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피프티? ‘젊음’ 강박보다 내 에너지 수준 아는 게 중요하다
노년의 젊음
‘젊음에 대한 강박 커지는 트렌드
유행 좇는 삶은 자기이해를 방해
2030도 ‘젊은’보다 ‘좋은’ 어른 선호
내 에너지 수준·한계 아는 게 중요’
근래에 마케팅 분야에서 50~60대를 시니어라고 하지 않고 ‘영피프티’(젊은 50대)라고 표현합니다. 과거의 50대 직장인들과는 달리 엑스(X)세대(1970년대 초~1980년대 초에 태어난 세대) 부장님들은 퇴근 뒤에도 밴드 활동을 한다거나,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하면서 신입사원과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마케팅은 무엇보다도 5060이 구매력이 가장 큰 소비자군이라는 데 착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장에서 개인이나 기업이 유행·트렌드를 포착해서 사업 기회를 찾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런 상업적 접근이 가져오는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는 우려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위에서 묘사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5060이 지금 한국 사회에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하는 거지요. 영피프티라는 트렌드 키워드가 말하는 5060 특정 소비자군의 틀에 부합하려면 현실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부와 사회적 지위, 또 자기관리 능력이 있어야 하니까요. 현실적으론 그렇기도 어렵거니와 사람들에게 ‘영피프티가 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이라는 불안과 강박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일부 엠제트(MZ)세대는 영피프티란 용어를 두고 ‘경제·사회적으로 누릴 건 다 누려놓고, 이젠 젊음까지 누리겠다는 거냐’는 반감도 있다고 합니다.
구태여 젊어 보이려 하지 않아도
나이 들어 젊게 산다는 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현재 ‘영피프티’라는 용어의 ‘영’(Young)이 외적인 것에 지나치게 치중돼 있다는 겁니다. 관리가 잘된 젊은 할머니·할아버지에 대한 선망, ‘워너비’라는 열풍은 자신의 나이 듦을 직면하지 못하게 하거나 너무 늦게 바라보게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젊어야 한다는 유행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보면 나 자신의 고유한 성향과 에너지 수준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최신 기기나 클래식에 대한 관심은 각자가 가진 취향·관심의 영역으로 유행을 좇는 것과 다릅니다. 유행을 좇다 보면 자신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걸 방해합니다.
옛날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동네에 자연스럽게 함께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을 주변부로 내몰고 소수자처럼 취급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세태에 휩쓸려버리면 나 자신의 나이 듦도 부정하고 늙음이라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게 될 겁니다.
스스로의 에너지 수준이 전보다 낮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렇지 않은 듯 행동하면 결과적으로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이 나타납니다. 또 바깥으로만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돌려서 나 자신의 노화에 대한 건강한 성찰을 하는 것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나 스스로부터 ‘나이가 들어도 괜찮다’는 것을 인정해야 사회적 시선도 바뀔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꼭 50대가 아니어도 ‘젊음’에 대한 강박이 점점 커지는 사회로 가고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짜 트렌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청년들이 직장에서 5060 상사가 단지 자신들과 비슷한 취향을 갖기만을 원하는 걸까요? 자신들과 비슷한 복장에다 셀카도 잘 찍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고 유행을 따라 하는 상사를 정말로 영하다, 쿨하다고 인정해줄까요? 제가 만난 2030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소위 라떼, 꼰대 선배는 싫지만 그렇다고 자기들과 같은 젊은 취향을 가진 선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좋은 어른이 그립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눈치 보지 않고 잘못은 지적하면서 필요한 것은 가르치고 또 책임 있는 의사결정을 하는 선배들이 드물다고, 자기들은 그런 어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지요. 또한 가장 부러운 어른은 평화롭고 기쁘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구태여 젊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고 자기 모습 그대로 잘 사는 사람들이겠지요.
생명의 본질은 움직임입니다. 생명이 다했다는 것은 더 이상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지요. 젊다는 것, ‘영’하다는 것은 성장과 변화를 향한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뜻일 겁니다. 즉, 젊다는 것은 유연하다는 것이지요. 노년에 이르러 비록 몸은 전과 같이 유연하지 못하다 해도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체력만 유지된다면 마음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젊었을 때보다 더 유연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알아왔던 것, 당연시 여겨왔던 것들에 대해서 꼭 그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스스로가 더 넓게, 더 깊게 성장해나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젊은 중년, 젊은 노년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에는 중년 여성들의 경우 생리가 멈추고 호르몬 변화에 따른 신체적 변화가 찾아오는 시기를 폐경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완경기라는 표현을 씁니다. 노년기 역시 단지 하강곡선을 그리며 삶의 문을 닫는 시기가 아니라 인생의 완성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에너지를 얻는 소스도 다르고 에너지를 쓰는 대상도 다릅니다. 내 에너지의 한계와 수준을 안다는 것은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 줄 아는 것으로서, 특히 노년에는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젊어서 사회생활 할 때는 자신의 한계를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또 인정하면 곤란한 경우도 많지요. 그러나 젊을 때 자신을 인정하는 훈련이 안 돼 있으면 노년이 되어 갑자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회사나 사회가 사회적 성취를 예우해주면 취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일과 거기에서 나의 성취가 나의 근원적인 에너지 공급처가 아닌 경우에는, 즉 다시 충전시켜주는 원천이 아닌 경우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의 우물 바닥에 물이 다시 고여올 새도 없이 다 퍼서 써버리고 나면, 은퇴에 가까이 오면서 완전히 소진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무력감에 이어서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젊을 때부터 자신을 잘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어떤 것에서 에너지를 얻고 어디에다 에너지를 쓸 때 행복한지를 알아내는 것이지요. 그래야 노화를 부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년에도 젊게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노년이 되어서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젊다는 것과 행복하다는 것이 반드시 같이 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한 뒤 삶의 방향을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로 바꿨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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