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달 수 없는 ‘47번’ 시즌 중에 뺏길 뻔했다

조회수 2023. 11. 13.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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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4차전 승리투수 김윤식의 등번호 이야기

작년 이맘때다. 트윈스가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다. 분위기가 좋을 리 없다. 그 무렵이다. 구단 사무실에 자주 들락거리는 투수가 있었다. 김윤식(23)이었다. 목적지는 단장실이다. 뭔가 청이 있어서다.

김윤식 “단장님, 47번 저한테 주세요.”

차명석 “너, 47번이 의미하는 걸 알아? 누가 달던 번호인 줄도 알고?”

김윤식 “그럼요. 압니다.”

차명석 “그런데 그런 말을 해? 아냐, 아니다. 내가 볼 때 너는 아직 아니다. 내가 아는 47번에 어울리려면 지금보다 훨씬 잘해야 한다.”

김윤식 “물론입니다. 내년에는 그 번호에 맞는 활약을 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차명석 “너 이상훈 선배한테 허락은 받았니?”

김윤식 “그럼요, 말씀드렸습니다. 47번 달고 씩씩하게 잘 던지라고 하시더라구요.”

그 번호를 오매불망한 이유가 있다. 투수를 시작한 게 진흥고 2학년 때다. 그때부터 유명한 선수들의 영상을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양현종, 김광현도 찾아봤다. 하지만 가장 감명 깊게 본 것이 야생마의 투구였다.

그리고 3학년 때 처음 47번을 달았다. 캐리어 자물쇠 비밀번호도 047로 바꿨다. LG에 입단해서는 차마 말을 못했다. ‘신인 주제에’라는 자격지심 탓이다. 대신 10을 더한 57번을 택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후반기에 우연한 자리에서 등번호의 본래 주인을 만났다. “선배님 번호를 제가 달게 해주십시요.” 갑작스러운 청에도 흔쾌히 허락해 줬다.

2016년 이상훈 코치의 시구 모습

2002년 가을의 쓰린 기억

사실 야생마가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것은 7시즌에 불과하다. 그러나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94년(18승 8패)과 1995년(20승 5패) 2년 연속 다승왕을 차지했다(1994년은 조계현과 공동 수상). 1997년 마무리로 전향해서는 47세이브포인트(1997년, 10승 37세이브)를 올렸다. 당시까지 최고 기록이다.

특히 입단 2년 차인 1994년에 맞은 한국시리즈가 눈부시다. 그 해 1선발로 활약하며 18승을 올린 시즌이다. 거친 질주는 가을에도 멈추지 않았다. 1차전을 맡아 6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7회 1점을 주고 동점을 허용했지만, 11회 말 끝내기 홈런(김선진)으로 승리하는데 확실한 디딤돌이 됐다.

최종전인 4차전도 그의 몫이었다. 역시 선발로 나서서 7회까지 3-2의 우세를 지켰다. 덕분에 우승 결정전의 승리투수라는 영예를 안았다. 트윈스가 마지막으로 챔피언 반지를 얻은 순간이었다.

반면 아픈 기억도 또렷하다. 2002년 한국시리즈(삼성전) 때였다. 막판에 몰린 트윈스는 6차전에서 분발했다. 맹렬한 타격을 터트리며 9-6의 우세를 잡았다. 이제 9회 말만 막으면 (3승 3패) 7차전으로 갈 수 있다.

마무리는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이미 이틀 내리 등판했고, 또 나가면 3연투가 되는 것이었다. 양상문 투수코치가 “괜찮겠냐”고 물었다. 이때 그의 대답이 유명하다. “코치님, 나갈 수 있겠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냥 나가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언제든지 던질 준비가 돼 있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1사 1, 2루에서 이승엽에게 3점 홈런을 맞고 동점을 허용한 것이다(이승엽은 이전까지 20타수 2안타의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 결국 강판당하고, 다음에 올라온 최원호가 마해영에게 끝내기 홈런을 허용했다.

SBS 중계화면 캡처

“저주받은 번호는 내가 달겠다”

어떤 트윈스 팬들은 47번에 대해 불편한 기억을 가졌다. 심지어 ‘저주’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도 한다. 비단 2002년 한국시리즈 때문만이 아니다.

처음 그 번호를 단 것은 김정수라는 외야수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의 우승 멤버였다. 이후 프로에 들어와 잘 안 풀렸다. 2년 뒤에는 타자를 포기하고, 투수 전향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이다.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몇 년 뒤에는 김성준(1990년), 김진명(1991년) 등이 그 번호를 달았다. 하지만 짧은 프로 경력을 남긴 채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후로도 순탄치 않았다. 다음 주자는 봉중근(2007년)이다. 구단은 큰 기대를 받고 입단한 그에게 아껴놨던 번호를 줬다. 그러나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6승 7패). 팬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결국 그는 2009년부터 자기가 좋아했던 이치로와 켄 그리피 주니어의 51번으로 바꿔 달았다.

차기 47번의 주인은 이형종이 됐다. 그 역시 팔꿈치 부상과 팀 내 불화로 인해 임의탈퇴라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다음 주자 서승화도 비슷했다. 몇 차례 구설수를 겪더니, 트윈스와 짧은 인연을 끝내고 말았다.

야생마가 다시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시기가 있다. 2016년 피칭 아카데미 초대 원장이라는 직함이었다. 그때 그는 “47번이 저주받은 번호처럼 여겨진다. 차라리 내가 다는 게 낫겠다. 그럼 저주도 없어질 것”이라며 자신의 번호를 3년간 등에 새겼다.

21년 만의 KS 선발승을 만들어 낸 ‘47번’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11일 수원 KT 위즈파크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4차전이다. 47번을 단 좌완투수가 눈부신 피칭을 선보였다. 선발로 나가 5⅔이닝 3피안타 1볼넷 3탈삼진 1실점으로 막아냈다.

참 공교로운 일이다. 애덤 플럿코와 결별 이후 염경엽 감독이 가장 고심했던 캐스팅이 4차전 선발이었다. 그런데 막상 내놓고 보니 달랐다. 1~3선발보다 안정감 있는 게임 운영을 보여준 것이다.

팀의 이번 시리즈 첫 선발승임은 물론이다. 구단 역사를 따져도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LG 투수가 KS에서 선발승을 거둔 것은 무려 21년 만이다. 2002년 삼성과 2차전서 라벨로 만자니오가 기록한 뒤 처음이다.

지난 7월의 일이다. 팀이 큰 고민을 안고 있을 때다. 순위는 1등이지만, 늘 선발 때문에 허덕였다. 차명석 단장이 2군 훈련장을 찾았다. 부상으로 재활 중이던 김윤식과 마주쳤다. (농담이지만) 따끔하게 다그쳤다. “너, 뭐라고 그랬어? 잘할 수 있다며? 이럴 거면 47번 도로 내놔. 괜히 이상훈 선배님 이름에 누 끼치지 말고.”

그러자 화들짝 손을 젓는다. “아닙니다. 단장님. 후반기에는 꼭 잘 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약속은 지켜졌다.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순간에, 가장 멋지고 화려하게. 6회 마운드를 내려가는 47번을 향해 커다란 연호와 함께 뜨거운 갈채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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