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다가 사라지는 슬라이더
9회 말이다. 승부는 여전히 팽팽하다. 스코어 2-2. 퇴근 시간을 종잡기 어렵다. (23일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 한화 이글스 – 두산 베어스)
원정 팀은 이미 마무리를 투입했다. 요즘 잘 나가는 이영하다. 벌써 8회 2사 후에 등판했다. 4아웃 투구를 향해 순항 중이다.
일단 슬라이더가 막강하다. 빠르기는 135~140km 정도다. 하지만 꺾임이 절묘하다. 직접 겪은 타자들이 하는 말이다. “오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그런 느낌이다.
앞선 8회에 예고편이 있다. 2사 1, 2루의 찬스였다. 타석은 묵이베츠(황영묵)다.
카운트 2-2의 실랑이가 벌어진다. 나름 잘 버틴다. 파울 3개를 걷어낸다. 하지만 결국 무너진다. 7구째 승부구는 역시 슬라이더다. 136km짜리가 가장 멀고, 높은 존에 걸친다. 손도 내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9회도 마찬가지다. 이도윤은 4구 만에 백기를 든다. 직구→슬라이더→직구→슬라이더. 지그재그 조합에 꼼짝 못 한다. 헛스윙 삼진이다.
다음은 요나단 페라자다. 역시 전가의 보도를 휘두른다. 거듭된 슬라이더 공략이다.
그런데 요행수가 작용한다. 2구째가 배트 끝에 걸린다. 어정쩡한 타구가 3루수 키를 넘는다. 선상에 떨어지는 2루타가 된다.
이제 단타 하나면 끝난다. 관중석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수비 쪽은 진정이 필요하다. 포수가 타임을 건다. 마운드 미팅이다.
타석에는 문현빈이다. 갑자기 볼배합이 바뀐다. 1~2구가 연속 빠른 볼이다. 그러나 배트가 못 따라간다. 파울, 헛스윙으로 카운트가 몰린다.
SBS Sports가 이 경기를 중계했다. 이순철 해설위원의 말이다.
“이영하 투수는 여기서 문현빈 타자를 잡고 가야 한다. 그래야 2사 2루에서 다음 타자를 선택할 수 있다. 강백호와 그냥 할지, 아니면 노시환을 상대할지.”
그걸 모를 리 없다. 곧바로 3구째에 결정구가 온다. 예의 슬라이더다. 떨어지는 유인구, 이른바 ‘떨공’이다. 배트가 참지 못한다. 하프 스윙, 삼진으로 처리된다.
“안 돌았어요.” 문현빈은 동의할 수 없다. 벤치 요청으로 비디오 판독이 이뤄진다. 하지만 판정은 바뀌지 않는다.

잔뜩 노린 4구째, 맥없는 헛스윙
계속된 2사 2루다. 이순철 위원의 말은 현실이 된다.
강백호에게 간을 본다. 약간씩 빠지는 유인구 2개를 구사한다. 넘어갈 타자가 아니다. 눈치가 100단이다. 참을성을 발휘해 지켜만 본다.
그러자 결국 투수가 선택권을 행사한다. 덕아웃을 바라본다. 모종의 신호를 보낸다. 김원형 감독이 끄덕인다. 그리고는 손가락 4개를 편다. 고의4구 사인이다.
다시 이순철 위원의 멘트다.
“그렇다. 이게 맞는 거다. 설사 노시환에게 적시타를 허용한다고 해도, 확률상으로는 맞는 얘기다. 우투수 대 우타자니까….”
9회 말 2사 1, 2루. 양쪽이 모두 벼랑 끝이다. 1만 7000명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린다. 대기 타석의 노시환이다.
일단 공 2개(슬라이더, 직구)를 잘 고른다. 멀리 벗어난 코스에 따라다니지 않는다. 3구째가 어려웠다. 안쪽 높은 코스다. 슬라이더가 애매하게 걸쳤다. ABS가 OK 판정을 내린다.
카운트는 2-1이 됐다. 여전히 타자 편이다. 이어지는 4구째다. 보통은 그런 생각이다. ‘여기는 스트라이크를 잡아야 할 타이밍이다.’
노시환 역시 다르지 않다. 노림수를 갖고 잔뜩 도사린다. 마침 가운데 몰리는 직구가 온다. ‘됐다.’ 그런 마음으로 배트를 힘껏 돌린다.
그런데 아뿔싸.
다 와서 공이 꺾인다. 밖으로 휘어지며, 아래로 떨어진다. 휘두르던 타자도 안다. 중간에 스윙을 거둬들인다. 그야말로 턱도 없다. 공과 배트는 말도 안 될 만큼 큰 차이가 난다.
이 장면이다. 홈 팬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탄식과 절망이 가득하다. ‘그럼 그렇지.’ 체념과 포기, 분노의 이모티콘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헛스윙 직후 각성의 과정
그렇게 맞은 5구째다(카운트 2-2).
아니나 다를까. 포수의 요구는 일관성 있다. 피치컴의 슬라이더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먼 쪽에 미트를 대고 앉는다.
‘같은 코스로 하나 더. 그럼 100% 또 따라 나올 거야. 당하게 돼 있어.’ 그런 확신이 엿보이는 볼 배합이다.
하지만 배터리가 놓친 게 있다. 앞선 헛스윙 직후다. 타자의 각성한 표정, 그리고 뭔가 자기 암시를 하는 입모양이다.
경기 후 인터뷰 때다. 끝내기의 주인공은 이렇게 밝혔다.
“(빠져나가는 슬라이더에) 완전히 볼이었는데, 거기에 당했다. 한편으로는 그 장면 덕에 완전히 정리가 됐다. 거기서 스윙을 하고 나서 ‘이 코스 공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되겠구나’ 하는 마음을 먹었다.” (노시환)
대책은 뭐였을까.
“몸 쪽으로 더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다. 그게 딱 실투로 와서 좋은 타구를 만들 수 있었다.” (노시환, 경기 후 인터뷰)
말 그대로다. 5구째는 이영하의 명백한 미스다. 애초 의도와는 전혀 다르다. 안쪽으로 가다가, 가운데로 휘어지는 코스가 됐다. 그것도 한복판으로 향하는 공이다. 이른바 ‘달달한 (가운데 몰린) 변화구’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 가장 치기 좋은 먹잇감이다.
타구는 유격수 쪽 라인드라이브다. 박찬호의 2~3m 옆으로 날아간다. 그런데 너무나 강렬하다. 흔히 말하는 총알 같은 타구다. 어찌 손쓸 틈이 없을 지경이다.
2루 주자 페라자는 거침이 없다. 3루를 돌아 홈까지 질주한다. 3점째가 올라간다. 끝내기, 미국식으로는 워크 오프(walk-off) 히트다. 패자들을 ‘걸어서 퇴근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등번호 8번의 의미
혹시 긁히지 않았나? 그런 질문이 나왔다.
기자 “고의4구로 강백호를 피했다. 그리고 자신과 승부를 택했다. 어떤 기분이었나?”
시환 “예상하고 있었다. 놀라거나, 자극되거나, 그런 점은 없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문)현빈이 때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무조건 나한테 오겠다고 생각했다.”
뜻밖의 사실이 있다. 데뷔 첫 끝내기 안타라는 점이다. 8년 차 치고는 늦은 셈이다.
“희생플라이는 한번 있었다. 당시에는 별로 안 기뻤다. 조금 찜찜했다. 그러나 안타는 없었다. 그래서 기분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다. 궁금했는데, 느껴보니까 너무 좋다.” (노시환)
조금 더 구체적인 표현이다.
“결승 홈런도 쳐보고, 중요한 승부처에서도 홈런을 쳐봤다. 그런데 이건 (끝내기 안타는) 완전히 다르다. 세상의 모두가 나를 보고 있는데, 나 혼자 날아다니는 느낌이다. 그 느낌이 너무 좋더라.”
김경문 감독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총평을 남겼다.
“류현진이 역할을 다 했는데, 승리가 따르지 않았다. 위기 상황에서 이도윤의 좋은 수비가 있어서 추가 실점을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날의 주인공에 대한 찬사도 잊지 않는다. “노시환이 초반에 홈런을 쳐주고, 마지막 상황에서 끝내기 안타까지 활약해 줬다.” (김경문 감독)
4월은 그에게 혹독한 시간이었다.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다.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5월 이후로 조금씩 살아난다. 공교롭게도 팀 타선이 부진한 시기와 맞물린다.
초반 뜨겁던 문현빈과 강백호다. 요즘은 살짝 식는 느낌이다. 그러자 빈자리를 메워주고 있다. 엄청난 수모를 이겨낸 25세의 타자가 말이다.
손아섭과 친분이 두텁다. 친한 선배가 이적한(두산) 다음이다. 자신과 같은 등번호를 추천한다. 그러면서 한 말이다.
“선배님, 8번이 엄청 좋은 숫자입니다. 오뚝이 번호입니다.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겁니다. 선배님도, 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