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저 하이브리드 1.6L 터보 캘리그래피 트림의 주행에 나섰습니다. 차를 움직이자마자 하이브리드 특유의 매끄러운 구동, 대형 세단 특유의 차분한 주행 질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1.6L 터보 엔진과 결합한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은 전작 대비 배기량은 훨씬 작아졌지만 출력과 토크, 효율까지 모두 개선됐습니다. 소형차급, 자동차세는 덤이죠.
엔진의 개입 역시 상당히 자연스러운데 확실히 차급에 맞게 흡차음 및 진동 대응이 잘 되어 있어서인지 동일 파워트레인을 탑재한 하위 모델보다 더 부드럽게 느껴지더라고요. 패들시프트로 회생 제동 감도를 별도로 조작할 수 없는 것은 좀 아쉬웠지만요.
가속감도 훌륭했습니다. 모터가 꾸준하게 어시스트를 해주면서 고속 합류구간이나 추월을 할 때 이 거대한 차체를 꽤나 시원시원하게 끌어줍니다. 특히 고속 속도로 주행을 할 때 만족도가 높았는데요. 새로운 3세대 플랫폼이 적용되면서 낮아진 무게중심, 상대적으로 가벼운 무게의 1.6 파워트레인과 차체 뒤쪽을 눌러주는 하이브리드 배터리가 균형을 잡아주면서 안정감을 더해주는 모양이에요. 대대로 현대차들이 고속으로 갈수록 '붕 뜨는 듯한' 느낌으로 욕을 많이 먹었는데, 3세대 플랫폼이 등장한 이후로는 말 그대로 옛말이 됐습니다.
고급차를 타고 장거리 주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노면의 불쾌한 진동을 걸러주는 하체, 풍절음과 하부 소음이 억제되어 속도감이 줄어들면서 몸의 긴장이 함께 줄어듭니다. 덕분에 오랜 시간 운전하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피로도가 상당히 낮죠.
감도를 개선한 정전식 스티어링 휠은 고속도로 주행 시에 확실히 체감이 되는 사양입니다. 하위 모델의 압력식은 잡고 있어도 주기적으로 경고가 뜨는데 써보신 분들은 다들 아실 거예요. 이게 은근히 거슬리거든요.
승차감도 준수했습니다. 하이브리드의 무게감과 프리뷰 전자제어 서스펜션이 좋은 시너지를 일으킨 덕분인지 20인치에 달하는 신발을 신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을 만큼 기분 좋은 승차감을 제공했어요.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현대차는 동일 차종에서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장착한 모델이 가장 만족도가 높네요.
언젠가부터 독일차에 초점을 맞춰 국산 차들이 판매 시장에 관계없이 스포티해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친구는 확실히 내수가 주력이라 그런지 오로지 컴포트에 치중한 세팅으로 1세대의 영광을 승차감에서도 재현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운전자는 살짝 아쉬울지언정 함께 탄 가족들은 이쪽이 확실히 만족스러울 겁니다.
다만 여전히 뒷좌석보다는 앞좌석에서의 승차감, 직접 운전할 때의 만족감이 조금 더 높습니다. 차체 크기나 거주성은 비슷하지만 뒷좌석 승차감이 더 편안했던 제네시스 G90 같은 프리미엄 브랜드의 후륜구동 플래그십 세단들과 차이가 나는 지점인데요. 예전에 시승한 불보 S90 롱힐 베이스 모델에서도 이런 점을 느꼈었는데 아무래도 전륜구동 대형 세단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네요.
한편 거대한 차체는 장점임과 동시에 단점이기도 합니다. 대형 세단이 대형인 게 잘못이냐고 말씀하시면 할 말은 없지만, 요즘 차들이 필요 이상 너무 커졌어요. 그렇다고 예전 모델들이 좁았던 것도 아니잖아요. 개인적으로 그렌저 HG나 IG 시절의 그 정도 크기가 딱 적당한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덩치를 키울 필요는 없지 싶어요.
이런 만족감에도 불구하고 효율까지 챙긴다는 게 하이브리드 모델의 진정한 매력이죠. 약 850km가량을 주행하며 기록한 평균 연비는 리터당 약 18km, 사실상 소형차급 연비로 시승 내내 스트레스 없이 주행한 것과 20인치에 달하는 대구경 휠이 장착된 것을 감안하면 정말이지 매력적인 수치입니다. 이 7세대 모델부터 하이브리드가 순수 내연기관의 판매량을 앞지른 지 오랜데, 잘 팔리는 데는 역시 이유가 있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역시나 가격이죠. 어느덧 4,000만 원을 우습게 넘겨버리고 제가 시승한 하이브리드 풀옵션 차량은 5,700만 원에 육박하니 새삼 놀랍습니다. 다시금 현대차의 플래그십 세단으로 포지션을 굳히면서 가격이 꽤나 올랐고 덕분에 많은 차량들이 스쳐 지나가는 가격이죠. 하지만 '이 예산에 이 정도 만족감을 선사할 수 있는가?'로 질문을 던져보면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편의성이나 연비, 차급, 브랜드 밸류 반드시 타협해야 하는 지점들이 생길 거예요. 제가 생각하는 대중 브랜드의 플래그십은 이동수단으로써 자동차에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갖춘 모델입니다. 크기면 크기, 성능이면 성능, 옵션이면 옵션, 어느 하나 충만하지 않은 게 없기 때문에 이 이상의 무언가를 원한다면 프리미엄의 영역으로 가야 하죠. 심지어 비슷한 가격의 프리미엄 모델을 이러한 이동수단의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오히려 대중 브랜드 모델 대비 만족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엔트리 라인업을 구매해야 하니까요.
전반적으로 7세대 그랜저 하이브리드는 마땅한 대안이 없는 가격대에 걸맞은 상품성을 충실하게 갖춘 모델이었습니다. 적당히 과하면서도 그렇다고 분에 넘치지는 않는 가장 한국적인 패밀리 세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마치 '국민 평수 34평 아파트'와 비슷하다 할까요?
외관에 대한 호불호와 출시 초 각종 결함으로 얼룩진 온라인상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역시 시장(판매량)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이 그랜저를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죠.
Copyright © 저작권 보호를 받는 본 콘텐츠는 카카오의 운영지침을 준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