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감동시킨 '풍운아' 노경은.. 그 인생의 커브볼

[민상현의 풀카운트] 세월 거스른 불펜 에이스, 노경은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노경은과 조병현 (출처: SSG 랜더스 SNS 이하 동일)

- 아비규환의 한국 마운드, 42세 노경은의 시간만은 거꾸로 흘렀다

- 대통령도 위로한 8강 탈락의 밤… '최고령' 노경은이 던진 묵직한 희망

- 버려졌던 투수의 가장 찬란한 라스트 댄스, 노경은의 야구는 끝나지 않았다


끝내 마이애미의 기적은 없었다.

3월 14일, 한국 야구대표팀은 8강의 문턱에서 짐을 쌌다.

고개를 숙인 젊은 후배들 사이로, 조용히 장비를 챙기는 최고참이 있었다.

42세 노경은.

대회는 끝났지만, 그의 투구는 끝내 지지 않았다.


이번 WBC 1라운드에서 한국이 8강행 티켓을 잡는 과정에는 분명 여러 영웅이 있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을 버텨낸 ‘숨은 축’으로 꼽히는 이름은 단연 노경은이다.

그는 조별리그 3경기에 구원 등판해 3⅓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이닝 자체는 길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대표적인 장면이 9일 호주전이다.

선발 투수 손주영 의 갑작스러운 팔꿈치 이상으로 경기 초반부터 마운드 운영이 꼬였다.

자칫하면 조별리그 탈락 확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긴박한 상황.

그때 불려 나온 투수가 노경은이었다. 그는 준비 시간도 길지 않았지만 곧바로 리듬을 찾았다.

결과는 2이닝 1피안타 무실점. 경기 흐름을 완전히 안정시킨 투구였다.


이날 장면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3회초였다.

상대는 메이저리그 유망주로 꼽히는 트래비스 바자나. 카운트는 3볼 노스트라이크까지 몰렸다.

그러나 노경은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어진 3구 연속 스트라이크로 삼진을 잡아냈다.

국제대회에서 경험이 얼마나 큰 무기인지 보여준 장면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투구가 단순히 ‘노장의 노련함’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번 대회에서 기록된 패스트볼 최고 구속은 148km/h. 평균도 146km/h 수준이었다.

여기에 수직 움직임이 살아 있는 패스트볼과 변화구 조합이 더해지면서 타자들의 타이밍을 빼앗았다.


한국이 1라운드를 통과한 뒤에는 뜻밖의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대표팀의 선전에 대해 대통령이 축하 메시지를 보냈는데 바로 베테랑 투수 노경은을 호명했다.

젊은 스타가 아닌 40대 불펜 투수가 국가대표 이야기의 중심에 섰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출처: 이재명 대통령 X

사실 그의 야구 인생은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노경은은 2021년 시즌 후 롯데에서 방출되는 아픔을 겪었다. 많은 이들이 그 시점에서 선수 생활의 끝을 예상했다.

하지만 SSG 유니폼을 입은 뒤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다시 불펜 핵심 투수로 자리 잡았고, 2023~2025년 3년 연속 30홀드라는 기록을 세웠다.

최고령 홀드왕 기록 역시 계속 경신 중이다.

더 놀라운 것은 내구성이다.

최근 4시즌 동안 평균 80이닝 이상을 던졌다. 보통 불펜 투수에게도 쉽지 않은 기록이다.

하물며 불혹을 넘긴 투수라면 더더욱 그렇다.

야구는 결국 기록의 스포츠다. 하지만 가끔 기록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선수도 있다.

노경은이 바로 그런 유형의 투수다.

그의 투구를 보고 있으면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시간이 정말 앞으로만 흐르는 걸까?

적어도 노경은의 시계는 아직도 거꾸로 가고 있는 듯하다.

글/구성: 민상현 전문기자, 김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