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조 9천억 원 규모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두고 한국 항공업계의 양대 산맥이 맞붙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론만큼 중요하게 부각된 '전자전'의 핵심 무기인 전자전기 개발 사업에 대한항공과 KAI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한 달에 1만 대의 드론을 잃는 이유도 대부분 러시아의 전자전 공격 때문이라고 하죠.
이제 전쟁은 총과 미사일뿐만 아니라 전자기파를 지배하는 쪽이 승리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우리나라도 2030년대 중반부터 자체 전자전 능력을 갖추기 위한 야심찬 계획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군은 전자전 분야에서 주한미군에 의존해왔지만, 이제 자립적인 전자전 수행 능력을 갖추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과연 이 중요한 사업의 주인공은 누가 될까요?
전자전이 현대 전쟁의 핵심이 된 이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 넘게 장기화되면서 전자전의 중요성이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양국 모두 드론으로 정찰하고 공격하지만, 동시에 상대방의 드론을 막기 위한 전자전에 더욱 집중하고 있죠.
전자전은 무선통신과 레이더가 군사적으로 활용되면서 탄생했습니다.
걸프전 이후 첨단 무기가 대세로 떠오르면서 센서와 GPS를 기반으로 하는 전자전도 주류가 됐죠.
전자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적의 전자파 사용을 무력화하는 전자공격(EA), 적의 전파방해에 대응하는 전자방어(EP), 그리고 적의 전파정보를 입수하는 전자지원(ES)입니다.
특히 공중에서 펼쳐지는 전자전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전파는 직선으로 가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수행할수록 가장 넓은 영역을 커버할 수 있거든요.
아군 전투기가 적의 레이더나 지대공 미사일 포대를 무력화하기 위한 전자전을 걸면, 적도 전자전으로 맞서면서 보이지 않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주한미군 의존에서 자립으로
그동안 우리 공군은 전자전기가 없어 한미연합연습 때마다 미 해·공군에게 지원을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 공군이 운용하는 'ALQ-165 ASPJ'나 'ALQ-200K' 같은 전자전 포드도 있지만, 출력이 작아 전투기 자체 방어용에 그치는 실정이었죠.

이런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것이 바로 전자전기(블록-I) 개발 사업입니다.
1조 9206억 원이 투입되는 이 사업은 올해부터 2034년까지 진행됩니다. 한국형 '그라울러' 전자전기를 확보하겠다는 것이죠.
다만 미국 해군의 F/A-18 기반 근접지원 전자전기 그라울러와는 다른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비즈니스 여객기 기체를 활용한 원거리 전자전기(Stand-off jammer) 형태로 개발할 계획입니다. 이를 통해 총 4대의 전자전기가 개발되어 공군에 인도될 예정입니다.
대한항공과 KAI의 치열한 맞대결
이번 사업의 핵심은 체계통합과 항공기 기체 개조·제작 분야입니다.
여기에 대한항공과 KAI가 치열한 수주 경쟁에 나섰죠.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각각 전자전 장비 개발사와 손을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업계에서는 대한항공이 LIG넥스원과, KAI가 한화시스템과 손잡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두 회사 모두 캐나다 항공기 제조업체 봄바르디어의 최신 기종 비즈니스 제트기 '글로벌6500'(G6500)을 개조해 전자전기 기체로 사용할 계획입니다.

같은 플랫폼을 두고 누가 더 나은 시스템 통합 능력을 보여줄지가 관건이 되겠네요.
대한항공 관계자는 "2022년 L3해리스와 항공통제기 분야 사업 협력 계약을 체결하는 등 특수임무기 경험이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습니다.
반면 KAI 관계자는 "국내 유일의 항공기 플랫폼 개발업체로 항공기 체계종합 기술력이 가장 앞선다"며 맞불을 놓았죠.
비즈니스 제트기를 선택한 이유
왜 전투기나 수송기가 아닌 비즈니스 제트기를 선택했을까요? 여기에는 실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전자전 외에도 조기경보나 지휘통제, 정보전 등 다양한 임무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처럼 다수의 전자전기를 운용할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소수의 기체를 다양하게 사용하는 전력화가 필요합니다.
다양한 임무에 투입하려면 많은 장비를 탑재하고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플랫폼이 필수적이죠.
고속으로 장거리를 비행하는 비즈니스 제트기가 바로 이런 조건을 충족합니다.
실제로 C-130 등의 터보프롭 수송기보다 비행고도가 훨씬 높고 항속거리도 길어서 공중 광역 전자전과 정보전이 가능합니다.
이런 이유로 미 공군도 신형 전자전기로 걸프스트림 G550 비즈니스 제트기 기반의 'EC-37B'를 선정했죠.
작전거리가 기존 EC-130H의 3000㎞보다 훨씬 늘어난 1만㎞에 달합니다.
전자전기의 놀라운 성능
군이 제시한 전자전기의 성능요구조건을 보면 전파방해 가능거리가 250㎞로 설정되어 있어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전자전기 5~6대가 공격 편대로 배치될 경우 북한 평양의 방공망 등을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는 성능입니다.
평시에는 주변국의 위협신호를 수집해 분석하고, 전시에는 전자공격을 통해 적의 통합방공망과 무선지휘통신체계를 마비시켜 교란하는 역할을 합니다.
적군의 통신·레이더 전파 정보를 수집하고 원거리에서 전자전으로 무력화하는 전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죠.
실제로 미군의 C-130 수송기를 개조한 'EC-130H'는 2016년 중동에서 이슬람 무장단체 ISIS의 드론을 재머로 격추한 바 있습니다.

별명이 '컴패스 콜(Compass Call)'인 이 전자전기의 성과를 보면, 현대전에서 전자전기의 중요성을 알 수 있죠.
미래 전자전의 방향
이번에 추진하는 전자전기(블록-I) 사업에서는 우선 2대를 블록-I 기본형으로 제작하고, 나머지 2대는 성능이 향상된 블록-II로 개발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외국산 비즈니스 제트기에 국산 전자장비를 탑재해 체계통합하는 형태죠.
일각에서는 국산 전투기인 KF-21에 전자전 포드와 대레이더 유도미사일을 단 에스코트 전자전기 KF-21G도 함께 갖춰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미래의 이야기라고 봐야겠죠.
스탠드오프 전자전기는 미국뿐만 아니라 러시아, 중국, 일본, 프랑스 등 많은 군사강국이 선택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방사청은 이달 말 입찰 공고를 내고, 올해 말 계약을 체결할 예정입니다. 과연 대한항공과 KAI 중 누가 이 중요한 사업의 주도권을 잡게 될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