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때가 어딨나, 마흔여섯에 대학 들어간 50억 사장님의 인생 ‘타이밍’
우림테크 이삼연 대표
‘공부에는 다 때가 있다’는 말이 있다. 어른들이 공부를 멀리하거나 어리광을 피우는 아이들에게 흔히 하는 말이다. 잔소리처럼 들리는 이 말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적당한 때를 놓친 자의 회한이랄까.
우림테크 이삼연 대표(66)는 불혹을 넘겨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 금속표면처리 분야에서 27년간 경력을 쌓은 뒤 학교로 돌아갔다. 2006년 한국폴리텍대학 창원캠퍼스를 졸업하며 학업의 꿈을 이뤘다. 이 대표를 만나 배움이란 갈증을 해소한 과정을 들었다.
◇영업부장의 퇴사 사유
경상남도 창원시 진전면에서 나고 자랐다. “삼 형제 중 막내였어요. 막내라도 집안 사정은 눈치껏 다 알고 있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우니 기술을 배워 빨리 돈을 벌고 싶다는 마음에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죠.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가세는 더욱 기울었어요. 그 시절엔 다들 어려웠습니다.”
1977년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자마자 삼우금속공업 영업부에 입사했다. 삼우금속공업은 방위산업체로 금속표면처리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다. “첫 월급으로 3만2000원을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병역 특례를 받으면서 군 생활을 겸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병역 특례는 대기 2년, 실 특례 5년에 묵시적 의무 근무 기간까지 더하면 약 10년 이상 근무를 해야 했죠.”
이론을 익힐 새 없이 실전에서 뛰었다. “금속으로 만드는 건 뭐든 표면처리과정이 필요합니다. 공기 중 산소와 만나면 부식되기 때문이죠. 내식성, 내마모성을 높일 수 있게 아연·망간 등으로 한 겹 씌우는 겁니다. 이런 가공 과정이 21개 라인에 걸쳐서 이뤄졌어요. 영업부 소속이었지만 생산 현장, 기술 등 모든 분야에 일손이 필요할 때마다 달려갔습니다.”
22년간 한 회사에서 경력을 쌓으며 영업부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마음 한편엔 늘 학업에 대한 갈증이 있었습니다. 상사에게 ‘야간대에 다니고 싶다’고 얘기해 봤지만 씨알도 안 먹혔죠. 퇴사를 마음먹었습니다. 지금껏 배운 기술로 내 사업체를 꾸려보기로 결심했어요. 그간 바라왔던 대학 진학의 꿈도 실현시키기 위해서였죠.”
◇홀로서기, 그 후
1999년 퇴직금 5000만원으로 100평짜리 임대 공장을 얻었다. 가깝게 지냈던 동료 5명을 모아 삼보산업(현 우림테크)을 설립했다. “1톤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직접 수주·생산·납품했습니다. 첫 해 매출은 7000만원 정도였어요. 그때의 목표는 ‘5년 안에 내 공장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말처럼 딱 5년이 되던 해에 지금의 800평짜리 부지에 터를 잡았다. “이제 정말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했어요. 일과 병행할 수 있으면서도 일에 도움이 될 만한 대학을 찾아봤습니다. 이 근방에서 기술 배우려면 창원기능대학(현 한국폴리텍대학 창원캠퍼스)으로 가는 게 정석이었습니다. 곧장 창원기능대학 기능장과정 지원서를 제출했죠.”
만 46세의 나이에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 “오후 5시 30분에 퇴근하면 바로 학교로 달려가 6시부터 수업을 들었습니다. 짧게는 2시간, 길게는 4시간 동안 이어졌죠. 20년 넘게 현직에서 일했는데도, 재료·기계의 기초 이론부터 다시 배우는 게 어찌나 재미있던지요. 현장에서 배웠던 것들을 퍼즐 조각처럼 맞춰가며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열정만큼은 20대 못지않았다. “몇 살 더 먹었다고 한발 물러서긴 싫었습니다. 기능장과정 총학생회 회장 선거에 출마해 근소한 표 차이로 당선되기도 했고요. 교내 최고경영자과정(CEO 과정)도 추가로 수료했습니다. CEO과정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학기마다 새로운 기수를 모집하는 1년짜리 과정인데요. 선후배 기수가 6개월씩 겹쳐서 생활하기 때문에 네트워크를 크게 넓힐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2015년 교수 권유로 총동문회 회장직을 맡았다. “총동문회가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모여 뒷짐 지고 있는 모임이 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젊은 피를 수혈해야 했어요. 인근 지역의 대기업·중견기업에서 과장·차장으로 일하고 있는 졸업생들에게 연락해 집행부로 활동해달라고 부탁했죠. 집행부를 꾸린 다음 매주 목요일 저녁에 모여 회의했어요. 재학생과 졸업생이 모두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죠.”
정기적으로 학교를 찾아가 재학생을 만났다. “밥 한 끼 사주면서 학생들의 고충을 듣거나 진로 상담을 해 줬습니다. 아예 버스를 대절해 재학생과 졸업생이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어요. 재학생들이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단연 ‘취업’입니다. 현직에서 일하고 있는 졸업생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크게 와 닿았다고 하더군요.”
같은 시기 우림테크는 내리막을 걸었다. “큰 거래처였던 한 조선사가 폐업 위기로 계약 물량을 취소하면서 도미노처럼 관련 기업들도 타격을 받았어요. 당시 손실이 약 13억원이었습니다. 전기요금도 못 내서 독촉을 받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한국전력공사에 찾아가서 ‘공장이 돌아가야 연체료라도 낼 수 있으니 전기만은 끊지 말아달라’고 사정할 때, 스스로가 참 처량하기 그지없었죠.”
◇뻔하지 않은 결말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2023년 우림테크는 매출 42억원을 기록했다. “선박, 자동차 외에 방위산업 분야에도 힘을 쏟고 있어요. 올해는 매출 5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직원도 작년보다 10명이 늘어서 40명이 됐습니다. 먹여 살릴 식구가 많아졌으니 더 힘을 내야죠.”
직원 중엔 후배도 3명 있다. “아무래도 입사지원서에 ‘한국폴리텍대학 창원캠퍼스’라고 하면 눈길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후배라고 더 후한 점수를 주려는 게 아닙니다. 주변에 사업체를 운영하는 다른 대표들을 만나서 얘길 들어 봐도, 우리 학교 출신 학생들이 믿음직스럽게 일한다고 소문이 자자하죠. 이런 입소문이 취업률을 견인하는 게 아닐까 해요. 선배로서 뿌듯합니다.”
젊은 직원들에게 최대한 조언을 자제하려 애쓴다. “뻔해 보이는 말들이 뻔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공부에 때가 있다’는 말도 제겐 하나의 장애물이었습니다. 마흔 넘은 나이에 아들뻘 동기들과 대학교를 다니며 공부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죠. 공부도 취업도 결혼도 ‘적당한 때’라는 건 없다고 생각해요. 그저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면 그뿐입니다.”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