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의 주 69시간… “‘쉴 땐 푹 쉬게’ 약속 지킬 장치 있어야”
尹정부 ‘근로시간 개편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이 불러온 후폭풍이 거세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6일 입법 예고한 개편안에는 근로자들이 바쁠 때는 일주일에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하고, 쉴 때는 장기 휴가를 갈 수 있게 하는 내용이 담겼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한 주 최대 근로시간을 52시간(법정 40시간+연장 12시간)으로 제한하고 있다.
개편안 발표 이후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와 중소기업중앙회 등 경제계는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혔으나, 전반적으로는 부정적 반응이 많았다. 외신에서도 비판적 보도가 줄을 이었다. 미 워싱턴포스트는 한국의 높은 자살률과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언급하며 “이미 일중독(workaholism)으로 잘 알려진 한국에서 개편안은 근로자들의 반발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호주 ABC는 한국 전체 취업자의 연평균 근로시간이 OECD 평균 1716시간을 훌쩍 넘는 1915시간에 달한다고 전하며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경제국 중 하나인 한국에서 과로로 인한 죽음이 너무 흔하기 때문에 ‘Kwarosa(과로사)’라는 단어가 있다”고 소개했다.
비판 여론 확산에 윤석열 대통령은 14일 재검토를 지시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개편안이) 국민들로부터 오해받는 면이 있다고 보고 있다”면서도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국민이 반대하면 못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국민 관심의 초점이 ‘69시간’에 맞춰져 있어, 내년 총선을 앞두고 큰 악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며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개편안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주도 한 달 살기? 과로 인한 건강 악화?
개편안의 핵심은 ‘주 52시간제’의 틀은 유지하되, 연장근로 시간의 관리 단위를 다양화하는 데 있다. ‘주 12시간’ 이내로 묶여 있던 연장근로 제한을 ‘월 52시간’ ‘분기 140시간’ ‘반기 250시간’ ’연 440시간’ 내에서 노사 합의로 선택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것이다. 관리 단위를 분기·반기·연 단위로 확대하면 현행과 대비해 연장근로의 총량은 줄어드는데, 특정 주의 경우 69시간(근무일간 11시간의 연속 휴식을 보장하지 않는 경우 64시간)까지도 일할 수 있게 된다. 개편안에는 선택근로제 확대, 근로시간저축계좌제 도입 등의 내용도 있다. 개편안대로 시행될 경우 ‘제주도 한 달 살기’ ‘주 4일 근무’ 등도 가능하다는 게 고용노동부의 설명이다.
경기도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김모(59)씨는 “직원이 한 주에 52시간 30분 일했다고 불법이라는 건 말이 안 된다. 52시간제 때문에 납기도 못 맞추고 애로 사항이 많았다”면서 “일이 많을 땐 많이 하고, 없을 땐 쉬는 게 (사용자와 근로자) 서로에게 좋다고 본다”고 했다. 반면 중견기업에 다니는 회사원 심모(35)씨는 “지금도 포괄임금제 때문에 야근수당을 제대로 못 받고 있고, 상사 눈치 때문에 휴일 근무로 생기는 휴가도 마음대로 쓸 수 없다”며 “법적으로 주 69시간 일하는 게 가능해지면, 실제로는 일하는 시간만 늘어나고 정당한 보상은 받지 못할 게 뻔하다”고 했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는 “어차피 일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 52시간 제약으로 무료 봉사하는 것보다 낫다” “주 52시간은 너무 짧아 투잡, 스리잡을 뛰는 이들도 있다”는 찬성 의견과 “회사에 일이 안 몰린다고 직원이 해야 할 일이 없어지는 게 아닌데, 장기 휴가나 단축 근로가 가능하겠나” “출산율은 아예 포기했나 보다” 등의 반대 의견이 엇갈렸다.
여론조사상으로는 반대 의견이 찬성보다 약간 더 많았다. 개편안 윤곽이 드러난 지난 1월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실시한 전국지표조사(NBS)에서 응답자의 48%가 반대, 45%가 찬성했다. 하지만 20대와 30대, 40대에서는 반대 의견이 각각 57%, 60%, 60%로 훨씬 높았다. 젊은 층이 주로 사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노동 현장에서 한 번도 일을 안 해본 사람들이 만든 정책” “한 주에 69시간 일하면 결혼은 어떻게 하고 아기는 어떻게 낳으란 말이냐” 같은 글들이 매일같이 올라온다. ‘MZ 노조’라 불리는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도 “선진국에 견줘 평균 노동시간이 많은 한국이 연장근로시간을 늘리는 것은 노동조건을 개선해온 국제사회 노력에 역행한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정부·재계 “내용 왜곡돼 전달” 野·노동계 “反역사적 퇴행”
정부는 개편안의 내용이 국민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이다. 연장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게 하자는 개편안이 ‘주 69시간제’로 요약되면서 마치 근로자가 매주 69시간씩 일해야 하는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다. 개편안 밑그림을 그린 미래노동시장연구회 소속 권혁 부산대 교수는 “개편안을 ‘주 69시간제’라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근로시간 총량은 유지하거나 줄이는 것인데, 마치 매주 근로시간을 17시간이나 늘리는 것처럼 알려진 데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근로의 시점과 양에 대한 근로자의 선택권을 넓히는 것이 (개편안의) 본래 취지”라고 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제조업 세계 5위인 우리나라는 연구·개발이나 수출 등 집중 근로가 어쩔 수 없이 요구되는 산업이 국가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며 “업무 집중이 필요한 경우 (근로시간 유연화가) 활용될 것이고, 이는 기업 효율성을 제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과 노동계에서는 개편안을 백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판교 오징어잡이배(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게임 회사)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크런치 모드(게임 출시 직전 고강도 근무 체제)라는 이야기가 회자될 정도로 상황이 나쁜데 전 부문을 장시간 노동의 현장으로 만들려는 퇴행적 조치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산업재해 관련법상 과로 인정 기준인 4주 평균 64시간 근로는 ‘그렇게 하면 죽는다’는 경계선인데, 이를 기준점으로 만들어 놓는다는 것은 근로자의 건강권을 크게 해칠 소지가 다분하다”며 “사회적으로 합의된 주 52시간제는 지켜져야 한다”고 했다. 이어 “(개편안이) 불규칙 몰아치기 장시간 노동을 조장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개편안이 노사를 두루 만족시키기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권혁 교수는 “근로자들이 ‘형식만 선택이지, (주 69시간 노동이) 강제될 것’이란 우려를 한다”며 “근로자의 진정성 있는 동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또 근로자의 건강권 보호를 위해 휴일 근로 제한, 예측 가능한 근로시간 설계, 장시간 근무 주가 연속되는 경우 보상 방안 등을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김대종 교수는 “(개편안에 대한) 극심한 반발은 현재 연장근로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고 있고, 그 결과 ‘한 달 휴가’ 같은 보상책이 비현실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라며 “장시간 근로에 대한 정부의 엄격한 관리가 필요하다. 법·제도를 정비해 연장근로에 대한 기업의 적절한 보상을 보장하고, 근로자가 확보한 휴가를 부당하게 쓰지 못할 경우 회사에 페널티를 부과해야 한다”고 했다. 김성희 교수는 “장시간 노동 체제에 익숙한 우리 기업들은 사람을 더 뽑아서 인건비가 더 투입되는 일을 두려워한다”며 “기업은 고용을 더 해야 하고, 사회는 인건비 증가 등 기업의 부담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논의해야 한다. 정부가 지원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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