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GOUT Monthly] 콩콩팥팥

‘가정의 달’ 5월. 특히 어린이날엔 전국 각지의 행사장이 부모님의 손을 잡고 나들이를 나온 아이들의 활기찬 웃음소리로 가득 차곤 한다. 일 년 중 가장 설레는 날을 맞이한 어린이들에게 이날은 단순한 휴일이 아니라, 평소 꿈꿔 왔던 세상을 직접 눈에 담고 마음껏 뛰어놀며 잊지 못할 기억을 쌓는 소중한 시간이다. 화창한 봄볕 아래 줄을 지어 이동하는 가족들의 모습과 광장을 메운 북적이는 인파는 가정의 달 특유의 따뜻하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가감 없이 보여 준다. 나아가 오늘 야구장에서 목소리 높여 응원가를 따라 부르는 어린이들의 열정은 머지않은 미래, 그라운드의 풍경을 바꾸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어린 시절 유니폼을 입고 꿈을 키우던 소위 ‘○린이’들은 어느덧 꿈을 이룬 어른으로 성장해, 자신이 동경하던 팀의 유니폼을 입는 낭만의 서사를, 혹은 가장 사랑했던 팀을 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얄궂은 운명의 서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3월 25일 작성)

에디터 이지인 사진 삼성 라이온즈, KIA 타이거즈, SSG 랜더스

스포츠가 인기를 얻기 위해선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 팬들이 즐길 거리를 늘리고, 세련된 브랜딩으로 이들의 접근성을 높인다. 하지만 결국은 스포츠라는 드라마의 본질을 관통하는 가장 단순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바로 ‘성적’과 ‘스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뤄 전국이 들썩였을 때 수많은 어린이가 축구 선수를 꿈꿨고, 김연아가 전 세계 빙판을 제 무대로 만들었을 때 ‘연아 키즈’라는 별명을 단 피겨 스케이팅 유망주들이 탄생했다.

실제로 한국 야구계에도 이런 대약진의 시기가 있었으니, 바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다. 당시 대표팀이 금메달을 따는 걸 본 초·중학생이 어느새 프로에 진출해 당당히 그라운드를 휘젓고 있다. 단순히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이룬 것을 넘어, 어린 시절 우상과 함께 플레이하는 꿈만 같은 순간을 마주한 이들. 동경하던 전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진정한 ‘성덕’으로 거듭난 선수들을 만나 보자.

#내가 바로

LG 트윈스 임찬규 (2011 드래프트 1차 지명)
LG 마운드에는 팀을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던 소년이 서 있다. 바로 ‘성덕의 교과서’라 불리는 임찬규다. 그의 야구 인생은 잠실야구장 관중석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시절 임찬규는 유니폼을 입고 관중석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부르던 열혈 ‘엘린이’였다.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LG가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다는 아쉬움과 속상함에 등교를 거부했던 일화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다. 그런 그가 선수로서 LG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게 됐을 때의 기쁨은 말로 다 하지 못했을 테다.

임찬규의 서사가 정점에 달한 건 2023년, 팀이 29년 만의 통합 우승을 일궈 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어린 시절 관중석에서 LG의 우승을 간절히 바랐던 꼬마 팬이 이제는 팀을 이끄는 선발 투수이자 후배를 아우르는 투수 조장으로서 직접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것이다. 우승 직후 감격에 젖어 팀을 향한 애정을 쏟아 내는 모습은 팬심이 단순한 동경을 넘어 한 팀의 역사를 지탱하는 거대한 힘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제 임찬규는 자신을 보며 야구선수를 꿈꾸는 수많은 ‘엘린이’들에게 포기하지 않으면 꿈은 현실이 된다는 것을 화려하게 보여 주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로 남고 있다.

KIA 타이거즈 이의리 (2021 드래프트 1차 지명)
KIA에는 연고지 광주가 길러 낸 ‘로컬 보이’ 이의리가 있다. 광주충장중과 광주일고를 거쳐 차근차근 성장한 그는 2021년 1차 지명으로 입단할 당시부터 미래를 책임질 재목으로 손꼽혔다. KBO리그 최다 우승팀의 연고 선수로서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KIA를 응원해 왔을 이의리의 과거사(?)가 주목받은 건, 다름 아닌 한 네티즌이 과거 중계 영상에 잡힌 소년 시절 그의 모습을 찾아내면서부터다. 과거 2014년 9월 9일 광주에서 열린 LG와 KIA의 경기 중 관중석에 앳된 이의리의 모습이 포착됐고, 당시 그라운드에는 데뷔 후 처음으로 선발 출장한 박찬호(현 두산 베어스)가 있었다. 훗날 프로가 돼 동경하던 선배와 함께 팀의 승리를 책임지는 선수로 성장한 스토리는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박찬호는 FA로 이적했고, 이의리는 토미 존 수술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왔다. 이의리가 재활을 마치고 다시 마운드로 돌아온 지금, 박찬호와 이의리는 맞대결을 펼쳐야 하는 관계가 됐다. 그러나 어린 시절 관중석에서 품었던 마음이 마운드 위 현실이 됐듯, 시련을 이겨 낸 이의리는 에이스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내고 있다. 부상을 털어 내고 다시 시작된 그의 야구 인생은, 이제 챔피언스필드를 찾는 수많은 ‘갸린이’들에게 또 다른 확실한 내일을 보여 주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삼성 라이온즈 원태인 (2019 드래프트 1차 지명)
삼성은 이미 20년 전부터 예견된 에이스를 보유한 팀이다. 2005년, 대구 시민야구장의 투수판 위에 올라 고사리 같은 손으로 시구를 하던 여섯 살 꼬마가 현재 사자 군단의 주축인 원태인이기 때문이다. 삼성의 지명을 받았던 아버지 원민구 감독 아래서 자란 원태인은 누구보다 열렬한 ‘푸른 피’의 골수팬이었다. 대구에서 나고 자라며 삼성의 왕조 시절을 관중석에서 지켜봤던 소년에게 라이온즈의 푸른 유니폼은 언젠가 반드시 입고 싶다는 욕심이 들게 만드는 대상이었다.

이제 원태인은 삼성을 넘어 대한민국 야구를 대표하는 에이스로 거듭났다. 그의 존재감은 태극마크를 달았을 때 더욱 빛을 발했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과 아시안게임, 프리미어12 등 굵직한 국제 대회마다 위기 상황에서 상대 타선을 제압하며 ‘대한민국 최고 투수’로서의 무게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봉과 완투를 넘나들며 경기를 책임지는 원태인의 야구 인생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매 시즌 자신의 한계를 깨부수며 한국야구의 거대한 산맥이 돼 가고 있는 그이기에, 그가 앞으로 써 내려갈 기록이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역사가 되길 기대한다.

#두린이의 역습

2000년대 후반 프로야구가 부흥기를 맞이했을 무렵, 당시 두산 베어스의 화끈한 공격 야구와 끈질긴 허슬 플레이는 수많은 어린이 팬, ‘두린이’들을 양산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잠실의 함성을 자양분 삼아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던 소년들이, 이제는 시간이 흘러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고 마음속 ‘친정팀’ 격인 두산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KIA 타이거즈의 좌완 파이어볼러 김범수다. 그는 야구계에서 정평이 난 ‘모태 두린이’ 출신이다. 한때는 관중석에서 선배들의 이름을 연호하던 소년이었지만, 이제는 150km/h가 넘는 강속구를 앞세워 자신이 동경하던 팀의 타자들을 돌려세워야 하는 상황이 됐다.

KT 위즈의 소형준 역시 수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두산 베어스의 어린이 회원으로 활동하며 투수의 꿈을 키운 바 있다. 그는 2021년 포스트 시즌에서 상대 팀으로 마주한 두산의 가을야구를 지켜보며 “내가 이래서 어렸을 때 두산을 좋아했구나, 역시 강팀이라는 생각을 했다”라는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KT가 있었다면 당연히 KT 팬이었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이제는 자신이 몸담은 팀의 에이스가 돼 과거의 우상들을 직접 무너뜨려야 하는 존재로 변모했다.

그뿐만 아니라 NC 다이노스의 안방마님 김형준 또한 두산의 경기를 보며 야구의 재미를 배웠으며, SSG 랜더스의 뒷문을 책임지는 조병현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은 각각 창원과 인천에서 자신이 응원하던 팀에게 패배를 선사하는 얄궂은 상황을 매 경기 연출하고 있다.

이처럼 전국 각지로 흩어진 ‘두린이’ 출신 선수들에게 베어스는 야구를 시작하게 해 준 첫사랑이자, 넘어서야만 진정한 프로로 거듭날 수 있는 거대한 벽이다. 관중석의 꼬마들이 그라운드의 주인공으로 성장해 각자의 팀에서 서사를 써 내려가는 이 과정이야말로, 스포츠가 줄 수 있는 가장 세련된 아이러니이자 아름다운 성장 드라마일 것이다.

#전국의 쓱린이

한편, 인천 야구의 전성기를 보고 자란 ‘쓱린이’들이 각 팀의 핵심 전력이 돼 어렸을 적 응원팀에게 아픔을 안기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들은 문학야구장의 뜨거운 함성을 기억하며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지만, 이제는 각기 다른 유니폼을 입고 자신이 동경하던 선배들과 진검승부를 벌이는 중이다.

2024년 두산 베어스의 새로운 수호신으로 떠오른 김택연은 인천 출신으로 문학야구장을 자신의 집처럼 드나들던 열혈 팬이었다. 당시 SK 와이번스(현 SSG 랜더스)의 전성기를 지켜보며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던 그는 김광현의 투구를 보며 마운드 위의 평정심을 배웠다고. 이후 그는 데뷔 첫해부터 두산의 마무리 투수 자리를 꿰차며, 응원했던 SSG 랜더스 소속 선배들을 상대로 매서운 공을 뿌리는 ‘잠실의 수호신’으로 거듭났다.

이 외에도 삼성의 내야를 책임지는 이재현과 김영웅 또한 인천 야구가 키워 낸 ‘쓱린이’ 동기들이며, 등번호마저 김광현을 따라 29번을 단 LG 트윈스 손주영도 어렸을 적 ‘진성 쓱린이’였다고 밝힌 바 있다. 거기다 KT 위즈의 마무리 투수 박영현과 2025년에 새로 합류한 오원석 역시 인천 야구의 자부심을 먹고 자란 이들이다. 오원석의 경우는 실제로 SK와 SSG의 유니폼을 입기도 했으나, 현재는 트레이드를 통해 KT의 유니폼을 입고 친정팀을 상대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도 곧

비교적 최근 창단된 키움 히어로즈, KT 위즈, NC 다이노스의 어린이 팬 출신이 프로 무대에서 활약하는 사례는 아직 드물다. 하지만 반짝이는 신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KT 위즈는 KBO리그의 막내 구단이지만, 빠르게 1군에 정착하며 연고지인 수원과 그 일대의 어린이들의 마음을 홀렸다. 그중에서 돋보이는 사례는 올해 개막전에서 일약 스타로 떠오른 내야수 이강민. 그는 2016년 어린이날 행사 당시 수원KT위즈파크를 찾아 구단 프로그램에도 출연한 적이 있는 ‘케린이’였으며, 그 모습은 유튜브 채널을 통해 박제되기도 했다. 비교적 역사가 길지 않은 탓에 그동안 ‘케린이’ 출신 선수가 별로 없었던 KT이기에, 이강민은 실로 의미가 있는 성공 사례가 될 듯.

키움 히어로즈의 내야수 박한결은 팀의 역사가 곧 자신의 성장사와 일치하는 사례다. 그는 본지 170호(25년 6월 호)에 출연했을 당시 말했던 것처럼, 영웅 군단의 핵심 선수였던 김혜성(LA 다저스)을 자신의 롤 모델이자 우상으로 꼽아온 ‘큠린이’다. 아직 프로에 입단한 뒤 타격에서 뚜렷한 결과를 만들지는 못했으나, 키움의 새로운 2루수로서 건실하고 탄탄한 수비를 연일 보여 주고 있다. 키움 팬들로서는 ‘큠린이’ 출신 박한결이 메이저리그 진출로 잠시 비워진 김혜성을 잇는 새로운 핵심 내야수로 성장하길 바랄 테다.

NC 다이노스의 연고지 창원에서 성장한 신인들의 사례 역시 팬심과 소속팀 사이의 엇갈린 인연을 보여 준다. 2026 드래프트에서 NC의 선택을 받은 내야수 김건은 어린 시절부터 NC 유니폼을 입고 야구장을 누비던 ‘엔린이’ 출신으로, 마침내 동경하던 공룡 군단의 일원이 돼 꿈을 이뤘다. 반면 창원이 키워 낸 인재 이율예와 김주오의 행보는 달랐다. 어린 시절 NC를 열렬히 응원했던 이들은 각각 차세대 문학의 안방마님과 잠실의 거포로 낙점받았고, 이제는 NC를 적으로 마주하며 고향을 방문하게 됐다.

#운명은 흐른다

팬심과 운명이 엇갈린 사례는 트레이드 시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SSG 랜더스의 김민은 학생 시절, 수원을 연고로 하는 신생팀이 창단된다는 소식에 반드시 그 팀에 가겠다고 다짐했을 만큼 연고 팀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선수다. 실제로 그는 2018년 KT로부터 1차 지명을 받으며 그 꿈을 이뤘으나, 최근 트레이드를 통해 인천에 새 둥지를 틀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야구에 입문한 계기가 이제는 동료가 된 최정이라는 사실이다. 아들을 최정처럼 키우고 싶었던 부모님의 뜻에 따라 김민은 최정이 졸업한 평촌중, 유신고에 똑같이 진학하며 야구를 시작했고, 어느덧 자신이 동경하던 대선배와 한 팀에서 뛰며 한때 제일 애정을 가졌던 친정팀을 상대해야 하는 운명을 마주하게 됐다.

특정 야구팀을 가슴에 품게 되는 계기는 저마다 다양하다. 부모님 손에 이끌려 마치 모태신앙처럼 응원팀이 대물림되고, 나고 자란 지역 연고 팀의 공기에 자연스레 스며들며, 우연히 마주한 경기나 선수에게 마음을 뺏겨 평생을 약속하기도 한다.

야구를 사랑하는 유년기를 보낸 소년들이 이제는 스스로 우상이 되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과거의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의 응원을 등에 업은 만큼 그라운드 위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 주는 건 물론, 타의 모범이 돼 주길 바라 본다. 무엇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기사는 더그아웃 매거진 2026년 181호 (5월 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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