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 한 표가 아쉬운데… “지지 후보 없음” 유권자 끝내 외면

정인환 기자 2024. 10. 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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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이스라엘 무기 지원 중단’ 요구에 끝까지 침묵… 청년·진보적 유권자층 지지 대신 거리두기
미국 풀뿌리 평화단체 연대체인 ‘언커미티드전국운동’(UCNM) 소속 활동가들이 2024년 8월22일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린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전쟁과 이스라엘 무기 지원 중단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REUTERS

미국 대선이 막판까지 초접전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사퇴 뒤 날개를 달았던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지지율 반등세는 주춤해졌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20년 대선 때 바이든 대통령이 승리했던 격전지에서 우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민주당의 핵심 지지기반인 청년층과 진보적 유권자층이 해리스 부통령과 ‘거리 두기’에 나섰다.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의 참극이 미국 대선 판도를 뒤흔들 기세다.

‘증오범죄’ 청문회가 ‘증오 발언’ 무대로

“불의는 어디서 발생하든 세상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 1963년 4월16일 미국 앨라배마주 버밍햄의 구치소에 수감된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는 동료 성직자들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2024년 9월17일 미 상원 법사위원회가 킹 목사의 글을 따 “세상 모든 곳의 정의에 대한 위협”이란 부제를 붙인 청문회를 열었다. 2023년 10월7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이후 미국에서 급증하고 있는 ‘증오범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아랍계와 유대계 미국인을 겨냥한 증오범죄 발생 현황과 대처 방안에 청문회의 초점이 모아질 것으로 예상됐지만,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증인은 하마스를 지지하시죠, 그렇죠?” 공화당 존 케네디 상원의원(루이지애나주)은 마야 베리 아랍계미국인협회(AAI) 사무총장에게 이렇게 물었다. 베리 총장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방금 질문에 대해 의원님께 감사하고 싶다. 오늘 청문회의 목적을 대단히 효과적인 방식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케네디 의원은 다시 물었다. “하마스 지지하잖아요, 그렇죠?” 베리 총장은 “하마스는 외국 테러조직이며, 저는 하마스를 지지하지 않는다. 의원님께서 아랍계미국인협회 사무총장에게 그런 식의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미국에서 (무슬림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답했다. 청중이 박수를 쳤다.

“증인은 헤즈볼라도 지지하시죠?” 케네디 의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베리 총장은 “그런 식의 질문은 대단히 실망스럽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드린다”고 답했다. 케네디 의원은 “그건 ‘예’란 뜻인가요, ‘아니요’란 뜻인가요?”라고 되물었다. 베리 총장은 “헤즈볼라든 하마스든 다른 어떤 조직이든 폭력을 부추기는 세력은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니 제 답은 ‘아니요’다”라고 말했다. 케네디 의원은 “그냥 간단하게 ‘아니요’라고 답하진 못하시겠죠, 그렇죠?”라고 말했다. 이어 “증인은 차라리 머리에 가방이라도 뒤집어쓰는 게 낫겠다”며 질의를 마쳤다. 청중과 동료 의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리처드 더빈 법사위원장(민주당·일리노이주)이 베리 총장에게 마무리 발언권을 줬다.

“오늘 청문회에서 해결하고자 했던 바로 그 문제를 여기 증인석에 앉아 직접 경험하게 됐다는 점이 대단히 유감스럽다. 매우 안타깝고도 실망스러운 경험이다. 우리가 기대 살아가고 있는 민주적 제도가 위험에 직면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반무슬림, 친이스라엘’에 해리스 침묵

청문회 직후 인권단체들이 앞다퉈 비판 성명을 내놨다. 미국 최대 무슬림 인권단체인 ‘미국-이슬람관계위원회’(CAIR)는 “케네디 의원의 발언은 아랍, 팔레스타인, 무슬림계 미국인이 맞닥뜨린 편견과 증오를 상징한다”며, 그에 대한 징계를 상원에 촉구했다. 세일라 카츠 미국유대계여성위원회(NCJW) 사무총장은 소셜미디어 ‘엑스’에 올린 글에서 “상원이 청문회에서 증오범죄에 맞서기는커녕 오히려 증오범죄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케네디 의원의 질의는 ‘돌출 행동’이 아니다. 상원 법사위 공화당 간사인 린지 그레이엄 의원은 애초부터 증오범죄 청문회의 주제를 ‘반유대주의’ 문제로 국한시키려 했다. 앞서 2024년 5월 공화당 주도로 열린 하원 청문회에선 대학가를 휩쓴 반전 시위를 두고 ‘반유대주의 사태’로 규정한 바 있다.

‘반무슬림, 친이스라엘’은 트럼프식 갈라치기의 단골 메뉴다. ‘이스라엘의 수호자’를 자처해온 트럼프 전 대통령은 9월5일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유대계 후원자 모임에 참석해 “해리스 부통령이 당선되면 이스라엘은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어떤 입장일까? 그는 9월10일 열린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경력과 인생을 통틀어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국민을 지지해왔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방어할 권리가 있고, 이란과 그 대리 세력이 가하는 위협에 맞서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역량을 언제나 지원할 것이다. (…) 지속적인 분쟁으로 무고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너무 많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을 즉시 끝내고 인질들을 석방하기 위해서는 휴전 협상이 필요하다.”

가자지구 전쟁 초기부터 바이든 행정부가 고수해온 입장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앞서 2024년 2월 민주당 대선 후보 당내 경선 때 바이든 대통령의 일방적 이스라엘 지원을 비판하며 ‘지지 후보 없음’(언커미티드)에 표를 던진 유권자가 미시간·미네소타·노스캐롤라이나 등지에서 10%를 넘어선 바 있다.(제1504호 참조) 해리스 부통령으로 후보가 교체된 뒤 기대감을 내비쳤던 이들은 8월 민주당 전당대회 행사장에 입장조차 하지 못했다. 풀뿌리 평화단체 연대체인 ‘언커미티드전국운동’(UCNM) 쪽은 해리스 부통령에게 9월15일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살상용 무기 지원 중단을 선언해달라고 요구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끝내 침묵했다. UCNM은 9월19일 기자회견을 열어 “해리스 부통령 지지선언을 할 수 없게 됐다”고 발표했다.

격전지 여론조사, 트럼프가 앞서

시엔엔(CNN) 방송이 9월24일 발표한 전국 단위 여론조사 결과, 해리스 부통령(48%)은 트럼프 전 대통령(47%)을 단 1%포인트 앞섰다. 같은 날 퀴니피악대학이 발표한 여론조사에선 해리스 부통령(47%)이 트럼프 전 대통령(48%)에게 1%포인트 뒤졌다. 사실상 동률이다. 9월23일 뉴욕타임스가 시에나대학과 공동으로 실시해 발표한 격전지 3곳 여론조사 결과는 더 눈에 띈다. 2020년 대선 때 바이든 대통령이 1만여 표 차로 신승한 애리조나와 조지아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해리스 부통령을 각각 5%포인트와 4%포인트 앞섰다. 해리스 부통령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도 47% 대 49%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뒤졌다. 한 표가 승부를 가른다. 침묵은 사치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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