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진명
사진 김윤경
[1] 여행의 시작, 와카야마시
와카야마시는 와카야마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교통의 중심지다. 와카야마역에서 기차를 타면 현 내의 유아사, 시라 하마, 고야산 등 주요 여행지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도심으로 들어 서면 현대식 건물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다. 시내 곳곳에는 운하가 흐르고, 주택과 상가가 테트리스처럼 촘촘히 자리한다. 고도 제한으로 도심 건축물의 높이가 낮은 덕분에 와카야마의 청명한 하늘이 어디서나 잘 보인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도시의 중심에는 1585년에 축조된 와카야마 성이 있다. 이 성은 에도 시대(1603~1868)에 걸출한 장군을 배출하며 군사적 요충지로 여겨졌다. 성 안의 일본식 정원은 세월의 흔적이 무색할 정도로 잘 보존되고 있다. 정원에는 2월 말부터 수선화가 피기 시작해 3월에는 벚꽃, 4월에는 모란꽃, 철쭉꽃이 피고, 6월 중순쯤엔 수국이 흐드러진다. 가을이 되면 온통 황금빛과 노란색, 빨간색 등으로 물든다고.
라멘 마니아의 성지
와카야마시에 왔다면, 와카야마 라멘을 꼭 맛봐야 한다. 츄카소바(中華そば)라고도 불리는 이 라멘은 돼지고기 육수와 와카야마산 간장이 진하게 어우러지는 국물이 특징이다. 고명으로 올리는 차슈(돼지고기)에도 지방과 속살이 적절히 붙어 있어야 한다. 겉에 살짝 바른 양념에서 느껴지는 감칠맛이 화룡점정. 국물을 충분히 머금는 면의 두께도 중요하다. 라멘 가게마다 각기 다른 특징이 있어, 취향에 맞는 라멘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한 가지 공통점도 있다. 어딜 가나 테이블에 고등어 절임 초밥이 놓여져 있다는 것. 라멘이 나오기 전에 초밥으로 속을 달래라는 의미다. 와카야마 라멘은 이데쇼텐(井出商店) 덕분에 더 유명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8년 일본 예능 프로그램 〈TV 참피온〉에서는 일본 전 지역에 있는 라멘 장인을 섭외해 요리 경연을 벌였는데, 이때 이데쇼텐의 와카야마 라멘이 2년 연속 (1998년, 1999년) 1위를 차지한 것. 우승을 한 지 20여 년이 훌쩍 지났지만, 이데쇼텐은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루며 그 맛을 지키고 있다. 기다리는 손님을 위해 주차장을 확장했을 뿐, 좌석은 단 14석. 40년 전 처음 가게를 오픈했을 때와 똑같다. 부엌에는 ‘수프맨(Soupman)’ 티셔츠를 입은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2] 마을 전체가 박물관, 유아사
유아사가 간장의 발상지라 불리는 이유는 간장을 발견한 승려가 정착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13세기, 한 승려가 송나라에서 긴잔지미소(金山寺 味噌) 양조법을 배워 왔다. 긴잔지미소란 콩과 쌀, 보리 등 곡물에 누룩과 소금을 더한 후 박, 가지, 생강, 자소 등 채소를 절여 숙성시킨 발효 식품. 긴잔지미소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우러나온 국물을 맛보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간장이었다. 이후 온 마을이 간장 양조를 시작했다. 120년 전에는 양조장이 92곳에 이르렀 다고 전한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신선한 수제 간장의 비밀
유아사의 거리에서 한 세기 전 간장을 이고 지고 바쁘게 걸어 다녔을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아직까지 마을에 남은 이들은 오래 전부터 해온 일을 계속하고 있다. 거리를 걷다 6대째 한자리를 지켜온 오타큐스케긴세(太田久助吟製)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원래 간장 양조장이었지만, 지금은 긴잔지미소를 만드는 곳. 도쿄와 같은 대도시의 이자카야에서는 긴잔지 미소를 고급 메뉴에 활용한다. 통밀 크래커 위에 크림치즈와 함께 얹어 먹는 안주로 등장하곤 하는데, 고소하면서도 새콤한 짠맛이 특징이다. 오타큐스케 긴세를 지키는 주인에게 주변의 양조장이 하나둘 사라지는 걸 보는 심정은 어떤지 물으니 “후계자를 찾는 것도 어렵고, 기술이 점점 발달하니 생산량을 따라가기가 힘들더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팬데믹 때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대신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다행히도 이곳은 사위가 역사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마을에는 사위가 가업을 잇는 양조장이 하나 더 있다. 유아사에서 유일하게 180여 년 전 선조의 방식을 따라 수제 간장을 생산하는 가도초(角長)다. 대부분의 간장이 대량 생산되는 오늘날에도 가도초는 첨가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수제 간장 양조를 고수한다.“간장 만드는 사람입니다.” 가도초의 6대 운영자인 가노 마코토(加納誠)가 서툰 한국어로 본인을 소개한다. 아들, 딸과 함께 양조장을 운영하는데, 자신은 패키지를 접고 손님을 응대하는 등 주로 매장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에도 시대부터 사용했다는 창고 안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나무통 안에 4년 이상 숙성 중인 까만 간장이 가득 담겨 있다. 온도와 습도의 미묘한 변화가 간장의 맛을 결정하기 때문에 긴 막대기로 나무통 안 내용물을 자주 섞어주며 맛을 유지한다고. 이런 제조 방식이야말로 기계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가도초만의 재산일 테다.
[3] 평양의 경이로운 일몰, 시라하마초
시라하마는 바닷가 온천과 해안 풍경 그리고 일몰로 유명한 도시다. 와카야마역에서 시라하마까지는 JR구로시오 특급 열차를 타고 1시간 30분이 걸린다. 유명한 시라하마의 일몰을 보려면, 바위섬 엔게츠도(円月島)로 향할 것. 바위 중간에 해식 동굴이 동그랗게 뚫려 있어 ‘엔게츠(円月, 보름달)’라 불리는데, 동굴 사이로 해가 떨어지는 절경을 포착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곳이다. 시라하마를 둘러싼 바다의 거센 파도는 바위섬을 비롯해 1,000장의 다다미가 깔려있는 것 같아 센조지키(千畳敷)라 불리는 암반과 썰물이 절벽에 부딪혀 형성된 주상절리 암벽 산단베키(三段壁)를 만들었다.
벚꽃 이전에 매화가 있었다
시라하마에서 차를 타고 30분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면, 타나베시(田辺市)라는 소도시가 나온다. 전국 최대의 매실 생산지인 와카야마현에서도 매실 생산량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타나베의 매화는 이르면 1월 말부터 싹이 트고 마을 사람들은 꽃놀이를 시작한다.
흐드러지게 핀 매실나무를 보고 싶다면, 미나베바이린(南部梅林)으로 향해보자. 약 8만 그루의 매실나무가 완만한 산의 사면 전체를 빽빽하게 채운 매화 산지다. 이 지역 사람들은 400년 전부터 매실 농사를 지어왔다. 비탈진 언덕에 심은 매실나무는 햇빛을 고루 받기 때문에 잘 자라고, 근처 바다에서 불어온 소금기 있는 바람은 열매를 더욱 맛있게 만든다. 타나베에서 나고 자란 많은 이들은 선조들의 지혜와 노력으로 일군 매실 관련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재배부터 생산·가공· 제품 개발까지 아우르는 매실 전문 기업 하마다(濱田)도 그중 하나. 과수원의 면적은 24헥타르 정도. 일반 야구장 18개를 합친 규모를 자랑한다.
[4] 일본인의 영적인 고향, 구마노
풍부한 자연 유산을 품고 있는 구마노. 예로부터 일본인은 이곳을 자연과 인간의 정신세계가 교차하는 곳으로 여겨왔다. 구마노의 성지 중 구마노 혼구타이샤(熊野本宮大社), 구마노 하야타마타이샤(熊野速玉大社), 구마노 나치타이샤(熊野那智大社) 3곳을 '구마노산잔(熊野三山)'이라고 한다. 와카야마역에서 각 성지까지 기차와 버스로 연결된다.
세 신사로 가는 순례길을 일컬어 구마노고도(熊野古道)라고 하는데, 그중 300여 킬로미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돼 있다. 구마노고도를 걷다 보면, 다리가 3개인 까마귀가 새겨진 휘장을 자주 발견한다. 이 길 위에서 만나는 까마귀는 반가워해도 좋다. 야타가라쓰(八咫烏)라 부르는 이 까마귀를 참배의 안내자로 여기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야타가라쓰는 승리를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다(일본 축구 국가대표 유니폼에도 야타가라쓰가 그려져 있다).
세 곳의 신사 중 구마노 나치타이샤는 나치산(那智山) 해발 500미터에 자리하며, 별궁에 있는 히로 신사(飛瀧神社)에서는 일본 최대 낙차 폭포 나치노오타키(那智の大滝)를 자연신으로 모신다. 악의 기운을 쫓아내기 위해 주황색을 칠한 탑과 133미터 높이의 폭포가 어우러진 풍경으로 유명하다.
참치로 지역과 사람을 잇는 바닷마을
구마노 나치타이샤에서 남단으로 내려가면 아담한 항구 마을 나치가츠우라초(那智勝浦町)에 당도한다. 항구 한쪽에 마련된 야외 족욕탕과 작은 상점이 어우러진 소박한 풍경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이 마을에는 ‘동굴 온천’으로 잘 알려진 호텔 우라시마(ホテル浦島)가 있다. 태평양에서 시작된 파도에 침식되어 생긴 동굴에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마을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큰 규모의 참치 어항 때문. 매일 아침 7시면 가츠우라항(勝浦漁港)에서 열리는 참치 경매의 풍경을 볼 수 있다. 항구 바로 옆 니기와이 시장(にぎわい市場)에서는 생참치부터 가공 식품까지 지역에서 잡아 올린 참치의 모든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이 마을에서 낚은 가장 큰 참치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대형 참치 모형이 시선을 압도한다.
시장 가장 안쪽에는 야마사 와키구치수산(ヤマサ 口水産, maguro-yamasa.com)이 있다. 참치는 크기에 따라 참치살의 끈기와 경도가 다르기 때문에 자르는 방법도 달라진다. 여기서 상품 가치가 결정되는 것. 그래서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야마사 와키구치수산은 가츠우라항에서 잡은 참치를 일본 전역에서 맛있게 즐길 수 있도록 좋은 참치를 판별하고 참치 포장·가공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한 참치 가공 회사로, 2023년 130주년을 맞았다.
참치에 모든 생을 바쳐온 야마사 와키구치수산 대표 와키구치 코타로( 口光太郎)는 여전히 직접 참치를 해체한다. 30년 전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직원은 사촌 고모를 포함해 단 6명뿐이었다. 지금은 50여 명을 거느리는 어엿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가 “도쿄 어느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우리 지역의 참치를 고가에 판매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며 참치를 접시 위에 놓은 뒤 뒤집는다. 품질 좋은 참치는 떡처럼 딱 달라붙어 있다. “우리는 이 참치를 ‘모찌마구로(もちマグロ)’라고 부릅니다.” 접시를 들고 있는 손 끝에서부터 지역과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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