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다단계에 숨은 오판과 허영...남 일이 아니다[박찬희의 경영전략]
[경영전략]
제법 오래전 경영학이 ‘잡학(雜學)’이라며 무시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취직자리 바라보고 경영학과를 찾는 것보다 나름대로 기개가 있던 시절의 일인데 ‘인간을 위한 경영’이라는 과 티셔츠 문구에 인간을 더 교묘하게 등치는 짓이란 비아냥도 있었다.
유학 시절 MBA 과정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교과서 주요 개념을 외워대는 인사조직 과정을 ‘권력과 영향력’에 대한 토론으로 뜯어고친 과목에서 첫 시간에 다단계 화장품 판매회사의 대형 행사를 놓고 날카로운 논쟁이 펼쳐졌다.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들이 다단계 판매로 업적을 내서 보상받고 화려한 행사장에서 박수 속에 펑펑 울면서 캐딜락을 상으로 받는 장면을 놓고 이들에게 보상과 인정의 기회를 준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욕망을 자극해서 이용했을 뿐인지 치열한 토론이 있었다.
덧없는 전쟁에 조국에 대한 헌신이라 믿고 몸을 내던진 젊은이들과 무엇이 다르냐는 얘기가 나오면서 결국 토론은 추구하는 목적과 가치가 핵심이라는 쪽으로 흘러갔는데 변호사 경력을 가진 수강생은 안 되는 사업을 된다고 속이면 사기가 된다는 현실적 답을 제시했다(그 법은 공동체가 합의해서 만드는 것이고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서 보답하는 일이 여러분의 몫이라는 교수의 한마디도 있었다).
사실 이 토론은 경영학 공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인데 월스트리트 배경의 학생들이 유난히 ‘인간’을 강조하는 말들에 까칠한 것은 요즘도 비슷하다. 마음의 빈틈을 파고드는 유혹이 허영심을 자극하고 그릇된 판단으로 이어지는 일은 최고경영자(CEO) 수준에서도 자주 벌어진다. 무책임하게 사람의 마음을 등치는 경영자는 천벌 받아 마땅하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자.
안 되는 일에 거짓으로 유인
돈을 벌 가능성이 없는데 마치 돈이 될 것처럼 거짓으로 끌어들이면 불법이다. 비용 배분, 수당 조건, 가격구조 등에 따라 ‘우리는 다르다’고 하지만 2~3단계만 거치면 온 나라 사람을 다 알게 되는 현실에서 무작정 참여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과장해서 끌어들이면 사기와 다를 바 없다. 가입비를 받고 비싸고 생소한 제품으로 유인하면 더욱 그렇다.
어렵게 번 돈이니 막상 물량 인수해서 나서려면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선 유통단계의 폭리를 없애서 함께 나눈다는 제법 설득력 있는 주장이 와닿고 이는 ‘내가 유통사업자가 됐다’는 자긍심으로 이어진다. 초기 참가자들의 성공담은 네트워크 확장의 핵심 자본이 된다. 일찍 참가해야 더 유리한 지위에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도 더해진다.
초기 참가자가 일정 규모에 이르면 공격적 광고와 홍보가 가능해진다. ‘우리만의 비밀’이 ‘더 널리 나눌 기쁨’이 된다. 이제 고금리로 돈을 유치해서 자본을 키우고 이 돈으로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폰지사기’의 기법이 등장한다.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동료로 등장하고 이들의 성공담이 혹시 잘못된 일에 끼었나 하는 걱정을 잊게 만든다. 전직 고위인사나 경영자가 그들의 가족과 함께 등장하고 유명 연예인의 증언이 더해진다.
다단계판매의 구조는 더 높은 단계로 가야 확실한 보상이 가능하다. 무리를 해서라도 실적을 올리면 미래 이익 전망이 흔들려도 사정이 낫다. 그래서 자기거래로 매출실적을 올리고 돈이 부족하면 급전을 쓰거나 카드 결제를 한다. 지역 본부들 사이의 경쟁에 보상을 내걸면 서로 이익이 얽힌 공동운명체가 돼 무리한 경쟁을 한다.
돈이 안 되는 일을 무한정 끌고 갈 수는 없다. 어느 순간 다단계 본사는 온라인 등 다른 경로로 유사품을 풀기 시작하고 해외 동반 진출 등의 새로운 기회를 제시한다. 물론 제법 호화로운 여행 일정과 그럴듯한 면담으로 자신감을 불어 넣는다.
피해자가 나오기 시작하고 인터넷과 유튜브에 고발이 이어지지만 따라오지 못한 패자들의 푸념으로 매도하면 되고 가입과 매입이 이어지는 한 버틸 수 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도 적어도 손실은 줄여야 하는 현실적 유인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인정과 소속감의 유혹
불법 다단계 사건에 대한 판례를 보면 택배 주소란에 자기 주소지를 적는 방법으로 가공 매출을 만들다 파산한 피해자에게 ‘기본적인 주의’가 없었음을 들어 일부 책임을 인정한 경우가 있다. 무리한 실적 확보 행위를 자발적 가담의 증거로 본 사례도 있다. 사기 이전에 ‘자기 탓’도 있다는 뜻이다.
이런 무리한 행동에는 경제적 이익을 넘어 사회적 인정과 소속감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사회 경험이 별로 없는 참가자들은 팀장, 본부장 명함과 사무실을 받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성공담을 자랑하며 사업전략을 가르치다 보면 자긍심이 생긴다.
공격적 광고·홍보로 회사와 제품이 알려질수록 자긍심은 더욱 커지는데 전현직 유력 인사나 유명인과 함께하는 자리, 호화로운 해외여행 등이 더해지면 실제로 ‘생전 처음 느끼는 자존감과 행복’을 느꼈다는 증언도 있다.
대도시로 유학하는 지방 대학생들을 모아서 합숙시키면서 다단계 판매를 강요한 사례가 있다. 피해자들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일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감동했다.
전직 대기업 중역, 로펌 관계자 등 저명인사들과 함께한 대화는 교수들의 한심한 교과서 암기보다 생생했다. 원금 보장, 수익률 약속 등에 대해 일부 문제점을 발견해도 이런 기회가 아쉬웠고 동료 및 선후배와의 관계도 버릴 수 없어서 결국 거액의 빚을 지게 됐다.
인정욕구와 소속감을 자극했다고 불법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어 자신에게 유리한 행동을 끌어낸다면 경제적 약탈보다 더 심란하다.
이런 일은 세상에 너무나 많다. 부동산 분양사기, 코인 사기, 상품권 사기는 물론 정치판의 거래, 기업과 정부의 인간관계에도 있다.
사업과 사기
멀쩡한 경영자가 사업적 가치가 없는 일에 허무하게 말려드는 경우가 있다. 나만 아는 특급 정보가 있고 실행 과정의 문제들도 나만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반대 의견은 물정 모르는 소리가 된다.
세상의 모든 사기는 주제넘은 한탕 욕심이 현실 판단을 덮어버릴 때 시작된다. 덧없는 경쟁심과 허영까지 더해지면 촘촘하게 짜 놓은 사기판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대기업을 출세의 지름길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다. 월급쟁이 사장이 대통령이 된 사례도 있으니 맞는 말 같지만 사실 그 기회는 매우 적다. 수출보국, 사업입국에서 보듯이 공동체를 위한 헌신의 기회로 여겨서 영혼을 불태웠지만 해 먹기 경영의 도구에 불과한 경우도 있었다.
안 되는 일을 꾸며서 유혹했다면 사기다. 거창한 뜻을 내걸고 구성원의 마음을 등쳤다면 이 또한 사기이다. 구성원 모두를 다단계 피해자로 만든 셈이다.
대기업이 주는 기회와 헌신의 가치는 분명히 있다. 무엇보다 일을 배운다. 그러나 그 한계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영혼을 뺏겼다면 자신의 책임도 있다. 회사와 경영자에 따라 그 가능성이 다르고 시간이 가면서 사정은 달라지니 이 또한 스스로 책임질 부분이다.
잘못된 일에 기대를 걸고 숭고한 가치까지 더해서 영혼을 쏟아붓는 일은 무수히 많다. 통치자와 지배집단의 이익을 위해 힘없는 젊은이를 사지로 몰고 조국과 동지를 위한 헌신을 강요한 전쟁, 영웅 메달은 장군들의 포커판에 칩으로 쓰였다.
대기업, 대학, 정부기관, 나아가 정치판은 다른가? 다단계 사기, 의미 있는 일에 영혼을 쏟아붓는 지혜를 가다듬을 사례연구 감이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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