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이대남 미디어 전략이 의미하는 것
[2024 미국 대선과 미디어]
[미디어오늘 박상현 오터레터(OTTER LETTER) 발행인]
원래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한 달 여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는 조심스럽게 한 쪽의 승리를 예상하는 보도가 나온다. 물론 2016년처럼 완전히 틀리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런 예상이 나온다는 건 (적중 여부와 상관없이) 전문가들이 보기에 그럴만한 근거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도널드 트럼프와 카멀라 해리스 중에서 어느 쪽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 보도가 나오지 않는다. 초박빙의 승부라서 어느 한 쪽이 우세하다는 조사 결과도 대개 오차 범위 안에서의 얘기다.
가령 미국 시각으로 일요일(9월29일)에 나온 한 보도(뉴스위크)에 따르면 트럼프는 7개 경합주 중 5개에서 해리스에 앞서고 있지만, 같은 날 나온 다른 보도(폴리티코)를 보면 경합주에서 두 사람은 사실상 동률이다. 이런 지지율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선거일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두 후보가 워낙 낮과 밤처럼 대비되는 정치인이고, 그들을 지지하거나 싫어하는 유권자들의 견해도 워낙 뚜렷해서 지지하는 후보를 바꿀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지지층이 견고하게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기려면?
투표소에 가지 않는 것으로 악명 높은 유권자 집단을 설득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20대 유권자들이다. 어느 나라나 이 집단은 투표율이 낮기 때문에 이들을 투표소로 끌어낼 수 있는 후보는특히 트럼프와 해리스처럼 지지율이 바뀌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는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20대를 투표소로 더 많이 데리고 올 수 있는 후보는 카멀라 해리스다. 이유는 여성의 임신중지권이다.
미국에서는 2022년에 연방 대법원이 임신중지(낙태)권을 보장한 판례를 폐기해서 각 주가 알아서 결정하게 했고, 이 과정에서 공화당과 트럼프가 밀어 넣은 대법관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미국의 보수세력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연방 차원에서 임신 중지를 불법화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내용을 담고 있는 '프로젝트 2025'는 미국의 보수 씽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에서 만들었지만, 트럼프의 측근들이 작성에 참여했고, 그의 러닝메이트인 J.D. 밴스가 서문을 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실상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청사진으로 통한다. 가임 연령에 있는 젊은 여성들이 분노하는 이슈가 된 건 당연한 일이다.
가톨릭 신자로 임신 중지 문제에 관한 발언을 꺼렸던 조 바이든과 달리, 여성인 해리스는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주요 선거 이슈로 만들면서 젊은 여성들을 독려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인기 가수인 테일러 스위프트까지 해리스를 지지하고 나서자 트럼프는 20~30대 여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인식했고, 임신 중지의 불법화는 자기의 정책이 아니라며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젊은 여성들이 마음을 바꿔 트럼프를 지지할 것 같지는 않다. 결국 트럼프는 대대적으로 투표소로 향할지 모르는 이들의 영향력을 중화(neutralize)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고, 미국판 '이대남', 즉 젊은 남성 유권자들의 투표를 유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젊은 남성 유권자들에게는 여성들의 임신중지권만큼 절박한 이슈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들의 관심을 끌어낼까?
트럼프와 밴스가 선택한 방법은 매노스피어(manosphere, 직역하면 '남성들의 공간, 남성계' 정도의 의미, 한국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남초 커뮤니티'가 비슷한 개념) 공략이다. 지난 한 달 동안 트럼프와 밴스는 남성, 특히 젊은 남성 오디언스가 압도적으로 많은 유튜브 채널과 팟캐스트 9곳에 출연해 인플루언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기 유튜버 로건 폴(Logan Paul)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임폴시브(Impaulsive)에 출연한 것이다. 평소 종합격투기(UFC)와 복싱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젊은 남성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끄는 로건 폴은 트럼프에게 “주먹질 싸움을 해봤느냐”는 식의 질문으로 흥미를 자아내는 인터뷰를 하면서 20대 남성들의 관심을 모았다.
여성 유권자들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트럼프 선거 운동 본부에서는 트럼프 후보가 노골적으로 젊은 남성을 타깃으로 하고 있다고 말하지 못하고, “최대한 많은 유권자를 공략하고 있다”라고 밝혔지만, 트럼프와 밴스가 최근 출연한 팟캐스트와 유튜브 채널의 시청자, 청취자군을 분석한 전문가에 따르면 이대남 공략 의도는 분명하다.
이런 채널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현재 미국의 Z세대는 틱톡을 비롯한 뉴미디어를 통해 뉴스를 접하고, TV 뉴스와 신문은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뉴미디어 자체가 아니라, 트럼프가 선택한 채널들에 있다. 로건 폴이나 넬크 보이즈(Nelk Boys), 마이크 포트노이(Mike Portnoy) 같은 채널들은 진지한 뉴스를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다. 따라서 트럼프도 이런 채널에 출연해서 UFO나 핵전쟁, (영화 캐릭터인) 한니발 렉터 같은 흥미위주의 소재로 시간을 채웠다. 그 결과 이들 채널의 시청률, 청취율은 평소의 몇 배로 치솟았지만,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는 이유로 젊은 남성들이 귀찮음을 무릅쓰고 투표소로 향하게 될까?
뉴욕타임즈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에 투표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젊은 남성 유권자들 중 1/3이 투표소에 가지 않았고, 젊은 남성들일수록 나이든 후보에 투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투자 대비 효과가 떨어지는 집단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이들에 기대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여성과 남성의 정치 성향의 차이가 극명하게 벌어지고 있고, 양상도 여성-진보, 남성-보수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 유권자들은 38% 포인트 차이로 해리스를 지지하지만, 젊은 남성들은 13% 포인트 차이로 트럼프를 지지한다. 이들 사이의 간극은 51% 포인트로 어떤 인구집단 보다 크다.
이런 차이는 어쩌면 이번 선거의 향방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지 모른다. 로건 폴과 UFC, 복싱에 열광하는 20대 남성들은 트럼프를 롤모델, 혹은 남성성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이런 성향은 올해 처음으로 투표하는 가장 어린 남성 유권자들 사이에서 가장 뚜렷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라는 이름이 투표 용지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이들의 정치 성향이 바뀔 거라 기대하기는 힘들다. 트럼프는 한 정치인에 불과하지만, 그로 대표되는 '트럼프 현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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