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노리갯감 전락 지긋지긋”…근육男들 격분에 모두 벌벌 떨었다, 무슨 일[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스파르타쿠스 편]

2024. 9. 14.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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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 121. 스파르타쿠스]
잔혹 환경 노출된 로마 검투사들
결국 반란 일으키고 로마에 칼끝
공화국 위협하며 돌풍 일으키다
배수의 진 최후 결전…승자 누구?
장 레옹 제롬, 갈리아 검투사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 '원조 맛집'입니다.


2년 5개월 넘게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등 기획을 선보이며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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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 앞에서 말을 죽였다
토마스 콜, The Course of Empire Destruction, 1836

"나의 형제들이여."

스파르타쿠스. 탄탄한 근육질의 이 사내가 칼을 뽑아들고 외쳤다. "우리가 곧 있을 전투에서 이긴다면, 이 말보다 좋은 녀석을 잔뜩 얻을 수 있을 것이오." 그는 함께 데려온 말을 가리키며 이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우리가 저 로마 놈들에게 맞서 진다면…. 다른 의미에서 더는 말 따위 필요하지 않을 것이오." 스파르타쿠스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칼자루를 똑바로 쥐었다. 그러고는, 고락을 함께한 군마를 죽여버렸다.

호세 아파리시오, 검투사들의 결투

기원전 71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은 로마 수석 법무관격인 크라수스의 정규군에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거듭 물러서다 못해 이탈리아반도의 장화 구석진 곳까지 온 상태였다. 스파르타쿠스는 이런 상황에서 애마를 베며 배수(背水)의 진(陣)을 친 격이었다.

"확실한 건, 우리가 다시 그들의 노리갯감이 될 일은 없을 것이오."

"과거로 돌아갈 바에는 차라리 죽겠소!" 스파르타쿠스의 말에 한 병사가 이렇게 외쳤다. 빼곡하게 몰린 반란군은 그 말에 정신이 든 듯 함성을 내질렀다. 이들은 창과 방패 따위의 끝을 땅에 마구 찧었다. 둥, 둥, 둥…. 돌과 모래만 가득한 전장이 거듭 울렸다. 우리가 죽어봤자 잃는 건 낙인뿐이지만, 우리가 살면… 세상 전부를 얻을 수 있다. 이들은 로마, 그 철옹성 같은 공화국에 반기를 든 순간부터 수만번씩 생각한 말을 또 되새겼다.

패리스 보르도네, 검투사들의 전투

말 그대로 그림 같은 전투였다.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스파르타쿠스와 베테랑 병사들은 묘기 부리듯 무기를 휘둘렀다. 글라디우스와 스쿠툼 방패를 든 정예군은 폴짝 날아 로마군의 급소만 정확히 그었다. 삼지창과 그물을 쥔 기습군은 주춤하는 로마군을 토끼몰이하듯 몰아붙였다. 암살대가 그 틈을 타넘고, 휘젓고, 흔들며 피를 흩뿌리게 했다. 어느덧 로마군의 머리 위로는 곤봉과 단검, 채찍의 끄트머리 따위가 춤추듯 날뛰었다. 각양각색 무기와 전투 방식, 혼을 쏙 빼놓는 퍼포먼스까지…. 전쟁의 귀신이 모인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나 크라수스의 로마군 또한 만만치 않았다.

저 멀리 언덕에서 이곳 전장까지 돌진하는 크라수스의 주력군은, 무엇보다도 숫자가 너무 많았다. 물량공세. 사실 크라수스가 앞서 스파르타쿠스에 맞서 몇 번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았던 이유 중 가장 큰 게 이것이었다. 반란군은 늘 그랬듯 기적처럼 잘 싸웠지만, 결국에는 또 밀릴 게 뻔해보였다. 스파르타쿠스는 더는 미룰 수 없는 최후 결전에 나서기로 했다. 그것은, 저 빼곡한 로마군을 뚫고 나가 크라수스 목에 칼을 찔러넣는 일이었다.

데니스 포야티에, 스파르타쿠스 [By Carole Raddato from FRANKFURT, Germany, Louvre MuseumUploaded by Marcus Cyron, CC BY-SA 2.0]
데니스 포야티에, 스파르타쿠스(일부 확대) [By Carole Raddato from FRANKFURT, Germany, Louvre MuseumUploaded by Marcus Cyron, CC BY-SA 2.0]

데니스 포야티에가 스파르타쿠스의 결연한 모습을 조각으로 빚었다.

언뜻 봐도 영웅의 자태다. 스파르타쿠스는 전쟁의 신 아레스만큼 훤칠하게, 반인반신의 장사 헤라클레스만큼 위풍당당하다. 이것만으로도 그가 당시 얼마나 전설적인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글대는 두 눈과 치켜올린 입술에선 결단력, 꽉 쥔 칼자루와 정면을 응시하는 태도에선 이를 뒷받침할 체력과 의지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크라수스를 향해 돌진할 것이오. 한 명만이라도 살아서 그를 베면 우리의 승리일 테요."

스파르타쿠스는 그를 따를 최후 돌격대를 짰다. 이들은 엉겨붙는 로마군을 털어내며 달렸다. 앞으로, 오직 앞으로. 내가 죽으면 뒤에 있는 누군가가 한발짝 더 갈 수 있다는 게 외려 감미롭고 감격스럽다는 듯. 누가 이번 전쟁에서 이겼을까. 아니, 애초 그 무렵 최강으로 꼽힌 로마군과 대등하게 맞선 스파르타쿠스와 반란군의 정체는 무엇일까.

‘역전의 용사’ 검투사 반란을 일으킨 이유
아메데 포레스티에, 검투사들의 전투 끝

스파르타쿠스는 로마 공화국의 검투사(Gladiator·글래디에이터)였다.

검투사란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채 상대 검투사와 대결하는 자를 의미한다. 기록상 기원전 264년에도 존재했던 이들은 주로 많은 이가 지켜보는 경기장에서 승부를 겨뤘다. 지는 순간 목숨을 잃는 일도 적지 않았기에, 모든 경기가 보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았다. 노예와 전쟁 포로, 자유민 중 하층민 등으로 이뤄진 검투사는 싸우는 게 직업이었다. 대부분은 소유주, 즉 주인의 부와 권력 과시를 위해 거듭 서로에게 칼을 겨눠야 하는 처지였다.

니콜라오 란두치, 검투사(콜로세움), 1850년경, 캔버스에 유채, 161.2x101.6cm

그리스 전기 작가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스파르타쿠스를 그리스 북부 트라키아 출신 검투사로 소개한다.

스파르타쿠스와 함께 반란에 나선 이들 또한 상당수는 검투사였다. 그러니까 대결, 특히나 일대일 데스매치(Deathmatch·누군가 한 명이 죽어야 끝이 나는 경기)에도 능한 싸움꾼 무리가 로마군과 맞선 격이었다. 그 시절 로마군과 비교적 대등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이유였다.

장 레옹 제롬, 엄지를 아래로, 1872, 캔버스에 유채, 96.5cm(높이), 피닉스 미술관

그렇다면 이러한 역전의 용사들은 왜 반란을 벌였을까.

그것은 로마 공화국이 검투사를 어떻게 봤는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로마 공화국의 검투사는 겉보기에는 화려한 삶을 살았다. 이들은 국가 최고위 집단과 수천, 수만명 시민이 몰린 경기장에 힘찬 박수를 받으며 입장했다. 피와 모래만이 있는 그곳에서 생을 다 바쳐 이기면, 장 레옹 제롬의 그림 〈엄지를 아래로〉 속 승자처럼 환성에 절여질 수 있었다. 패자를 깔아뭉개자 모든 이가 "죽여라!"를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린다. 그 순간 승리자가 만끽하는 도파민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했을 것이다. 잘 생기면, 실력이 좋으면, 유행(!)하는 무기를 들고 기막힌 퍼포먼스를 보이면 나라님에게도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잘나가는 검투사는 거대한 팬클럽도 거느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검투사는 없었다. 로마 공화국 시민은 검투사를 짐승, 즉 싸움닭 내지 경주마 응원하듯 할 뿐이었다. 검투사란 인기가 있어봤자 인기 있는 조랑말과 별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당장 내일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를.

프란체스코 네티, 식사 중 검투사 결투, 1880
프란체스코 네티, 식사 중 검투사 결투(일부 확대), 1880

실제로 검투사는 '사육'도 당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검투사 전문 관리인(판매상)이 있었다. 검투사 대부분은 이들 소유의 양성소에서 갇혀 살았다. 연습용 목검을 든 이들은 구르고, 또 구르는 게 일상이었다. 훈련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례가 이어질 만큼 강도는 가혹했다. 그렇게 막 다뤄진 검투사들이 막 쓰이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프란체스코 네티〈식사 중 검투사 결투〉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뚝 선 검투사, 그리고 그와 대결 중 일격을 맞고 끌려가는 또 다른 검투사가 있는 곳은 만찬장 앞이다. 고위층이 놀고먹는 환락의 공간이다. 이들은 검투사를 초청 가수 내지 서커스단으로 보는 것이다. 자기들 입맛을 돋우기 위해 서로 싸우게 한 것이다.

이긴 검투사는 여자들의 추파를 받고 있지만, 자세는 여전히 뻣뻣하다. 술 취해 쓰러진 귀족, 피를 쏟은 채 쓰러진 동료 검투사…. 두 장면을 번갈아 보는 그는, 마음속에서 위험한 불씨를 키우고 있는 건 아닐지.

하워드 파일, 로마의 검투사, 1911

스파르타쿠스가 그 불씨를 키우다 못해 터뜨리고 만 케이스였다.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를 못살게 굴기로 유명했던 렌툴루스 바티아투스 밑으로 들어갔다. 이탈리아 카푸아에 터를 잡은 바티아투스의 양성소는 매일 밤 검투사 시체가 쌓인다는 소문이 돌 만큼 악명이 자자했다. 한 기록에 따르면 당시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동료 검투사인 크릭서스가 종교 행사에서 인간 제물로 바쳐질 처지에 놓였다. 이기든, 지든 죽을 것을 안 스파르타쿠스는 크릭서스와 함께 난을 일으켰다. 기원전 73년, 여름. 한밤중 쇠꼬챙이를 든 스파르타쿠스 등 일흔네 명 검투사는 양성소의 무장 경비원부터 찔러 죽였다. 일대를 피바다로 만든 후 뛰어나간 이들은 곧장 마을의 무기고(혹은 무기를 실은 마차)를 습격해 무장할 수 있었다. 반란의 시작이었다.

‘일당백’ 반란군의 돌풍
검투사 모자이크, 1세기경

로마 공화국은 약탈 뒤 베수비오산에 숨어든 반란군을 산적처럼 대했다.

그래서 카푸아 민병대를 보냈지만, 파견하는 족족 격파당하고 말았다. 이들이 일당백의 싸움 능력과 경험을 갖고 있다는 걸 간과한 결과였다. 스파르타쿠스가 유명해지자 다른 지방의 검투사도 양성소에서 탈출하는 사례가 잦아졌다. 검투사 말고도 이들과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은 노예와 양치기 등도 속속 몰리고 있었다. 반란은 어느덧 단순한 검투사의 난이 아닌, 지배층을 향한 피지배층의 혁명으로 바뀌고 있었다.

뒤늦게 다급해진 로마 공화국은 법무관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에게 군사 3000명을 주고 제압을 명령했다. 하지만 숲속에서 기습 공격을 당한 글라베르군 또한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이번에는 법무관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가 군사 더 큰 규모의 군을 데리고 나섰지만, 그 또한 허둥지둥 물러서야 했다. 스파르타쿠스에게 얼마나 크게 허가 찔렸는지, 바리니우스의 부관이 목욕 중 습격을 받고 벌거벗은 채 겨우 도망쳤다는 설도 있다.

조반니 란프란코, 연회장에서의 검투사들, 1638, 캔버스에 유채, 232x355cm, 프라도 미술관

카푸아에서 돌풍을 일으킨 스파르타쿠스 군은 이 과정에서 반도의 남부 도시를 하나씩 손에 넣었다.

때마침 로마 공화국의 진짜 주력군은 타지방으로 원정을 떠나 있었기에, 이들 입장에선 더더욱 무서울 게 없었다. 연전연승을 기록한 스파르타쿠스는 모든 힘 없는 자들의 영웅이 되고 있었다. 반란을 일으킨 그해 겨울 스파르타쿠스 휘하에는 최소 7만명이 있었다는 말도 있다.

안드레스 파를라데, 수호자 헤라클레스에게 무기를 바치는 승리한 검투사

병사 훈련으로 전열을 가다듬은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72년 봄부터 북쪽을 향해 진격했다.

산적 떼로 보던 무리에게 도시를 줄줄이 내준 로마 공화국은 이번 해 안에는 스파르타쿠스를 무조건 잡아 죽이기로 뜻을 모았다. 로마 공화국은 집정관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루키우스 겔리우스에게 각각 2개 군단씩 4개 군단 지휘권을 줬다. 반란 진압을 위해 이렇게까지 힘을 주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쯤 스파르타쿠스 또한 군을 두 갈래로 나누고 있었다. 그의 직속군 4만명가량, 부대장 격이었던 크릭서스의 군 3만명가량 등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렌툴루스군과 맞붙은 스파르타쿠스군은 고지대를 선점해 압승을 일궜다. 하지만 겔리우스군과 대치한 크릭서스군은 치열한 접전 끝에 지고 말았다. 크릭서스 또한 그 현장에서 전사했다. 다만, 겔리우스군 또한 이 과정에서 큰 내상을 입었다. 두 집정관은 전투 직후 지휘관직을 내려놓았다고 한다. 검투사 무리가 기어코 공화국 최고위직에 있던 두 사람을 날린 격이었다.

“로마 놈에게 당한 만큼 돌려주자”
장 레옹 제롬, 황제 만세!(죽어가는 우리가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1859, 캔버스에 유채, 93.1x145.4cm, 예일대 미술관

"그 자리에 직접 서보니 어때?"

"울지만 말고 칼을 휘둘러봐!"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은 붙잡은 로마 정규군 300여명을 불러 모아 검투사 경기를 벌였다. 이들의 또 다른 지도자였던 크릭서스가 죽은 데 따른 일종의 추모 행사였다. 원래는 레옹의 그림 〈황제 만세!〉처럼 검투사가 수뇌부와 시민에게 인사를 올려야 했다. 두 발로 걸어나가든, 사경을 헤매며 끌려나가든 이 경기를 마련해준 모든 이들에게 형식적으로나마 경의를 표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 관계 역전이 이뤄졌다. 그러니까, 검투사가 수뇌부 역할을 한 격이었다. 서로를 죽여야하는 포로들은 인사는커녕 겁에 질린 채 덜덜 떨고만 있었다고 한다. 반란군은 그런 모습을 대놓고 조롱했다. "너희가 우리한테 시켰던 것처럼, 이렇게 해보란 말이야!" 몇몇 병사는 포로의 칼을 빼앗아 보란 듯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피와 눈물은 그렇게 모래 위로 또 흩뿌려졌다.

에드윈 블래시필드, 검투사 선두에서 경기장을 떠나는 황제 코모두스

반란군은 이처럼 로마 공화국, 그리고 보통 신분 이상의 로마 시민을 깊이 미워했다.

막상 싸워보니 별것 아닌 녀석들이 우리에게 그런 짓거리를 강요한 데 대해 증오와 울분은 더욱 커지기만 했다.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산맥을 넘고 트라키아로 빠져나가 자유를 얻는 것. 스파르타쿠스군이 이 목표를 접고 돌연 반대로 남하(南下)를 택한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저 로마 놈에게 우리가 당한 만큼 돌려주자"는 목소리가 너무 커져 전략을 바꿨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 무렵, 로마 공화국.

수뇌부는 감히 반란군이 자기들을 흉내내 검투사 경기를 주최했다는 데 대해 부글부글 끓었다. 이에 당시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카드를 쥐었다. 이들은 수석 법무관 격이자 공화국 최고 부자였던 크라수스에게 지휘권을 주고 반란군 박멸을 주문했다. 예상대로였다. 명성에 목마른 크라수스는 두툼한 주머니를 풀어 다시 6개 군단급의 수만명 병사를 모았다. 크라수스 자체의 군사 재능은 특출나지 않았지만, 그는 이 약점을 막대한 돈으로 채우고 있었다.

이 와중에 스파르타쿠스군은 나름대로 분투를 이어갔다. 하지만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 있던 크라수스의 로마군은 반란군을 착실히 구석으로 몰고 있었다. 반란군에 아무리 역전의 용사가 가득한들, 이들도 인간이기에 지쳐가고 있었다.

외젠 들라크루아, 콜로세움의 검투사, 1863, 캔버스에 유채, 50x68cm

그렇게 최후의 결전을 앞둔 무렵, 크라수스 또한 나름의 승부수를 띄웠다.

크라수스는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도망친 병사를 한데 모았다. 그리고, 로마사상 최악의 군 징계로 거론되는 데키마티오(decimatio)를 단행했다. 이른바 10분의 1형이었다. 먼저 병사를 열 명씩 나눈다. 이들에게 각각 제비를 뽑게 한다. 딱 하나의 제비만 다르다. 나머지 아홉 명은, 문제의 제비를 뽑은 이를 돌과 채찍 따위로 찍어 죽인다. 즉, 90%의 전우가 10%의 전우를 죽여야 했다. 매우 흉악한 형벌인 만큼 모두가 존재를 알고도 쉬쉬해왔지만, 크라수스가 이를 건져올려 강행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결전 전 규율을 바로잡으려고 했다.

이는 당시 로마 공화국이 반란군을 얼마나 심각하게 봤는지를 방증한다. 그렇게 스파르타쿠스와 크라수스는 각자 배수의 진을 친 채 실라루스 강 인근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그는 임페라토르처럼 싸웠다”
프란스 플로리스, Wrestling beasts in the Coliseum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돌격대는 로마군을 볏짚 베듯 썰었다.

이들은 끊김없이 칼부림을 이어갔다. 적의 시신을 밟고 팔을 뻗는 모습은 마치 칼춤의 한 장면 같았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는 동료의 희생 덕에 크라수스 바로 앞까지 갈 수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를 호위하는 위관급의 백인대장 둘도 처단했다.

하지만 그 순간 승리의 여신은 스파르타쿠스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스파르타쿠스는 적이 날린 단검(혹은 화살)에 허벅지가 깊이 찔렸다. 쓰러진 그는 크라수스에게 기어가 일격을 가하려고 했지만, 이미 적에게 빼곡히 둘러싸인 상태였다. 그는 방패에 기대 상체를 세운 뒤 거듭 창을 휘둘렀다. 자기 팔이 찔리고, 발이 찔리고, 어깨와 등이 찔릴 때까지 계속.

헤르만 포겔, 스파르타쿠스의 죽음, 1882

헤르만 포겔이 이 장면을 상상해 삽화로 그렸다.

겨우 몸을 일으킨 후 상대 복부에 창을 찔러넣는 사내. 스파르타쿠스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반란군의 수장이지만, 그림 속 스파르타쿠스는 마지막 순간에도 결기를 잃지 않는 영웅처럼 보인다. 그를 부축하고자 하는 흑인 병사 또한 검투사 혹은 하층민일 터였다. 완전무장한 채 몰려오는 크라수스의 로마군은 외려 생동감 없는 악당처럼 묘사됐다. "스파르타쿠스는 최전선에서 임페라토르(Imperator·로마 최고 사령관)처럼 용맹하게 싸우다 쓰러졌다." 역사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플로루스는 스파르타쿠스의 최후를 이렇게 썼다. 일개 검투사가 사실상 왕처럼 싸우다 죽었다는 평을 받은 것이다. 다른 역사가들도 "검투사의 지휘를 받은 병사들도 용감히 싸우고, 전사답게 죽어갔다"는 식의 찬사를 남겼다.

장 시몽 베르텔레미, 검투사의 죽음, 1773년, 캔버스에 유채, 102.2x135.8cm, 로스앤젤레스 미술관

승자는 크라수스였다.

스파르타쿠스는 그날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장 자체가 아수라장이었던 만큼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크라수스는 이번 최후의 결전에서 포로만 6000명 이상을 잡았다. 크라수스는 한풀이하듯 이들에게 또 다른 최악의 형벌을 내렸다. 십자가형이었다. 포로들은 로마에서 카푸아로 이르는 가도 양편에 세워진 십자가에 산채로 줄줄이 못 박혔다. 사형수가 된 반란군은 병사와 시민, 날짐승이 보는 앞에서 서서히 죽어갔다. 그럼에도 이렇게 숨을 거두는 게 더 낫다는 양, 이들은 로마를 향해 침을 뱉고 조롱을 이어갔다고 한다. 로마 공화국은 스파르타쿠스의 악몽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키케로도 스파르타쿠스를 언급한 적 있다. 스파르타쿠스라는 말 자체가 정적의 대명사격으로 쓰이기도 했다. 훗날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놓고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평을 했다.

데니스 포야티에(Denis Foyatier·1793~1863)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조각가. 에콜 드 보자르(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출신이다. 젊은 시절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랐는데, 그때 작업한 스파르타쿠스의 석고상으로 일약 유명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프랑스 왕이 직접 이 작품을 대리석으로 다시 만들라고 했을 정도. 파리 18구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대표작은 〈잔 다르크〉 등.
장 레옹 제롬(Jean-Léon Gérôme·1824~1904)
프랑스 출신의 화가 겸 조각가인 제롬은 당대 가장 유명한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신고전주의 화풍을 고집한 그는 정확한 배경 설정, 조각같은 인체 묘사 등을 장기로 이름을 알렸다. 이 실력으로 영국 왕립아카데미 회원, 프랑스학회 회원에 들고 조국 최고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았다. 그를 따르는 제자만 해도 2000명이 넘었다. 그런 그는 인상파에 밀려 역사에서 한발 물러났다는 평을 받는다. 대표작은 〈닭싸움을 붙이는 젊은 그리스인들〉, 〈법정의 프리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등.
헤르만 포겔(Hermann Vogel·1854~1921)
독일 출신의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촘촘한 구성과 유머러스한 표현 등으로 동시대 큰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 잡지 '르 히흐'(Le rire)에 삽화를 기고해 이름을 알린 그는 어린이 그림책과 청소년을 위한 신문 등에도 여러 그림을 실었다. 후에는 프랑스의 권위있는 전시회 살롱 데 자르티스트 프랑스의 회원이자 심사위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참고 자료〉

스파르타쿠스, 하워드 패스트, 미래인

로마 검투사의 일생, 배은숙, 글항아리

SPARTACUS, Starz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플루타르코스, 을유문화사

장 레옹 제롬, 갈리아 검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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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문학적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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