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법정에서 유독 통화 녹음 증거가 많은 까닭 [세상에 이런 법이]
사람들은 재판 결과가 실체적 사실에 부합할수록 정의에 가까운 판결이라 생각한다. A라는 사실에 대해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다는 법리적 판결은 수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A가 아니라 B가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A라는 전제하에 판결이 이루어진다면 속된 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이런 일이 생각보다 흔하다. 그 이유는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민사소송법은 재판의 청구인, 즉 원고가 본인의 주장에 대해 ‘입증책임’을 지게 한다. 가령 빌려준 돈을 돌려받기 위해 소송을 청구하는 사람은 “돈을 빌려주었다”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원고가 증거를 제출해야 한다. 재판부는 정황이나 심증보다는 객관적인 물증을 최우선 증거로 놓고 판단한다. ‘차용증’과 같은 처분문서가 없다면 승소하기가 어렵다. 수임료가 비싼 변호사를 선임해도 증거 없는 재판은 이길 수 없다.
소송이나 고소를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면, 그때부터 당사자가 할 일이 많다. 소송 상대방이 아니라 변호사와 ‘증거 씨름’을 해야 한다. 변호사는 시도 때도 없이 증거를 달라고 요구한다. 수년 전 작성된 계약서, 사진, 통화 기록, 메시지 수발신 내용, 음성 녹음 등을 뒤져야 하고, 찾아내야 한다. 변호사는 끊임없이 “증거가 없으면 소송은 진다”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 정도에 이르면 당사자들은 대체 변호사는 뭐 하는 사람이냐고 항의한다.
변호사도 할 수 없는 게 있다. 드라마처럼 증거를 척척 찾아내는 수완 좋은 사무원도 없을뿐더러, 그런 행위들은 대부분 불법이다. 불법 수집 증거는 재판에 제출되어도 증거로서 인정받을 수 없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분명히 ‘계약서’를 쓰고 나눠 가졌는데 이사하면서 분실했다. 상대방이 해당 계약서를 갖고 있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상대방이 계약서를 재판부에 제출해줄 리는 없다. 물론 법원을 통해 문서제출신청(민사소송법 제345조)을 할 수 있다. 상대방이 해당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하면 신청인은 ‘상대방이 그 문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증명해야 한다. 계약을 한 적도, 계약서를 작성한 적도 없다고 부인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계약서가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까.
몇 번 공방이 오가고 여러 차례 기일이 진행되며 시간 끌기가 이어지다 보면 재판부가 문서제출신청을 취하하라고 권하기도 한다. 오리발 앞에 법원의 강제력은 미흡하고, 뻔뻔한 사람이 이기는 재판이 되어버린다.
그래서일까. 한국 법정에는 유독 통화 녹음과 녹취록 증거가 난무한다. 신뢰가 없는 사회라는 지적을 떠나, 법원의 문서제출명령이 유명무실한 현재 제도 속에서 그런 궁리라도 하지 못한다고 패소하기 십상이다.

미국은 어떻게 ‘끝까지’ 가지 않고 화해로 끝내나
법조계에서는 미국식 디스커버리 제도(증거 개시 절차)와 유사한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 필요성에 대한 검토가 활발하다. 미국은 디스커버리 제도를 통해 재판 시작 전 양측이 가진 증거를 의무적으로 상호 공개한다. 설사 내가 갖고 있는 증거가 없다고 해도 상대방의 이메일, 메신저, 계약서 등의 내부 자료에 대한 증거 제출 요구를 할 수 있으며, 재판 전에 관련자 심문을 통해 증거를 충분히 확보하여 재판 전략을 짤 수 있다.
미국식 디스커버리 제도의 핵심은 강력한 제재에 있다. 공개 대상인 증거를 은닉하거나 파기할 때 ‘증거인멸에 따른 불이익 추정’을 받으며 막대한 벌금이 내려지거나 형사처벌을 받기도 한다. 심지어 이로 인해 패소하기도 한다. 애초에 카드를 숨기는 것을 전략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카드를 놓고 협상하는 절차와 유사하다. 그래서 미국 소송은 실제 재판 전에 화해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미국 법정 드라마의 상당수 내용이 재판보다는 변호사들의 증거 개시와 화해 절차로 마무리되는 것 또한 이러한 문화 때문일 테다.
이렇게 양측의 증거가 모두 재판부에 현출될 수 있다 보니 아무래도 사실관계가 왜곡될 가능성이 낮아진다. 원고와 피고의 증거가 개시되면서 사실관계는 실체적 진실에 부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재판 자체가 공정한 틀에서 진행될 수도 있다. 개인이 거대 기업을 대상으로 소를 제기했을 때에도 디스커버리 제도를 통해 기업이 갖고 있는 내부 자료를 나를 위한 증거로 활용할 수 있다. 현재 소송상 비일비재한 증거의 비대칭 문제를 해결하고, 실제적 진실과 정의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재판 결과에 대한 수용이나 승복 가능성 또한 더 높아지고 사법부 신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사법부는 거수기가 아니다. 승패는 재판과 소송의 결과이나 그 과정과 내용은 정의에 부합하고 공정해야 한다. 디스커버리 제도를 통해 양 당사자에게 공정한 무기가 제공된다면 진실 앞에 정의를 세우는 일은 좀 더 쉬워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권혜진 (변호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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