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정부 시절 '민간 외교관'을 자임하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한국 개최의 간판 인물로 활약했던 조현상 HS효성 부회장이 정권 교체와 특검 수사를 거치며 기로에 섰다.
현재 APEC 기업인자문위원회(ABAC) 의장이라는 상징적 직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최근 굵직한 국제회의와 행사에서 연이어 불참하며 존재감이 이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재계 안팎에서 나온다.
정부 고위 인사와 연쇄 회동…활발한 글로벌 행보
조 부회장은 2024년 8월 외교부 장관 추천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 APEC 기업인자문위원회(ABAC) 한국 대표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한국이 APEC 의장국을 맡게 되면서 그는 회원국 만장일치로 2025년 ABAC 의장에 선출됐다. 의장직에 따라 연간 4차례 열리는 회의 주재와 ABAC 위원–APEC 정상 대화 행사 진행 등 굵직한 국제 일정이 그의 역할에 포함됐다.
임명 직후부터 조 부회장은 APEC 준비를 위한 대외 행보에 나섰다. 2024년 10월에는 당시 조태용 외교부 장관, 강인선 2차관, 정인교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등 정부 고위 인사와 만나 준비 상황과 ABAC 활동 방향을 논의했다. OECD 기업산업자문위(BIAC) 이사, 한-베트남 경제협력위원장 등 기존 국제 네트워크를 활용해 민관 협력 기반을 확장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이 과정에서 조 부회장은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겸 SK그룹 회장과 '투톱 민간 외교' 구도를 형성했다. 최 회장이 APEC CEO 서밋 의장 자격으로 일본, 미국 등을 방문해 정상급 네트워크를 가동한다면 조 부회장은 ABAC 의장으로서 호주 브리즈번, 캐나다 토론토, 베트남 등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회원국 정상과 교류했다. 11월에는 페루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는 차기 의장 자격으로 참석해 회원국 기업인들과 정상 건의문 조율에 참여했다.
2025년에도 민간외교관으로서의 적극적인 활동은 이어졌다. 5월에는 당시 이주호 대통령 권한대행이 주재한 APEC 준비위원회 회의에 민간위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오는 10월 말 부산·경주에서 예정된 APEC CEO 서밋과 ABAC 제4차 회의 준비 과정에도 관여해왔다.
'김건희 집사 게이트' 수사, 입지 변화 시그널?
조 부회장의 이러한 행보는 이른바 '김건희 집사 게이트' 의혹 수사로 제동이 걸렸다. 민중기 특별검사팀이 조 부회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 피의자로 전격 소환했기 때문이다.
특검에 따르면 HS효성 계열사 4곳이 2023년 김건희 집사로 불리는 최측근 김예성 씨가 설립에 관여한 렌터카 플랫폼 IMS모빌리티에 약 35억원을 투자한 정황이 포착됐다. IMS모빌리티는 대기업들과 금융회사로부터 총 184억원의 투자를 유치한 뒤 이 가운데 46억원을 김예성 측에 흘러가게 한 의혹을 받고 있다. 특검은 투자 당시 HS효성을 포함한 일부 기업들이 사법 리스크에 직면해 있었고 김건희 씨와 친분이 있는 인물이 이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 속에 대가성 투자가 있었는지 여부를 조사 중이다.

이 같은 수사 상황은 조 부회장의 대외 행보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소환 통보 이후 공식 일정 노출은 줄었고 APEC 관련 회의와 행사에서도 참석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생겼다.
7월 말 김민석 국무총리가 주재한 APEC 정상회의 종합점검회의는 새 정부 들어 처음 열린 민관 합동 준비 회의였지만 정작 ABAC 의장인 조 부회장의 이름은 참석자 명단에서 찾을 수 없었다. 해당 회의에는 외교부·문체부 차관, APEC 고위관리, 경호·시설 담당자들과 함께 대한상의 상근부회장, APEC CEO 서밋 추진단장 등 경제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APEC 준비 상황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달 11일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방한한 또 럼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을 초청해 국빈 만찬을 열었다. 최태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주요 그룹 총수들이 한자리에 모인 행사였지만 조 부회장의 모습은 확인되지 않았다.
재계 서열만 놓고 보면 조 부회장의 불참이 특별할 것은 없지만 그가 현재 한국·베트남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의미심장하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여기에 HS효성은 20년 전부터 베트남 호찌민, 동나이, 꽝남 등지에 대규모 생산기지를 구축하는 등 지속적인 투자를 이어오기도 했다.
재계에서는 이 같은 상황이 ABAC 위원장직의 상징성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 APEC 기업인 행사 준비는 현재 대한상공회의소를 축으로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10월 부산·경주에서 열릴 정상회의에는 21개 회원국 정상과 1000여명의 글로벌 기업인이 참석할 예정이다. 행사 운영과 조율 기능 역시 대부분 대한상의와 정부 간 협의 채널을 통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에서는 이를 단순한 개인 일정상의 공백이 아니라 HS효성이 감당해야 할 '오너 리스크'가 국제 무대까지 확장된 사례로 해석한다. 해외 전략이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대표 인물이 국제 행사에서 보이지 않으면 영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특히 APEC 의장국 해에 대표 인물이 의장직을 유지하면서도 실질적 활동에서 비켜난 듯한 모습은 상징성이 크다는 평가다. 오는 10월 부산과 경주에서 열릴 제4차 ABAC 회의와 APEC CEO 서밋은 조 부회장의 향후 입지를 가늠할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최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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