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과 작물의 ‘리즈’ 시절은 바로 지금

한겨레21 2024. 9. 26.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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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선택해 기른 먹을 수 있는 식물은 석류나무였다.

이때 배턴을 이어받은 듯 홀로 꼿꼿하게 서리가 내릴 때까지 자라는 우리 밭 가지와 고추를 보면 '뒤늦게 포텐(잠재력)이 터진다'는 말이 바로 이런 건가 싶다.

길어진 여름에 고생이 많았지만 옥수수와 가지가 오랫동안 열매를 내어준다는 것은 마냥 싫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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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들]인천 계양 편
열매 하나에 감동 피어나고 만감이 교차하는 9월… 고마워, 정말 눈물 나게 맛있다
텃밭에서 토마토 세 종류와 줄기콩, 가지, 애호박, 토종 오이를 수확했다.

내가 처음으로 선택해 기른 먹을 수 있는 식물은 석류나무였다. 중학생 때 단골 꽃집에서 파는 거의 모든 식물을 섭렵하고 식충식물까지 키워봤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그때 작은 방울토마토 같은 열매가 달린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미니 석류였다. 사장님은 내가 기르기에는 조금 까다롭겠지만 정말 키워보고 싶다면 가격을 1만원으로 깎아주겠다고 했다.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가을에 열매가 익으면 맛볼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였으니까.

석류나무는 그동안 길러오던 꽃기린이나 스킨답서스와는 다르게 특별했다. 내 허리까지 오는 작은 나무는 가을에 정말 빨갛게 익은 열매를 내줬고, 석류와 똑같은 맛이 났다. 요즘 릴스와 쇼츠에서 유행하는 미니어처 요리처럼 작게 축소됐지만, 그 속에는 똑같은 구조와 색과 맛이 나는 소인국의 세계! 그렇게 열매를 아낌없이 내어주다 겨울에는 잎을 모두 떨군 뒤 죽은 듯 앙상하다가, 이듬해 다시 새싹이 돋고 꽃이 피는 다년생 나무의 경험도 미니 석류나무를 들이며 발견한 첫 즐거움이었다. 동네 꽃집키즈가 농사꾼으로 자라게 된 건 아마도 석류나무의 첫 열매 덕분이 아닐까.

석류나무를 생각하면 ‘덕질’에도 단계가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꽃이 좋았고, 잎의 모양이나 색이 특별한 게 좋아지다가, 다음에는 향기 나는 허브에 끌리다가 역시 종착지는 먹거리다. 씨앗부터 시작해 한동안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비슷한 식물체에 불과했던 작물이 먹거리로 변하는 순간은 언제나 신기하다. 특히 그 먹을거리가 열매라면! 꼭 식물과 내가 함께 이뤄낸 공동육아의 성과라도 된 것처럼 벅차고 뿌듯하다. 미안하게도 결국 내 입으로 들어가겠지만. 냠냠냠…. 고마워, 정말 눈물 나게 맛있다. 대신 올해도 꼭 씨앗을 받아서 손자도 키워줄게.

열매 하나에 감동이 피어나고 만감이 교차하는 건 비로소 우리 밭 가지과 작물의 전성기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집도 서향인데다 밭도 정남향으로 아파트가 한 채 우뚝 서 있어 모종도 늦고 빛도 없어 더디게 자라는 우리 밭 열매 친구들이 가장 빛나는 시기다. 8월까지는 볕도 비료도 듬뿍 받고 자란 주말농장 이웃들의 고추와 가지에 기죽다가도 딱 9월만 되면 그들의 시기는 끝이다. 이때 배턴을 이어받은 듯 홀로 꼿꼿하게 서리가 내릴 때까지 자라는 우리 밭 가지와 고추를 보면 ‘뒤늦게 포텐(잠재력)이 터진다’는 말이 바로 이런 건가 싶다. 게다가 올해는 한 달 넘게 혈투를 벌여온 노린재와의 ‘뽁뽁이 대첩’(제1528호 참고)에서 승리해 모양이 역대급으로 통통하게 잘빠진 음성재래초를 수확하고 채종까지 했다.

밭에서 바로 따온 열매는 대충 기름에 지져 소금간만 해 먹어도 어쩜 이렇게 질리지 않을 수 있는지. 매일 비슷한 열매를 구워 먹지만 매일 맛있다. 길어진 여름에 고생이 많았지만 옥수수와 가지가 오랫동안 열매를 내어준다는 것은 마냥 싫지만은 않다. 오늘은 호박이 유독 튼실하게 달렸다. 들고 동네 빵집으로 달려가야지. 작은 바게트 하나와 바꿔 먹을 수 있겠다.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세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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