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 병원에서 당장은 통증을 줄여주는 것 밖에 해줄 것이 없다며 받은 퇴원 통보에 온 가족이 당황했고, 항암중인 아버지는 집에서 돌발통증에 대비할 수가 없기에 다음 항암때까지 요양병원에 가시기를 권유 받았다. 일하는 중간중간 대학병원과 요양병원들 사이에서 수십통의 전화를 주고 받으며 겨우 입원하실 수 있는 암재활병원을 예약했다.
급하게 쓴 연차였지만 회사에선 이런거 눈치보지말라며, 앞으로 급하게 연차 쓸 일 정말 많아질텐데 필요할때는 반반차, 반차 가려가며 사용하라며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이직한지 1년도 채 안된 나에게 입사때부터 엄청난 편의를 봐주고 있는 회사에 감사하며 연차를 썼고 다음날 아침부터 병원으로 출발했다.
전원을 하는데에는 꽤 많은 시간과 서류가 필요했다. 준비해서 아버지를 모셔다 드리고, 담당의사와 면담을 하고 입원자리를 정리해 드렸다.
보호자분은 이제 나가셔도 좋다는 얘길 듣고 무뚝뚝한 아버지와 짧게 인사를 주고 받은 뒤 집으로 향했다. 상황이 너무 답답했고 갑자기 달리고 싶어졌다.
공복에 견과류 두 줌을 입에 우겨 넣고 사과 하나를 물고 집밖으로 나섰다.
답답함이 가실 때 까지 뛰어보자 생각하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는데, 뛰다보니 땀이 나면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하게 땀이 씻겨 나갔고 날씨고 너무 좋다보니 욕심이 났다. 오래달리기를 생각하고 천천히 뛰다보니 숨이 하나도 차지 않았다. 심박은 항상 그렇듯 준비운동만해도 120을 오가고 천천히 뛰어도 160.. 그래도 오늘 평소보다 더 길게 뛸 수 있겠는데?
현재까지 최대거리는 15키로였고, 편도 8키로를 지나 10키로를 넘는 구간에서부터는 오늘 첫하프가 아니라 첫30키로를 뛸 수 있겠다 생각했다.
15키로 지점까지 마냥 달렸고 정말 너무 편안했다.

고개를 돌려서 다시 온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다리가 잠기기 시작했다..
숨도 안차고 편안했는데, 안쪽 사타구니와 종아리 통증이 너무 심했고 19키로 정도 지났을 때는 타는 듯한 갈증과 함께 눈앞이 종종 깜깜해졌다.
이래서 보급을 하는 거구나..
30키로는 무리고 하프까지만 뛰자 생각하고 하프를 뛰고나서 러닝벨트에서 핸드폰을 꺼냈는데 핸드폰이 꺼졌다.
병원 왔다갔다 하면서 배터리를 체크하지도 않았고, 유튜브로 음악을 듣는데 프리미엄을 안해서 화면을 켜놓고 오랫동안 재생한게 화근이었나 보다..
어? 근데 이러면 어떻게 돌아가지..? 핸드폰도 교통카드도 지갑도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집까지 남은 거리는 대략 11키로 정도.. 다리가 이미 잠긴 상황이고 걷기엔 멀었다.
우선 천에서 벗어나 주변 편의점들에 들어가서 충전이 가능한지, 잠깐이라도 충전기를 빌릴순없는지 물어보고 다녔지만 전부 거절당했고, 몸이 슬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지하철역이 보이길래 추위를 피해 지하철역으로 들어갔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역무원실에 들어가 양해를 구했는데 정말 흔쾌히 자기 충전기를 내어주어 충전을 시작했다ㅠㅠ
정자역 역무원님 정말 감사합니다.
원래 택시를 타려고 했지만 어플들어가서 보니 거리가 거리인지라 만원이 넘게 찍히는 택시비가 너무 아까웠고,
핸드폰결제로는 지하철표를 끊을 수가 없다고 하더라.. 무조건 현금결제만 된다고 하길래 어쩌지 하며 인터넷에 찾아보니 핸드폰교통카드라는게 있는데 모바일 티머니를 깔아도 얘도 첫충전이 만원이상이라 또 돈이 아까웠다..
와중에 카드사어플에서 모바일교통카드를 후불로 지원하는 시스템을 발견해서 설치했고, 무사히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안도감때문인지 날이 정말 추워진건지 너무 추워졌고, 아내가 임신 중이라 감기 걸리면 안된다는 생각에 편의점에 들러 쌍화탕이랑 비타민음료를 사서 마시고 집으로 와서 마무리 스트레칭 해주고 저녁준비를 했다.

조깅도 너무 즐거웠고, 덩달아 희한한 일을 겪으니 불편했던 감정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내가 달리기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집에 쳐박혀서 더 우울해지진 않았을까 생각하니 새삼 런닝에 감사하며 플릿러너에 엔프4 재입고되면 쿠폰써서 질러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