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짠맛이 국물에 배어든 밥상, 태안 안면도 ‘바다산성’에서 만난 기억의 맛

아침부터 바닷바람이 거칠게 부는 날이었다. 하늘은 파랗고, 바다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봄의 끝자락에 가까워질수록 태안의 풍경은 더 온순해지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입맛도 계절을 따라 변해간다. 이 시기, 현지인들 사이에서 진짜 제철 밥상을 맛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안면도 방포해수욕장 근처,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면 소박한 간판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바다산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식당이다.

이곳은 지난 2024년 4월, KBS 1TV <6시 내고향>에서 소개되며 전국적으로 알려졌지만, 방송 전부터 이미 단골들 사이에선 조용히 입소문이 퍼져 있었다.

‘이 집 게국지는, 그냥 국물이 아니다’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다르다. 말 대신 국물이 기억에 남는 집. 그게 이곳의 첫인상이었다.

짭조름하고 깊은 맛, ‘게국지’에 녹아든 태안의 시간

게국지(蟹國汁)는 단어만 들어도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김치찌개 같지만, 김치찌개가 아니다. 된장찌개처럼 푹 끓이지만, 그보다 더 복합적인 풍미가 입 안을 감싼다. 게국지는 충남 태안과 서산 일부 지역에서만 전해 내려오는 향토 음식이다.

그 유래는 소박하다. 겨울 김장을 마친 후, 게장을 담그고 남은 짭조름한 국물에 시래기와 묵은지를 넣고 끓인 것이 시초다. 냉장고도, 보관법도 미비했던 시절. 어머니들은 최대한 아끼고 활용하기 위해 게국지라는 지혜를 만들었다.

하지만 ‘바다산성’의 게국지는 단순한 재료 재활용 요리가 아니다. 진짜 게장을 담근 국물에, 손질한 생물 꽃게를 넣고 시래기와 묵은지를 푹 끓인다. 육수 따로 넣지 않아도, 국물에서 바다향이 폭발한다.

국자 하나 떠올릴 때부터 코끝을 자극하는 이 향은, 짭조름함 너머로 단맛과 산미, 그리고 깊이가 뒤섞여 있다.

밥 위에 게국지 한 숟갈, 그리고 꽃게 한 조각

음식이 상 위에 오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 뚝배기에서 뽀글뽀글 끓는 게국지는 그 자체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국물 사이사이로 게 다리, 배추줄기, 시래기의 초록이 고르게 퍼져 있다.

그리고 국물 위로 살짝 떠오른 기름기는 고소함을 예고한다. 밥 한 숟갈에 국물을 적시고, 그 위에 꽃게 한 조각을 올려 한 입. 짠맛, 감칠맛, 무게감 있는 식감이 입안에서 터진다. 게살은 생각보다 부드럽고, 살짝 짭조름한 국물과 함께 삼키면 전혀 자극적이지 않다.

시래기의 질감은 씹는 맛을 더해주고, 묵은지는 국물에 감칠맛을 더해주는 조연이다. 모든 요소가 하나의 톤으로 잘 어우러진다. 마치 장인의 손길처럼. 가장 인상 깊은 건 국물의 ‘밸런스’다. 짜거나 강하지 않고, 은근하게 남는 짠맛과 시원함.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마저 들어, ‘해장’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봄이 만든 보물, ‘갑오징어 볶음’의 놀라운 식감

게국지 하나로도 충분할 수 있었지만, 이 집에서는 ‘갑오징어 볶음’을 빼놓을 수 없다. 봄철이 제철인 갑오징어는 살이 꽉 차고 단맛이 도는 시기. 그 신선한 오징어를 얇게 썰어, 매콤한 양념에 볶아내면 그야말로 감탄이 나온다. 특이한 점은 채소를 거의 넣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해산물 볶음이 양파, 대파, 당근으로 장식되곤 하는데, 바다산성은 오징어의 ‘본연의 맛’에 집중했다. 양념은 자극적이지 않게 매콤하면서도 은근히 단맛이 도는 스타일. 입에 넣는 순간 쫀득쫀득한 식감이 살아 있고, 오징어 특유의 달큰함이 남는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기름기가 거의 없다는 점. 볶음요리임에도 담백하게 느껴졌고, 느끼함 없이 밥과 함께 술술 넘어간다. 게국지가 ‘바다를 마시는 국물’이라면, 갑오징어 볶음은 ‘봄을 씹는 식감’이다.

위치도 맛처럼 정직하다, 바다를 마주한 ‘바다산성’

식당의 위치는 여행자들에게도, 현지인들에게도 딱 좋은 지점에 있다. 안면도 방포해수욕장에서 차로 약 5분 거리, 걸어서도 10분 남짓이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산책하듯 걸으면 어느새 식당 앞에 도착하게 된다.

외관은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소박하고 정갈하다. 하지만 식당 안으로 들어서면, 바다 내음과 함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풍경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현지 어르신들이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고, 가족 단위 손님이 연이어 들어온다. 대부분 방송이 아니라 ‘지인의 추천’으로 왔다며 웃는다. 그런 가게가 진짜다.

밥 먹고 걷는 길, 태안 안면도의 봄을 마주하다

한 끼 배불리 먹고 나면 슬슬 걷고 싶어진다. 바다산성은 식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근처엔 태안 특유의 고즈넉한 바닷길과 해변이 펼쳐져 있어, 소화도 시킬 겸, 풍경도 담을 겸 걷기 참 좋다.

가장 가까운 곳은 방포해수욕장이다. 차로 5분, 걸어도 10분이면 닿는다. 너무 넓지도 않고, 그렇다고 작지도 않다. 모래알은 부드럽고, 바닷바람은 여유롭다.

식당에서 먹었던 게국지의 짭짤한 맛이 입 안에 살짝 남아있는 상태로 바다를 바라보면, 뭔가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기분이 든다.

방포해변을 지나 꽃지해수욕장이나 안면암까지 드라이브 삼아 둘러봐도 좋다.

특히 봄부터 초여름까지는 유채꽃과 철쭉, 그리고 해질 무렵의 노을이 비추는 수평선까지, 감성적인 풍경이 곳곳에 숨어 있다.

밥 한 끼에 담긴 지역의 기억

‘바다산성’의 게국지를 먹으며 떠오른 것은 단지 맛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태안 사람들의 방식, 어머니의 손맛, 바다를 살아내는 지혜 같은 게 담겨 있었다.

게국지는 태안과 서산 일부 지역에서나 먹던 음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방송을 통해, SNS를 통해, 여행자들의 입을 통해 천천히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그런 음식이 ‘상품’이 아니라 ‘기억’으로 전해진다는 건, 꽤 멋진 일이다. 식당 안에는 오래된 사진도, 젓갈 항아리도, 낡은 나무 탁자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지역다운 공간’을 만든다.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있는 식당이지만, 그 공간은 바다보다 더 따뜻했다.

여행자들을 위한 정보 요약
  • 식당명: 바다산성
  • 주소: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방포1길 62-19
  • 문의: 041-674-9908
  • 추천 메뉴: 게국지 정식, 갑오징어 볶음 (봄~초여름 한정)
  • 영업시간: 오전 10시 ~ 저녁 8시 (비성수기 평일은 7시 마감 가능)
  • 주차: 전용 주차장 O

인근 여행지: 방포해수욕장, 꽃지해변, 안면암, 안면도자연휴양림 등

짧은 여행에도 오래 남는 순간이 있다면

여행이란 게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화려한 전망대도, 거대한 랜드마크도 없어도 좋다. 한 끼 밥상이 따뜻했다면, 그날은 이미 좋은 여행이다.

태안 안면도의 ‘바다산성’은 그런 여행을 만들어주는 곳이다. 낯선 도시에서, 낯익은 맛을 만나는 일. 그 안에서 우리는 그 지역의 계절과 문화를, 사람과 이야기를 마주하게 된다.

이번 여행, 꼭 뭔가를 더 채우지 않아도 괜찮다. 게국지 한 숟갈, 쫄깃한 갑오징어 한 점, 그리고 조용한 바닷가 산책.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충분히 채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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