돛줄까지 완벽 재현한 빅토리아호, 70년 전 흥남부두 떠올리게 해

배는 운송 수단으로 만들어졌지만 인류 문명 발달과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륙 간 무역과 이주에 큰 역할을 하였고 강대국 사이 전쟁과 식민지 개척 선봉에 있었다. 고대 세계대전으로 불리는 지중해 포에니 전쟁에서 해군력이 약했던 로마를 승리로 이끈 갤리선은 중세에 이르기까지 지중해를 누볐다. 바이킹은 랑스킵을 타고 다니며 무자비한 약탈과 전쟁으로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 해적질은 북유럽 민족이동에 따른 문명 전파와 새로운 땅의 개척과 교역 등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끈 산타마리아호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으며 마젤란 함대는 5척이 출발해서 빅토리아호 한 척만 일주에 성공했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했다. 동양에서는 중국 명나라 출신 정화가 유럽 범선보다 규모가 큰 함대로 동남아·인도를 거쳐 아프리카까지 진출하여 해양 실크로드 전성기를 이루었다. 16세기 동북아시아 세력 판도를 바꾼 7년 조일전쟁에서 일본 수군이 '복카이센'이라 부르며 두려워한 거북선은 일본을 패퇴시키고 조선을 지켜냈다. 찰스 다윈을 태운 비글호는 남아메리카와 갈라파고스섬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와 아프리카 대륙을 탐험하여 생물학과 지질 광물학에 큰 업적을 쌓게 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빅토리호를 지휘한 넬슨 제독은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를 이겨 해양강국으로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반열에 올렸다.

천해룡 씨가 무려 6개월에 걸쳐 완성한 영국 범선 로열 윌리엄호. /박보근

천해룡(67) 씨는 인류 문명에 큰 영향을 끼치고 사라진 배들을 복원하는 일을 한다. 거대한 골리앗 크레인이 수백t 구조물을 들어 옮기고 대형 선박들이 들어찬 옥포만 귀퉁이 두모마을, 그가 혼자서 배를 건조 중인 꼬마 조선소를 찾았다. 살림집 옆 작업장과 전시 보관을 겸하는 별채 공간에 들어서면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배들이 사라진 역사 속에서 살아나와 금방이라도 돛을 펼치고 대포를 쏘며 바다를 헤쳐나갈 듯하다. 첫 출항에서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당시 최대 여객선 타이태닉호의 슬픈 뱃고동이 울릴 것 같다. 사라진 옛날 역사만 있는 게 아니라 오늘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들도 생생하게 되살려 놓았다. 퀸 메리와 아이다 블루 호화 크루즈선 홀에선 막 화려한 파티가 열리고 미국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피랍되어 북으로 끌려간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곁에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가수 현인이 부른 옛노래를 생각나게 한다.

천해룡 씨가 범선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박보근

◇선원에서 유람선 선장까지 뱃사람 인생 = 1950년 12월 23일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서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부모 형제를 놓친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먼저 배에 오르려는 아우성이 뒤섞여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포성이 하늘을 흔들고 기뢰가 깔린 흥남 앞바다를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는 배가 보였다. 정원이 60명인 그 배에는 무려 200배를 훌쩍 넘는 1만 4000명 피난민이 타고 있었다. 바로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 이튿날 부산에 도착해 입항하려 했으나 군인과 피난민이 미어터지는 상황이라 배를 돌려 25일 거제 장승포항에 닻을 내렸다. 크리스마스 기적이라 불리는 이들의 항해는 훗날 '가장 작은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배'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여러 범선 사이에 하얀 여객선 한 척이 보인다. 채 피지도 못하고 멈춘 세월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게 붙들어 놓았다. 10년 전 4월 16일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는 승객 476명 가운데 299명이 사망하고 5명이 실종되었다. 특히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 2학년 325명 가운데 260명 어린 학생들과 인솔 교사 11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라지는 기억들을 모형 배로 복원해 되살리는 천해룡 씨는 통영이 고향이다. 1960~19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대부분이 그렇듯 가난에 떠밀려 부모님 일손을 도와야 했다. 아버지는 공부를 어중간하게 해서 명문대에 가지 못할 양이면 차라리 일찍 기술을 배우라고 권유했다. 정기 여객선을 놓치거나 급한 사정이 생긴 섬사람들이 이용하는 대절선을 부리던 아버지 밑에서 뱃일을 배웠다. 해기사 자격을 취득하고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선원 생활하면서 부업으로 꽤 돈을 벌었으나 사람을 잘못 만나 모든 것을 잃는 시련을 겪었다. 부산에서 유람선 선장으로 일하다 회사가 폐업을 하는 통에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 통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990년 거제에 터를 잡았다. 친구가 조선소 노동자로 월 55만 원에서 60만 원 받을 당시 유람선 선장 월급은 35만 원이었다. 살림은 그냥저냥 꾸려 나갈 수 있었으나 셋방살이를 면하기는 어려웠다. 회사에서 더 많은 임금을 받으려면 손님을 많이 받아 내 몸값을 올려야 했다. 궁리 끝에 '쓰리보이' 신선삼과 남보원 원맨쇼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몇 번이고 돌려 들으며 나름대로 재미있게 꾸며 보았는데 그럴싸했다. 처음 시도에 손님들이 손뼉을 치고 폭소가 터졌다. 상급학교 진학을 못해 입은 상처를 치유하느라 닥치는 대로 구해 밤을 새웠던 많은 독서량이 큰 도움이 되었다. 입소문이 나자 관광버스 기사들이 서로 유람선을 예약하느라 전화통에 불이 났다. 한바탕 놀고 나면 기사들이 비닐봉지를 들고 돌며 돈을 걷어 선장과 기관장에게 반씩 나눠 주는 것이 당시 유람선 업계 관례였다. 모으면 꽤 큰돈이었지만 모처럼 자식들이 거제 관광 보내준 할머니 할아버지 꼬깃꼬깃 주머니 푼돈을 팁이라는 명목으로 걷는 것이 마뜩잖았다. 대신 거제 명소를 인쇄한 수건이나 쟁반을 만들어 유람선에 매대를 설치하고 팔았다. 거제 관광을 보내준 자녀나 귀여운 손자들에게 기념품으로 선물하면 좋겠다 싶어 시작했는데 이게 대박이 났다. 하루 매출이 당시 한 달 급여보다 많을 때도 있었다.

천 씨가 손수 만든 모형 범선 사이로 세월호 모형이 보인다. /박보근

◇혼자 배 만드는 1인 조선소 = 사업 기반이 잡히고 배를 타는 현장에서 은퇴한 2009년 쉼 없이 달려왔던 날을 되돌아보며 인생 후반기에는 오롯이 자신을 위한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 진해 박물관에서 내부 조명을 넣은 모형 범선에 매료되었다. 호기심으로 구경하다 저 정도면 나도 만들 수 있겠구나 싶어 덥석 달려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 우선 관련 서적을 사서 그림을 보고 만들었더니 오차가 생겨 실패를 거듭했다. 안 되겠다 싶어 도면을 구해 조선소에서 실제 배를 만드는 순서와 똑같이 만들어 보았다. 성공이었다. 도면을 구할 수 없는 옛날 범선이나 항공모함·군함 같은 경우는 좌우전후 사진을 같은 비율로 확대해 계산한 값으로 자기만 볼 수 있는 도면을 만들어 배를 지었다. 처음에는 구조가 간단하고 작은 배부터 만들다가 실력이 늘고 전문 장비도 갖춰지면서 더 크고 복잡한 배를 원형 그대로 만들게 되었다. 나무 조각 하나하나 이어 붙이고 장식물을 직접 깎고 낚싯줄처럼 가늘게 축소한 밧줄이나 돛줄을 일일이 꼬아 설치하고 마지막 도색까지 하려면 손재주도 필요하지만 고도의 집중력과 끈기가 있어야 했다. 영국 범선 로열 윌리엄호 같은 배는 무려 6개월을 매달려 만들었다. 방송과 신문에 소개가 되고 알려지자 여기저기서 구입을 원하기도 하고 배우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소장을 생각하고 취미로 시작한 작품이라 나서서 판매는 하지 않았지만 꼭 원하는 이들에겐 더러 팔기도 했다. 배우려는 사람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만 돈벌이로 시작한 사람들은 곧 포기했다. 들이는 시간과 공보다 금전적인 보상이 되는 것도 아니고 판매도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3D프린팅 기술을 응용하고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춘다면 취미 생활을 벗어나 사업적으로도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천 씨가 직접 만든 거북선 모형. /박보근

그가 15년 동안 만든 배는 80척이 넘는다. 앞으로도 사라진 역사 속 기억을 복원하고 새로운 배를 만들어 나갈 거라는 그의 꿈은 조선업의 메카에 어울리는 근사한 선박 박물관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 힘으로는 전시 공간조차 확보하기 어려웠다. 거제는 뛰어난 자연경관과 내로라하는 대기업 양대 조선소가 있다. 자연경관에 비견될만한 조선업 관련 볼거리도 훌륭한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그는 지자체나 양대 조선소가 전시 공간만 마련해 준다면 조선업 메카로서 거제의 새로운 랜드마크를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한다.

  /박보근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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