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서가 지나고 문득문득 가을이 느껴진다.
치열하게 달려왔던 그라운드의 시간도 점점 저물어 가고 있다.
‘가을잔치’를 향한 여정의 막바지. 또 다른 그라운드에서도 ‘꿈의 무대’를 향한 간절한 질주가 이어지고 있다.
9월 17일 2026 KBO 신인드래프트가 진행된다.
기다림의 시간을 끝내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D데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시작이 아닌 끝이기도 한 잔인한 날이기도 하다.
프로의 문은 좁다. 1군이라는 무대는 더 좁다.
그곳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뛰고 있는 선수들에게도 모두 떨리는 시작이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가슴을 졸이고 있던 날, 드래프트를 통해 받는 지명 번호는 백넘버처럼 선수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지명 순서는 절대 번호는 아니지만 1군으로 가는 번호표 같은 것이다.
더 높은 순번을 받은 선수에 대한 기대감은 다르고, 구단은 높은 순번의 선수에 더 많은 공을 들인다.
그만큼 올 시즌 KIA ‘10번’의 활약이 더 눈부시다.
‘디펜딩 챔피언’의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2025시즌, 그나마 KIA 팬들을 웃게 하는 ‘10번’이 있다.
지난 27일 SSG와의 경기에서 길었던 팀의 6연패를 끊어낸 투타의 주역 성영탁과 김호령이다.

어느새 불펜의 듬직한 선수로 자리를 굳힌 성영탁은 0-0으로 맞선 8회말 팀의 3번째 투수로 나와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승리로 가는 발판을 마련해 줬다.
이날 경기에서는 볼넷을 하나 기록하기는 했지만 성영탁은 정교함으로 시원시원한 플레이를 하는 선수다.
1년의 기다림 끝에 올 시즌 정식 번호를 받으면서 ‘65번’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생긴 그는 37경기에 나와 42.2이닝을 책임지면서 1.90의 평균자책점을 찍고 있다.
데뷔 시즌, 성영탁은 붕괴 위기의 마운드를 지킨 보루다.
연장 11회 승부 끝에 4-2 승리로 6연패에서 탈출한 이날 김호령은 “내가 김호령이다”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9회말 2사 2루에서 안상현의 방망이가 움직인 순간 7연패를 생각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호령은 펜스까지 달려가서 끝내기 안타를 중견수 플라이로 바꿨다.
지난 시즌 수비에서도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서 김호령의 시대가 끝나는 것 같았지만, 김호령은 새로운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호수비 열전으로 팀을 구한 김호령은 이날 타석에서도 2개의 안타를 추가했다. 잠깐 스쳐 가는 바람이 아니었다.
뒤늦게 눈을 뜬 김호령의 타격 덕분에 팬들은 신인 타자의 타석처럼 김호령의 타석을 주목하고 있다.
10번의 기적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두 사람의 오늘은 과연 기적이었을까?
떨리는 가슴으로 신인드래프트를 준비하고 있을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성영탁과 김호령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강점으로 어필하라
그들이 프로에 입단해서 팀의 주전 선수로 뛰고 있는 과정은 기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야구 자체가 기적은 아니다. 성영탁은 배짱을 앞세운 정교함이 있었고, 김호령은 이견이 없는 수비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공 스피드를 우선 묻고, 타율과 홈런수를 먼저 확인하게 되는 분위기에서 이들은 매력 없는 선수였을 지도 모른다.
다양한 틀을 고루 갖춘 투수와 타자가 우선 선택을 받는 건 당연하다. 그게 ‘확률 싸움’에서 앞설 수 있는 선택일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10번이 됐고, 흔히 말하는 ‘로또픽’이 된 셈이다.
어찌 됐든 자신의 이름을 고민하게 만든 확실한 것 하나는 있었다.
KIA 김성호 스카우트는 “다른 팀들도 성영탁에 대한 관심은 있었다. 하지만 구속에 대한 염려가 있었다. 우리도 구속에 대한 의심은 있었지만 꾸준함이 있었다. 경기력이 되고 제구가 정말 좋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높게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김호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동국대 은사 이건열 감독도 “펑고를 치는 데 남들 어렵게 잡는 걸 쉽게 다 잡았다. 수비를 잘한다고 생각했다. 다리도 빠르고, 베이스 러닝은 요령이 없었지만 보완하면 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했다.
#약점을 성장 동력으로
남들이 쉽게 얻을 수 없는 강점은 있었지만, 약점도 명확했다.
아무리 좋은 제구를 가지고 있어도 프로 타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스피드가 필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수비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수비만 하는 것은 아니다. 타석에서 타자로도 역할을 해야 한다.
극명한 약점,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성장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들의 변화가 눈에 띄고, 더 극적인 이유다.
성영탁과 김호령에게는 시간과 프로의 시스템이 약이 됐다.
스피드에 집중한 성영탁은 “캐치볼 할 때부터 무조건 120%로 던져라”라는 이상화 퓨처스 투수 코치의 조언을 잘 따랐다.
프로의 체계적이고 집중력 있는 훈련을 바탕으로 프로 선수의 몸을 만든 성영탁은 스피드라는 답을 찾으면서 누구보다 눈에 띄게 성장한 선수가 됐다.
김호령에게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다. “그때 말 잘 들을 걸 그랬다”면서 김호령 스스로 인정한 자신의 고집이 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이건열 감독도 김호령의 타격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동국대 시절 김호령을 떠올린 이건열 감독은 “방망이 소질은 있는데, 허당은 아닌데 말을 잘 안들어”라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어 “방망이 힘이 있었다. 조금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워낙 수비는 잘하고, 대주자로서도 능력도 있었다. 프로에 가면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좋은 선수가 있다고 계속 어필을 했었다”고 돌아봤다.
나름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방향을 잡지 못했던 김호령은 올 시즌 이범호 감독의 조언을 바탕으로 가고 싶었던 길을 드디어 걷고 있다.

#선수는 그라운드 밖에서 완성된다
프로 선수의 꿈을 꾸는 선수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그라운드에서 좋은 결과만 내면 된다는 착각이다.
유튜브가 일상이 되면서 그라운드의 화려한 모습이 영상으로 더 부각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 보면서 화려한 기술과 플레이만 쫓다 보면 진짜 경쟁력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라운드의 결과는 그라운드 밖에서 만들어진다.
일단 선택을 받고, 기회를 얻어야 한다. 그게 먼저다. 스카우트와 지도자의 시선은 덕아웃으로도 향한다.
김성호 스카우트는 “10라운드라고 해도 구속이 140㎞를 넘지 않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밑에 라운드에서는 주력 좋은 선수 등 야수를 뽑는 경우가 더 많다”며 “구속에 대한 염려가 있었지만 성영탁의 덕아웃 모습이 남들과 달랐다. 착하고, 성실하고, 운동에 임하는 모습이 달랐다. 팀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싫은 내색이 없었다. 벤치에서 하는 행동이나 움직임들, 운동 능력치가 정말 좋았다”라고 성영탁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김호령도 그라운드 밖에서 지도자들의 마음을 잡았다. 나름의 고집에도 김호령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성실함, 야구에 대한 태도는 그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든 이유가 됐다.
프로 선수로 활약을 했고 프로와 아마추어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선수를 지켜본 이건열 감독의 조언 역시 실력과 방향성을 바탕으로 한 노력이다.
이건열 감독은 “호령이가 고집은 셌지만 착하다(웃음). 성실하고 능력이 있으니까 다들 애를 태우면서 옆에서 노력을 했다”며 “확실한 장점 하나는 어필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처음부터 다 갖추고 있는 그런 선수는 많지 않다. 단점만 보완하려고 하면 안 된다. 우선은 장점에 신경 써야 한다. 장점은 꾸준히 살리고, 단점은 훈련하면서 천천히 풀어가야 한다. 그러다 눈에 띄고 나중에 하나씩 체계적으로 시간을 갖고 하다 보면 성장하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바라는, 꽃이 되고 싶은 이들에게 성영탁과 김호령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꽃이 피는 시기는 저마다 다르다. 이들은 조금 더 늦게 피는 꽃이었다.
<광주일보 김여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