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보험사의 신계약 10건 중 9건 이상이 보장성 보험이다. 그야말로 보장성 전성 시대다. 지난해 말 기준 생명보험사의 신계약 가운데 95.9%가 보장성 상품이며, 손해보험사 역시 실손보험을 제외해도 보장성 비중은 99%에 이를 정도이다. 이런 쏠림 현상은 과연 보험사만의 책임일까.
2023년 도입된 국제회계기준(IFRS17)과 신지급여력제도(K-ICS)는 보험사의 상품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과거에는 고객이 낸 보험료가 보험사의 수익에 즉시 반영됐지만, IFRS17 이후에는 '보험계약마진(CSM)'이라는 회계 기준에 따라 수익 인식이 결정된다. 특히 보장성 보험은 보험금 지급 시점이 일반적으로 길고, 해지율도 낮아 CSM 확보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보험사 입장에선 수익성과 건전성을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해 보장성 보험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진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수익 중심 전략이 보험의 본질적 기능과 충돌한다는 점이다. 보험은 원래 사회적 위험을 분산하고, 사고·질병·노후 등 불확실한 상황에 대비하도록 돕는 사회 안전망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장 구조는 고령자, 저소득층, 유병자 등 취약계층을 위한 '사회보장형 상품'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손해율이 높거나 수익성이 낮은 상품은 출시조차 어려워지고, 시장은 획일화된 보장성 상품 위주로 재편되고 있다. 핵심은 상품의 다양성과 고객 접근성은 축소되고, 보험의 공공적 기능은 점점 약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주도한 '기업가치 제고(밸류업)' 정책은 이 같은 현상에 불을 붙였다. 주주환원 확대 기조 속에 보험사들은 배당금 확대, 자사주 매입 등 적극적인 주주친화 정책을 요구받고 있다. 동시에 K-ICS 기준은 금리 및 시장 변동성이 커진 환경 속에서 보험사에 자본 확충 부담을 안겼다. 후순위채나 신종자본증권 등 비용성 자본 조달이 늘어나고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이자 부담만 가중시킨다고 봤기 때문이다.
당국은 기준 완화를 요구하는 현장 목소리를 반영해 이달들어 K-ICS 권고비율을 낮췄다. 그러나 자본의 질을 높일 것을 요구하며 동시에 보험사에 또 다른 과제를 안겼다. 결국 보험사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보장성 보험 판매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했다. 이 과정에서 대형사와 경쟁이 어려운 중소형 보험사는 자본적정성 유지에 더 큰 압박을 받는 중이다.
이를 두고 보장성 보험 쏠림 현상이 단순히 보험사의 탐욕이나 단기 전략으로만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히려 회계제도, 자본규제, 감독 방향 등이 보험사를 수익성과 자본건전성만을 쫓도록 하는, 역설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제도 변화 없이 단지 판매 쏠림만 지적하는 건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일각에서는 제시한 기준을 일방적으로 맞출 것을 강요하는 규제적 성격이 아닌 유인책을 제시해 보험사의 상품 다양화를 유도하는 방법도 고려할 것을 조언한다. 예를 들어 수익성은 낮지만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상품군에 대해 보험사가 일정 판매 비중을 달성하면 회계 또는 자본 규제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 등이다.
실제 현장에서도 수수료나 시책 등 유인이 있을 때 특정 상품 판매가 활발해진다는 점은 자명하다. 실효성이 기대된다는 뜻으로, 복수의 설계사는 "고객에게도 만족스럽고, 설계사 본인에게도 긍정적인 혜택이 따르는 상품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고령자·유병자·저소득층을 위한 사회보장형 상품에 대해 CSM 산정 시 가산점을 주거나, K-ICS 비율 계산 시 우대 가중치를 반영하는 등 제도적 보정도 검토할만 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회계 왜곡이 발생할 수 있는 점은 경계해야 한다. 보험사 입장에서도 인센티브가 확실하다면 보장성 편중에서 벗어나 다양한 상품을 개발·판매할 유인으로 인식할 것이다.
이제는 단순히 보장성 보험 편중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보험이 사회 안전망으로서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제도적 유인과 회계·자본 규제의 정합성을 함께 설계해야 할 때다. 공공성과 지속가능성을 함께 제고할 수 있는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박준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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