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폭설같은 모스크바 첫눈과 함께 노골화한 북러 공조
(모스크바=연합뉴스) 최인영 특파원 = "이제 6개월간의 겨울이 시작됐군요."
지난 14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 사는 20대 여성 다리야 씨가 창문을 바라보다가 내뱉은 말이다. 첫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0월 들어 모스크바의 하늘은 연일 회색빛이었다. 화창했던 여름이 끝나고 짧은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들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한국에서 첫눈은 소복소복 내리는 게 보통인데, 올해 모스크바의 첫눈은 마치 폭설처럼 쏟아졌다. 창밖의 건너편 건물이 하얀 눈발에 가려 잘 안 보일 정도였다.
첫눈으로 모스크바에 다시 겨울이 왔음을 체감한 그날 저녁, 러시아는 두 가지 발표를 잇달아 내놓았다.
먼저 러시아 외무부가 마리야 자하로바 대변인의 이름으로 내놓은 성명에서 북한의 남한 무인기 평양 침입 주장에 동조하며 "북한에 대한 주권 침해이자 내정간섭"이라고 한국 정부를 비판했다.
이어 러시아 하원(국가두마) 입법 사이트에는 '러시아와 북한의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 비준안'이 등록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6월 19일 북한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어느 한쪽이 무력 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면 다른 한쪽이 유엔헌장 제51조와 북한 및 러시아법에 준해 지체 없이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조항을 포함한다.
북한의 남한 무인기 도발 주장과 남북 연결도로 폭파로 한반도 긴장이 높아진 상황에서 러시아는 북한을 두둔하는 동시에 북러 관계를 군사동맹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조약의 비준 절차를 시작한 것이다.
지난 여름(6월)에만 해도 푸틴 대통령은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하지 않아 대단히 감사하다"며 이례적으로 한국에 유화적 태도를 보였으나 겨울에 접어들면서 한러관계 회복을 기대하기 어색한 상황이 만들어진 셈이다.
한러관계가 냉각된 사이 북러관계가 훈풍을 타고 있는 것은 공항만 가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이 서방의 대러 제재 합류로 '비우호국'이 된 이후 한국인이 러시아 입국 심사를 받다가 2시간씩 억류되는 사례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북한인 무리가 환한 얼굴로 출국 수속을 밟고 쇼핑도 하더라는 목격담이 들려오는 것과 대비된다.
러시아 하원은 다음 달 중순 안에 이 비준안을 처리할 예정이다. 뱌체슬라프 볼로딘 하원의장은 비준안을 지지한다고 선언해 비준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하원 비준과 상원 비준을 거쳐 푸틴 대통령이 비준서에 서명하면 러시아 내 비준 절차가 끝난다. 이후 북러가 비준서를 교환하면 이 조약은 '무기한'으로 효력을 갖게 된다.
북러는 지난해 9월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과 지난 6월 푸틴 대통령의 북한 답방으로 약 9개월 내 두 차례 정상회담을 하며 밀착을 과시했다. 이후 북러는 군사는 물론 문화, 스포츠, 보건, 관광 등 전 분야 협력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이는 전주곡에 불과할 수도 있다. 조약이 비준 절차를 마치고 발효되면 북러 공조가 본격적으로 노골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연일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를 제공할 뿐 아니라 병력도 파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는 북한군 파병설이 허위 정보라며 일축하고 있다. 다만 모스크바 시내 곳곳에 입대자에게 첫해 520만루블(약 7천400만원)을 준다는 광고가 내걸린 것을 보면 우크라이나 전장에 투입될 러시아군 병력이 넉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북한군 파병 가능성에 주목하는 가운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서방에 핵 위협도 가하고 있다.
폭설처럼 내리며 긴 겨울의 시작을 알린 첫눈이 올겨울 한러·북러 관계를 비롯한 국제 정세에 몰아칠 수 있는 폭풍을 예고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던 이유다.
abb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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