데. 더 소중하고 생생한 것인데. 극단적으로 말해서, 삶은 오로지 그런 순간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나는 저기 멀리에 어떤 대단한 것이 있다고만 생각하며, 거기 가지 못한 나 자신을 책망하고 믿어주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랬다.
이제는 이 모든 걸 알게 되었지만, 알면서도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해 불안한 날들은 존재할 것이다. 꼭 쥐고 있으려고 노력해도 내 손 안의 믿음을 놓치게 되는, 그런 버거운 순간들이 분명 있을테니까.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좌절하고 불안한 만큼 또 하루 치의 믿음을 찾아내는 것. 그런 매일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불안해하는 내 마음 때문에 속상해하고 주저앉는 게 아니라, 멍투성이 무릎이라도 또 한 걸음 나아가려고 일어서야지. 세상에는 나 자신을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믿으려 애쓰고 결국엔 믿게 될 네가 대단한 거라고. 그 말을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매일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