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반도체 사업장, 안전 문제는 '뒷전'..2030세대 산재피해 '최다'
질병으로 인한 사망, 사고보다 3배 가까이 많아
직업성 암·희귀질환 10명 중 7명은 '2030'
A씨는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2년 7월 삼성디스플레이 천안공장에서 취업전제형 현장실습으로 일을 시작했다. 주로 LCD 공장의 컬러필터 공정(LCD에서 빨강, 파랑, 녹색 빛을 만들 수 있게 하는 공정)에서 일했다. 벤젠이나 포름알데히드 등 각종 화학물질에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교대근무로 일하던 어느날 극심한 피로감과 생리불순을 겪었고 결국 2008년 2월 퇴사했다. A씨는 2010년 1월 만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A씨는 2017년 산재 승인 처리됐다.
B씨는 1995년 12월 SK하이닉스 청주사업장에 입사해 약 10년간 장비엔지니어로 근무했다. 35살이 된 2005년 10월 악성림프종이 발견됐고 2006년 8월 자가이식 치료를 받았지만 5년 만에 재발했다. B씨는 현재 항암치료를 병행하며 병마와 싸우고 있다. B씨는 2017년 산재 승인 처리됐다.
반도체 관련 사업장에서 A씨, B씨와 같은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C씨는 A씨처럼 고등학교 3학년때 삼성전자 온양사업장 근무를 시작해 일하다 퇴사 3년 2개월만에 ‘상세불명의 갑상선 장애’ 및 ‘비호지킨림프종’ 진단을 받았다. C씨는 2018년 산재 승인 처리됐다. B씨와 같은 사업장에서 일한 D씨는 반도체 칩 테스트 공정 중 칩 수거분석 업무를 담당하다가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치료와 재발을 반복하다 퇴직 후 1년여 뒤 숨졌는데, D씨는 2019년 산재 신청이 반려됐다.
반도체 사업장 사망 노동자 70%가 질병 재해
지난 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정부 출범 한달도 안된 지난 6월7일 “국가 안보 자산이자 산업의 핵심”으로 첨단 산업 인재양성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교육부를 비롯한 전 부처에 주문했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반도체 특별법’을 중대처리 10대 법안으로 밀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최첨단’ 사업장이라는 반도체 공장에서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고통받고 있지만 안전 문제는 아직 뒷전에 있다. 노동시간 제한까지 풀어가며 실적 올리기에 급급해 한다.
경향신문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우원식 의원실(더불어민주당)과 함께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소속 304개 기업에서 최근 5년간(2017년~2022년 8월) 발생한 산업재해를 모두 살펴봤다. 근로복지공단을 통해 폐업으로 추정되는 1개사를 제외한 303개사의 산재 처리내역(승인+불승인)을 분석했다. 반도체 사업장은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5년여 동안 304개 기업 중 132개 기업에서 1581건의 산재가 신청돼 처리까지 마쳤다. 유형별로 보면 사고(재해)가 1076건(68.1%)으로 가장 많았고 질병 311건(19.7%), 출퇴근 194건(12.3%) 순이었다.
전체 산재처리는 사고가 훨씬 많았지만 사망자수로만 보면 질병이 사고를 앞질렀다. 사망자 중 질병이 70.1%를 차지했고 사고는 23.4%에 불과했다. 출퇴근은 6.5%였다. 같은 기간 반도체를 포함한 모든 업종의 산재 사망자를 보면 사고가 42.2%, 질병이 57.8%를 차지했다.
산재피해자들을 연령별로 보면 청년층의 비율이 컸다. 이른바 ‘2030’으로 불리는 19~39세가 931명, 4050대(40~59세) 577명, 6070(60~80세) 73명 등이었다.
업종별로 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포함된 소자업체에서 산재처리가 493건(31.2%)으로 가장 많았다. 뒤이어 재료업체 416건(26.3%), 장비업체 195건(12.3%), 설비업체 163건(10.3%), 설계업체 155건(9.8%), 부분품업체 81건(5.1%), 테스트·패키징업체 61건(3.9%) 등으로 나타났다.
산재가 발생하고 몇년이 지나 승인여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대다수이긴 하지만 추이를 살펴보기 위해 연도별로도 처리현황을 정리했다. 2017년 175건이던 반도체 사업장 산재처리는 2018년 233건, 2019년 279건, 2020년 279건, 2021년 356건 등으로 증가 추세를 보였다.
산업 전체를 보기 위해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전자관 또는 반도체 소자제조업 산업재해 현황’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해보니 추이는 비슷했다. 공단의 현황자료(출퇴근 제외)에 따르면 2017년 355건, 2018년 389건, 2019년 433건, 2020년 414건, 2021년 487건의 산재가 집계됐다. 이중 질병 재해자는 전체 산업재해 중 20%를 차지했다.
암·희귀질환 10명 중 7명은 ‘2030’
경향신문은 각종 화학물질에 노출돼 일하는 반도체 사업장의 환경을 고려해 질병재해 311건을 더 상세하게 분류해봤다. 311건 중 근골격계 질환이 106건(34.1%)으로 가장 많았고, 직업성 암·희귀질환 질병 이 80건(25.7%)으로 나타났다. 이어 우울장애 등 정신질환(자살 포함)이 49건(15.8%), 뇌출혈과 심근경색 등이 43건(13.8%)이었다. 기계소음으로 인한 난청 19건(6.1%), 눈 관련 질환 3건(1.0%) 등도 있었다.
직업성 암·희귀질환 질병을 다시 분류해보면 직업성 암이 62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희귀질환 14건, 피부질환 3건, 기타 1건 등이었다. 직업성 암은 백혈병이 18건으로 최다였고 유방암 16건, 폐암 7건, 난소암 6건, 뇌종양 5건, 혈액암(악성림프종 등) 3건 등으로 나타났다. 갑상선암, 융모암, 자궁경부암, 외이도암, 악성중피종 등도 각 1건씩 있었다. 희귀질환으로는 자가면역질환으로 피부발진이나 관절염 등 증상이 나타나는 전신홍반성루프스가 7건이었고, 갑상선기능저하증과 류마티스관절염, 피킨슨병 등이 각 1건씩 나타났다.
직업성 암·희귀질환 질병 재해자 10명 중 7명은 ‘2030’ 청년이었다. 고등학교 때 현장실습으로 취업해 일하다 이른 나이에 암과 희귀질환 진단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30대가 절반인 40명(50%)이었고 20대도 17명(21.3%)이나 됐다. 40대는 13명(16.3%), 50대는 7명(8.8%), 60대는 2명(2.5%), 70대는 1명(1.3%)등으로 나타났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2019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소속 반도체 소자제조업 6개사 9개 사업장 전·현직 노동자 20만105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역학조사를 보면, 반도체 사업장 청년 노동자들의 백혈병 유병률이 전체 노동자 평균보다 높았다. 당시 조사에서 반도체 여성 생산직 직원들의 백혈병 유병룰은 전체 노동자 평균의 1.59배, 20대 초반(20~24세) 여성으로 좁히면 2.74배에 달했다. 유방암의 경우 반도체 후공정 업무(패키징)를 담당하는 여성 노동자에게서 유병률이 높게 나타났다. 전체 노동자의 1.29배에 달했으며, 20대 초반(20~24세)으로 좁히면 4.24배로 높아졌다.
남성 직원의 경우 생산직 직원의 백혈병 발생률이 전체 노동자 대비 1.24배였고, 장비엔지니어는 이보다 높은 1.51배였다. 특히 30대 초반(30~34세) 남성 생산직 직원의 백혈병 발병률은 전체 노동자 평균보다 3.94배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상수 반올림 활동가는 “반도체 사업장 직업병 현황을 보면 20~30대 젊은 노동자들에게서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보통 백혈병같은 질병이 발생하기 어려운 어린 나이에 병에 걸리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통계적으로도 발병률이 뚜렷하게 높게 나타나고 있다”며 “특히 여성의 경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입사하는 경우가 많아 더욱 어린 나이에 병들고 목숨을 잃은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직업성 암·희귀질환 질병이 가장 많이 발생한 기업은 삼성전자(41건)였고, 뒤이어 SK하이닉스(15건), 삼성SDI(8건), 온세미컨덕터코리아(5건), LG화학과 케이씨텍(각 3건) 등으로 나타났다. 케이씨씨와 유니셈, DB하이텍, 티씨케이, 니콘프레시전코리아 등에서도 각 1건씩 집계됐다. 케이씨텍은 질병 재해 3건이 모두 피부와 관련이 있었다.
전체 암·희귀질환 질병 중 산재로 승인(승인+일부승인)된 것은 38건으로 절반에 못 미쳤다. 불승인(반려+불승인)은 42건이었다. 사망 재해자는 불승인율이 더 높았다. 암과 희귀질환 등으로 사망한 재해자의 산재처리는 승인이 5건, 불승인(반려+불승인)이 10건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반도체 산업 초강대국’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고용노동부는 반도체 업종에 대해 주 64시간까지 노동을 허용하기로 했다. 반도체학과를 양성한다면서 내년 한국폴리텍대학 운영지원 예산으로 350억원을 편성했다.
그러나 반도체 사업장의 노동시간 연장은 큰 사고를 초래할 수 있다. 최근 5년여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소속 기업의 사업장에서 발생한 질병 산재현황을 보면 장시간·야간 근무의 위험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질병산재의 13.8%(43건)가 뇌출혈과 심근경색이었고 이 중 25건이 사망으로 이어졌다.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의 생명을 위협한다. 9일 연속 근무를 한 노동자(50대)가 숨지는 일이 있었고, 업무과중에 시달리며 오후 10시까지 일한 노동자(40)가 의자에 앉아서 숨을 거두는 사례도 있었다.
집중적으로 일을 시킨 뒤 휴식을 준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삼성전자에서 엔지니어 업무를 담당한 한 노동자(30대)는 평소 장시간 업무로 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월 근무가능시간을 소진해 강제연차에 들어갔는데, 바로 다음날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숨졌다.
뇌출혈, 뇌경색, 심근경색 등의 질병 재해가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은 LG화학(11건), LG전자(10건), 삼성전자(9건) 등으로 나타났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실습생’에게 더 강력한 안전망을 씌워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국폴리텍 대학교 반도체 학과가 지난해 산학협력을 맺고 현장실습을 보낸 기업 중 산재가 발생한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소속은 온세미컨덕터코리아, DB하이텍, 솔브레인 등 11개 기업이다. 시민단체 반올림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 코미코, 온세미컨덕터코리아 등 산재가 발생한 협회 소속 기업 26개의 사업장에서 271명(사무·회계직 제외)의 ‘고등학생들’이 현장실습을 진행한 것으로도 확인됐다.
우원식 의원은 “작년 여수 현장실습생 사망사고 이후 정부차원의 사전현장실사 강화, 실습기업 중 산재기업 정보공유 확대가 시행됐음에도 현장실습 확대를 주요골자로 하는 윤 정부의 반도체 인재양성 방안에는 별도의 산업안전대책 검토가 없다”며 “반도체 육성이 국가적 과제라는 것은 이견이 없지만, 해당산업의 산재가 심각한 상황에서 안전한 훈련, 일터에 대한 방안없이 학생들을 우선 현장에 많이 보내겠다는 것은 윤 정부의 엉성한 노동인식 수준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y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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