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시대에 온 첫 축복…사상 최초 포수 신인왕 '오리'의 화려한 등장

[이재국의 엘팬알백] ㉓1990년 신인왕 김동수 이야기

1990년 MVP 해태 선동열(왼쪽)과 신인왕 LG 김동수가 환하게 웃으며 기자단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동수야! 됐다. 니가 신인왕 됐어. 빨리 KBO로 올라와라.”

LG 트윈스 홍보팀 김인양 과장(전 LG 세이커스 농구단장)은 전화에 대고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1990년 10월 23일 화요일 낮. LG 신인 김동수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있는 한국야구위원회(KBO) 인근 다방에서 초조하게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김 과장은 KBO 사무실에 비치된 전화기로 김동수가 대기하고 있던 다방으로 전화를 걸어 “손님 중에 김동수 씨 좀 바꿔달라”고 부탁한 뒤 신인왕 수상 확정 소식을 전했다.

김동수는 한걸음에 KBO로 달려가 7층 KBO 사무실로 들어섰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무실에는 ‘무등산 폭격기’ 해태 선동열이 특유의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투수 3관왕 해태 선동열이 3번째로 프로야구 최우수선수(MVP)가 되는 영광을 누렸으며, LG 김동수는 최초의 포수 출신 신인왕으로 탄생했다.』 <1990년 10월 24일자 스포츠서울>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23번째 주제는 1990년 LG 트윈스 시대의 문을 힘차게 열어젖힌 ‘창단둥이’ 김동수 스토리다.

LG 트윈스 시대 최초 신인왕이자 KBO 역대 최초 포수 신인왕. 이 선수는 훗날 포수 골든글러브만 7차례나 받는 레전드가 된다.

1990년 LG 트윈스 신인 포수 김동수의 모습. ⓒ스포츠서울

◆MBC 1차지명→LG 시대를 함께 개척한 창단둥이

[엘팬알백] ④화에서 자세히 소개했듯이 김동수는 MBC 청룡 1차지명을 받은 뒤 LG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하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었다.

1990년 신인드래프트 1차지명은 1989년 11월 7일 개최됐다. 이때만 해도 MBC가 럭키금성에 구단을 매각하기 전이었다.

서울 두 구단 MBC와 OB는 당시 KBO 사무실에서 2명씩의 1차지명 선수를 뽑았는데 MBC가 추첨에서 이기면서 우선권을 배정받았다. 결국 MBC는 1순위와 4순위, OB는 2순위와 3순위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MBC는 여기서 1순위로 아마추어 최대어 포수 김동수(서울고-한양대)를 선택했다. OB는 2순위로 김동수와 서울고-한양대 동기인 내야수 임형석, 3순위로 동대문상고(현 청원고)의 초고교급 투수 김경원을 뽑았다. 이어서 MBC가 4순위로 선린상고-고려대 출신의 외야수 이병훈(작고)을 찍었다.

김동수의 아버지 김진석 씨(작고)는 MBC 청룡과 입단 협상을 벌이다 구단이 럭키금성으로 넘어가면서 협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90년 1월 23일 LG 트윈스와 다시 만나 계약금 4000만 원, 연봉 1200만원(언론발표용)에 사인을 했다. 그 시절엔 이면계약이 성행했는데 실제로는 계약금 5800만 원과 연봉 1200만 원 등 총 7000만 원이라는 초특급 대우를 받았다.

당시 김동수의 일기장을 보면 이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가 나온다.

1990년 1월 23일과 24자 김동수의 일기 ⓒ김동수 제공
“저는 원래 MBC 청룡 팬이었어요. 그래서 내심 MBC가 저를 1차지명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죠. 그런데 당시엔 요즘처럼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기사가 뜨지 않았으니 다음날 신문으로 1차지명 여부를 알 수밖에 없었거든요. 지명 당일에 제가 직접 KBO에 전화를 걸어 마치 팬인 척하며 ‘서울 1차지명 어떻게 됐냐’고 물었습니다. 다행히 전화를 받은 분이 제가 1순위로 MBC에 지명됐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더라고요. 1순위도 1순위지만 제가 좋아하던 구단에 입단하게 돼 더 기뻤죠.”

김동수(현 서울고 감독)는 1989년 11월의 기억을 되새기며 얼굴 가득 하회탈 같은 웃음을 지었다.

“곧바로 MBC 청룡에서 지급한 헌 유니폼을 입고 건국대 야구장에서 선배들과 훈련을 시작했어요. 은퇴한 선수가 사용하던 유니폼 같았는데 대충 사이즈 맞는 유니폼과 모자를 나눠주더라고요. 요즘엔 신인들에게도 다 새 유니폼을 지급하니 지금으로선 상상이 안 되죠. 그런데 12월에 MBC 구단이 럭키금성에 매각된다는 뉴스가 터지면서 훈련과 입단 협상이 올스톱됐어요. 1월 22일에 팀 이름이 LG 트윈스로 발표됐고, 다음날 아버지가 여의도 쌍둥이빌딩에 가셔서 그제서야 입단 계약을 하고 오셨습니다. 1월 28일부터 건국대 야구장에서 럭키금성 임시 유니폼을 입고 첫 연습을 시작하다 2월 5일에 대만 타이중으로 스프링캠프를 떠났어요.”

김동수는 당시 꼼꼼히 써온 자신의 일기장을 다시 한번 뒤적거리며 날짜와 추억들을 더듬어갔다.

1990년 LG 트윈스 시대의 시작과 함께 입단한 신인 김동수. 창단둥이라는 상징성으로 3월에 최초 공개된 LG 트윈스의 줄무늬 유니폼 모델로 발탁됐다. ⓒLG트윈스

◆될성부른 떡잎…아마추어 야구를 휩쓴 포수 최대어

김동수가 서울권 1순위로 지명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OB가 1순위를 잡았어도 그를 선택했을 것이다. 서울 화곡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 강남중과 서울고, 한양대를 거친 김동수는 늘 아마추어 최고 선수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김동수가 전국에 이름을 알린 것은 서울고 2학년 시절이던 1984년. 그해 서울고는 대통령배와 봉황대기에서 연거푸 우승을 차지했는데 김동수는 두 대회에서 모두 MVP에 오르며 전국구 스타가 됐다.

서울고는 1985년에도 대통령배와 청룡기를 제패했는데 김동수는 이때도 두 대회 모두 MVP를 독식했다.

그러니까 서울고는 좌완 박형렬-포수 김동수 배터리를 앞세워 1984년과 1985년 2년 동안 무려 4차례나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는 학교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개척했고, 김동수는 4개 대회에서 모두 MVP를 차지하는 고교야구 역사상 유례 없는 전설을 썼다.

김동수는 고교 3학년 신분으로 이용호(서울고), 박동희(부산고)와 함께 ‘88올림픽 꿈나무’에 선정돼 성인 국가대표팀 선수들과 대만 전지훈련을 함께 갔을 정도로 ‘공수를 겸비한 미래의 국가대표 포수’로 인정받았다.

한양대로 진학한 뒤에도 최고 선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2학년 때부터 붙박이 국가대표 포수로 발탁됐고, ‘88올림픽 꿈나무’로 끝난 게 아니라 실제로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태극마크를 달고 영광의 무대에 서기도 했다.

대학 졸업반이던 1989년에는 홈런 1위(14개)와 타점 1위(36개), 최다안타 1위(39개)를 차지하면서 한양대 3관왕의 주역으로 맹활약했다. 그러면서 그해 기자단 투표에서 아마야구 MVP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아마추어 시절에 쌓아온 이런 명성 때문에 LG 트윈스 팬들은 큰 기대감을 갖고 김동수의 프로 무대 데뷔를 기다렸다.

게다가 1990년은 LG 트윈스의 역사가 시작되는 해. 1990년 신인 김동수는 그래서 LG 트윈스의 ‘창단둥이’라는 상징성도 내포하고 있었다. 새 시대에 온 첫 축복이었다.

이런 연유로 김동수는 3월초 시범경기 직전 LG 트윈스의 줄무늬 유니폼이 처음 공개됐을 때 유니폼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구단으로선 LG 트윈스 간판스타로 키우겠다는 복안이었다.

1990년 김동수와 함께 신인왕 경쟁자로 거론된 롯데 박동희, 삼성 이태일, 태평양 김경기(왼쪽부터). ⓒ스포츠서울

◆박동희? 이태일? 김경기?…1990년의 신인왕 경쟁

사실 1990년 신인 중 최고의 화제 인물은 롯데에 입단한 박동희(작고)였다. 부산고와 고려대 시절 한국야구에서 보기 힘든 불같은 강속구를 던지면서 ‘제2의 선동열’로 주목받았다. 고려대 시절 이미 최고 구속 156㎞를 찍어 화제를 모았다.

박동희는 계약금만 1억5000만 원을 받아 1985년 해태 선동열이 받은 금액(1억3800만 원)을 훌쩍 넘어 KBO 역대 신인 최고 계약금의 새 역사를 썼다. 그만큼 박동희에 대한 기대가 컸다.

여기에 태평양 1차지명 1루수 김경기(인천고-고려대)와 삼성 1차지명 잠수함투수 이태일(경주고-영남대)도 주목할 선수로 꼽혔다.

아니나 다를까. 박동희는 데뷔전부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4월 11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전에서 롯데 선발투수인 잠수함 김청수(5이닝 1실점)에 이어 등판한 박동희는 6회부터 4이닝 동안 1안타 1볼넷 10탈삼진 1실점의 괴력을 발휘했다.

특히 아웃카운트 12개 중 탈삼진만 무려 10개. 7회말과 8회말에는 삼성 타자를 모두 KKK로 돌려세웠다. 6타자 연속 탈삼진은 당시 KBO 역대 신기록(종전 최동원 등 5타자 연속 K)이었다.

태평양 김경기는 개막전인 4월 8일부터 주전 1루수로 나섰는데 데뷔 첫 타석부터 안타를 때리는 등 초반에 불방망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1990년 LG 신인 김동수. 1990년과 1991년에는 등번호 2번을 백인천 감독이 사용해 김동수는 12번을 단 뒤 1992년부터 2번으로 바꿨다. ⓒLG트윈스

◆백업→지명타자→주전포수 급상승…김동수, 양상문 상대 데뷔 첫안타

김동수는 1990년 개막전 때만 하더라도 주전이 아니었다. 개막 엔트리에는 이름을 올렸지만 4월 8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OB와 시즌 개막전에서 선발로 나서지 못했다.

당시 LG 주전 포수는 국내 최고의 수비형 포수로 평가받던 심재원(작고). 타격은 약한 편이었지만 수비 하나만큼은 누구나 인정하는 ‘대한민국 넘버1’이었다. 서효인과 차동열이 뒤를 받혔다.

김동수는 이날 0-6으로 끌려가던 7회초 심재원 대타로 데뷔전을 치렀다. 여기서 포수 파울플라이로 물러난 뒤 9회에는 볼넷을 골라나가며 나름대로의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이튿날인 9일 잠실 OB전 때는 다시 벤치워머. 아예 경기에 나서지도 못했다.

첫 안타는 LG의 시즌 3번째 경기에서 나왔다. 4월 10일 잠실 태평양전이었다. 이날도 선발출장하지는 못했지만 4-4 동점인 7회말 1사 3루서 대타로 나서 태평양 양상문을 상대로 깨끗한 우전 적시타를 날렸다.

“양상문 선배님을 만나면 제가 항상 그랬어요. 제 1호 안타를 선물해 주셨다고 말이죠. 하하. 우익수 쪽으로 날아간 첫 안타는 잊을 수가 없죠.”

김동수에게 데뷔 첫 안타를 안겨준 태평양 투수 양상문. ⓒ스포츠서울

백인천 감독은 4월 11일 잠실 태평양전에서 김동수를 5번 지명타자로 선발 투입했다. 프로 데뷔 첫 선발출장이었다.

지명타자이긴 해도 일단 방망이 잠재력을 살려보겠다는 뜻이었다. 김동수는 그 이후 줄곧 5번 지명타자를 맡아 중심타선을 지켰다.

김동수는 4월 14일 사직 롯데전 4타석 2타수 1안타 1사구, 4월 15일 롯데전에서 2루타 1개를 포함해 5타수 3안타 1타점 1득점을 올렸다. 타율은 0.417(12타수 5안타)로 치솟았다.

4월 18일 잠실 OB전에서 4타수 2안타로 규정타석에 진입하며 타율 0.381로 타격 부문 2위(1위 삼성 이만수 0.429)에 오르기도 했다.

5월초까지 지명타자로만 나서던 김동수가 포수로 처음 선발출장한 것은 5월 8일 잠실 OB전. 이때부터 LG의 주전 포수는 김동수로 바뀌었다. 백 감독이 신뢰를 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삼성 시절의 최동원. LG 김동수는 1990년 불세출의 투수 최동원을 상대로 친 홈런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스포츠서울

◆“내가 최동원을 상대로 홈런을?”…삼성 3연전 5홈런 몰아치기

대학 시절엔 알루미늄 배트를 썼지만 프로에서는 나무방망이를 사용했다. 여기에 프로 타자들의 성향을 몰라 포수로서 수비에 신경을 쓰느라 타율도 점점 떨어졌다.

첫 홈런도 다소 늦게 터졌다. 5월 11일 대전 빙그레전. 1-1 동점이던 2회초 1사 후 빙그레 잠수함투수 한희민을 상대로 좌월 솔로홈런을 날린 것이 프로 데뷔 첫 홈런이었다.

한번 물꼬가 트이자 ‘대학 홈런왕’다운 잠재력이 터지기 시작했다. 5월 19일과 20일 대구 삼성전에서 이틀 연속 홈런포를 가동해 시즌 3호를 기록했다.

압권은 6월 중순이었다. 15일에 4타수 2안타 2홈런, 16일에 5타수 2안타 2홈런을 때렸다. 이틀 동안 뽑은 4안타가 모두 홈런이었다.

이어 17일 대구 삼성전. 2회초 선두타자 김영직이 유격수 쪽 내야안타로 출루했다. 5번타자 김동수가 들어섰다. 마운드에는 개인통산 100승에 1승만을 남겨둔 최동원이 서 있었다.

여기서 김동수는 좌월 2점홈런을 날렸다. 앞선 2경기를 포함해 5안타를 모두 홈런으로 장식하는 진기록을 썼다. 단숨에 시즌 8호 홈런으로 팀 내 단독 1위로 달려나갔다.

1990년 LG 김동수가 홈런을 친 뒤 팀 동료인 민경삼의 환영을 받고 있다. ⓒ스포츠서울
“최동원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투수였잖아요. 그런데 제가 프로 선수가 돼 어릴 때부터 우상으로 여기던 최동원 선배를 상대로 홈런을 쳤다는 게 믿기지 않더라고요. 속으로 ‘내가 최동원 투수한테 홈런을 쳤다고?’라며 되뇌면서 베이스를 돌았던 것 같아요.”

김동수는 그날의 홈런 궤적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좀 묘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최동원 투수라고 하면 강속구가 트레이드마크인데 제가 쳤던 홈런은 너무 밋밋한 공이었어요. 시속 130㎞대 정도로 느껴졌거든요. 그 옛날의 최동원 투수가 아닌 것 같아서 제가 홈런을 치고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김동수의 말처럼 롯데 간판투수로 천하를 호령하던 시절의 최동원이 아니었다. 1988년 말 롯데에서 삼성으로 트레이드된 뒤 최동원은 내리막길을 걸었고, 1990년 루키 김동수가 대적하던 최동원은 아무리 세게 던져도 구속이 시속 140㎞를 찍을까말까한 평범한 투수로 전락해 있었다.

LG 신인 김동수가 1990년 7월 19일 광주 해태전에서 데뷔 첫 만루홈런을 날렸다. 이 같은 사실을 보도한 스포츠서울 1면. ⓒ스포츠서울

◆결정적 순간마다 극적인 홈런

1990년 신인 김동수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인상적인 홈런을 터뜨렸다.

7월 19일 광주 해태전에서는 만루홈런을 쳤다. 3-1로 앞선 5회초 1사 만루에서 해태 좌완 신동수의 커브를 잡아당겨 승부에 쐐기를 박는 그랜드슬램을 날렸다.

8월 7일 광주 해태 더블헤더 제2에서는 2회초 3점홈런(시즌 11호)으로 더블헤더를 독식하는 데 힘을 보탰다.

LG가 김동수와 윤덕규의 활약으로 대전 19연패에서 탈출한 사실을 전한 스포츠서울 1면 기사. ⓒ스포츠서울

8월 17일의 시즌 12호 홈런포도 잊을 수 없다. MBC 청룡 시절이던 1988년부터 이어져 온 지긋지긋한 대전 19연패 악몽을 끊어냈기 때문이다.

김동수는 1-2로 뒤진 7회초 좌중간 안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고, 3-2로 아슬아슬하게 앞선 9회초 빙그레 3번째 투수 장정순을 상대로 중월 솔로홈런을 날리면서 팀의 4-2 승리를 이끌었다.

“저는 신인이어서 대전 19연패를 모두 경험하지 못했지만 당시 LG 선배들은 대전에만 가면 지니까 트라우마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날 빙그레 이글스한테 이기고 나서 대전 숙소에 들어가 조촐한 치킨 파티를 열었어요. 독수리를 먹을 수는 없으니까 치킨을 사 왔던 거죠. 선수단이 모두 컵에 맥주 한잔씩 부어서 건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LG 신인 김동수(가운데)가 1990년 9월 29일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9회말 끝내기 솔로홈런을 친 뒤 관계자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LG의 한국시리즈 직행을 이끄는 결정적인 홈런포였다. ⓒ최종준 전 LG 단장 제공

뭐니뭐니 해도 가장 기억에 남아있는 홈런은 시즌 최종전에서 기록한 끝내기 홈런이다. LG의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이 걸린 경기에서 터진 결승포였다.

[베팬알백] 21화에서 소개했듯이 LG는 9월 29일 잠실에서 OB와 페넌트레이스 최종전을 치렀다. 0-0으로 팽팽하게 진행되던 9회말 김동수가 선두타자로 나섰다.

마운드에는 OB 선발투수로 등판해 무실점 역투를 펼치던 구동우가 서 있었다. 초구 볼에 이어 2구째 직구. 김동수는 전광석화처럼 배트를 돌렸고, 타구는 왼쪽 펜스 뒤 외야 관중석에 라인드라이브로 꽂혔다.

끝내기 솔로홈런! 루키의 홈런 한 방으로 LG는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1-0으로 이겼다.

1위 싸움을 하던 해태가 이날 인천에서 태평양과 더블헤더를 치렀는데 제2경기에서 2-5로 패하면서 LG는 한국시리즈 직행을 확정했다. 결국 김동수의 시즌 13호 홈런은 LG를 한국시리즈로 인도하는 무지개였던 셈이다.

1990년 LG 트윈스의 복덩이 신인 포수 김동수의 타격 모습. ⓒLG트윈스

◆‘13승+노히트노런’ 삼성 이태일과 경쟁…KBO 최초 포수 신인왕 신화

1990년 정규시즌 MVP와 신인왕 투표는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리기 하루 전날인 10월 23일 KBO 사무실에서 열렸다. 당시엔 현장에서 기자단 투표를 실시한 뒤 즉석에서 개표를 통해 수상자를 확정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수상자를 알 수 없는 상황. 김동수는 KBO 인근 커피숍에서 홀로 1시간 이상 대기하며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동수는 데뷔 첫해인 1990년 페넌트레이스에서 팀의 120경기 중 110경기에 출장해 352타수 102안타로 타율 0.290(11위), 13홈런(10위), 62타점(7위) 등 공격 전 부문에서 고른 활약을 펼쳤다. 당시 100m를 12초에 달릴 정도로 준수한 발도 보유한 김동수는 그해 15도루를 기록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주전 포수로서 팀의 한국시리즈 직행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 13개의 홈런은 잠실구장을 사용하는 LG(MBC 시절 포함)와 OB의 역대 신인 중 최다홈런 기록. 아울러 그해 페넌트레이스 최종전 끝내기 홈런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는 점에서 김동수는 가장 유력한 신인왕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삼성 잠수함투수 이태일은 노히트노런과 시즌 13승으로 김동수의 신인왕 등극에 가장 강력한 대항마로 떠올랐다. ⓒ스포츠서울

하지만 경쟁자가 만만치 않았다. 바로 삼성의 잠수함 투수 이태일이었다.

전반기만 하더라도 1승도 올리지 못하고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이태일은 7월 13일 완투승으로 데뷔 첫 승을 올린 뒤 후반기에만 무려 13승을 수확했다. 특히 8월 8일 사직 롯데전에서 KBO 역대 6번째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면서 강력한 신인왕 후보로 급부상했다.

김동수와 이태일은 다음날인 10월 24일부터 한국시리즈에서 격돌하게 돼 있었다. 1980년대의 신인왕은 모두 그해 한국시리즈를 경험하지 못했는데 김동수나 이태일이 신인왕에 오른다면 그 또한 새로운 역사가 되는 상황이었다.

LG와 삼성 프런트는 이 신인왕 대결을 한국시리즈 팀 사기와 직결되는 전초전으로 보고 홍보 전쟁을 벌였다. 전자업계 라이벌로서 자존심을 건 싸움이기도 했다.

개표 결과 1위와 2위표를 합치면 김동수는 43표, 이태일은 42표를 얻어 막상막하. 하지만 10점이 주어지는 1위표 집계에서 김동수는 29표, 이태일은 16표를 얻어 희비가 엇갈렸다.

김동수는 1위 29표를 비롯해 2위(5점) 14표, 3위(3점) 4표, 4위(2점) 1표, 5위(1점) 1표를 얻어 합계 375점으로 이태일(308점)을 따돌렸다.

1990년 정규시즌 MVP 선동열과 신인왕 김동수의 수상 소식을 알린 스포츠서울 기사. ⓒ스포츠서울

그해 또 다른 신인왕 후보로는 태평양 김경기, 롯데 김응국과 박동희 등이 있었다.

박동희는 시즌 초반 깜짝 투구를 펼쳤지만 부상과 함께 갈수록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10승7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3.04에 그쳤다.

1988년 투수로 입단했다가 타자로 전향한 ‘호랑나비’ 김응국은 타율 0.292와 21도루를 기록했지만 중고신인이라는 점에서 큰 점수를 얻지 못했다.

김경기는 팀의 전경기(120경기)를 뛰면서 타율 0.285, 10홈런, 68타점의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팀성적(5위)이 낮은 팀성적으로 표심을 자극하지 못했다.

허영만 화백이 그린 LG 포수 김동수 캐리커처. ⓒLG트윈스

◆LG 시대 최초 신인왕…영광의 시대 개막

김동수는 LG 시대를 상징하는 ‘창단둥이’로 구단에서도 전략적으로 스타 만들기에 나섰다.

1990년 함께 프로야구 무대에 입성한 인연뿐만 아니라 최초 우승으로 영광의 시대를 함께 개척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LG는 MBC 청룡 시절부터 신인왕의 산실로 자리잡았다.

청룡 시대였던 1986년 김건우, 1988년 이용철에 이어 김동수는 구단 역사상 3번째 신인왕에 올랐다. 아울러 LG 시대의 첫 신인왕이자 투수가 아닌 야수로서 구단 역사상 첫 신인왕이 됐다.

KBO 역사를 보더라도 김동수의 신인왕 수상은 의미가 컸다. 포수 최초로 신인왕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김동수를 포함해 지금까지 포수 신인왕은 1999년 홍성흔(두산), 2010년 양의지(두산)까지 총 3명밖에 없다. 그만큼 포수가 신인왕에 오른다는 게 쉽지 않다는 방증이다. 김동수는 그 시작점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됐다.

1983년부터 시작된 신인왕 역사에서 1990년 김동수까지 총 8명의 신인왕이 탄생했는데 묘하게 투수 4명과 야수 4명이 번갈아 수상한 점도 특이한 부분이었다.

1990년 신인왕 김동수가 철도에 앉아 낭만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포수는 내 운명…LG는 나의 첫사랑

김동수는 서울 화곡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야구와 인연을 맺었다. 그때부터 2009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30여 년간 포수로 활약했다.

“화곡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께서 형하고 함께 야구하면서 놀 수 있게 글러브 하나와 포수 미트 하나를 사다 주셨어요. 그 무렵 화곡초에 야구부가 창단됐는데 선수 모집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원을 했죠.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글러브를 가지고 와서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글러브와 미트를 가지고 갔어요. 그런데 미트 가지고 온 사람이 저밖에 없었어요. 감독님이 그냥 포수 미트 주인인 저한테 포수를 보라고 하더라고요. 다른 이유 없이 말이죠. 그래서 포수로 야구를 시작하게 됐던 겁니다.(웃음)”

김동수는 강남중과 서울고, 한양대로 진학하면서 공수를 겸비한 아마추어 최고 포수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LG에 입단하면서 포수로서 새롭게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 시절까지 전문적으로 포수 지도를 받지 못했어요. 감독님이나 코치님 중에 포수 출신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냥 포수의 기본이 뭔지도 모르고 공을 받고, 공을 막고, 공을 던졌어요. 국가대표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 점에서 LG에 입단한 게 저한테는 정말 큰 행운이었죠.”

1990년 LG 트윈스 백인천 감독이 김동수에게 조언을 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김동수가 ‘행운’이라고 말한 건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우선 백인천 감독과의 만남이다. 백 감독은 경동고 시절 포수와 타자로서 한국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 뒤 1962년 일본프로야구에 스카우트됐다. 1965년 시즌 중반부터 외야수로 변신했지만 20년간 일본프로야구 무대를 경험했기에 포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감독이었다.

“1990년 제가 포수로 앉을 때 감독님이 벤치에서 일일이 사인을 내셨어요. 당시 프로 타자들의 성향도 잘 몰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때 볼배합에 대해 많이 공부할 수 있게 됐죠. 나중에는 저를 믿고 맡기기도 하셨는데 결정적인 순간엔 감독님이 저한테 사인을 내셨어요.”
포수의 전설 심재원. 김동수는 LG에서 심재원을 만나면서 포수로서 기본기에 눈을 떴다. ⓒ스포츠서울

여기에 주전 포수 심재원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심재원은 한국야구사에서 포수 교본으로 불리고 있는 인물이다. 부산고와 성균관대 시절부터 태극마크를 단 뒤 실업 시절(한국화장품~경리단) 붙박이 국가대표 포수로 활약했다. 최동원부터 선동열까지 최고 투수들의 공을 다 받았던 인물이다.

“1990년 입단했을 때 LG 주전포수는 심재원 선배였어요. 타격은 좀 약했지만 포수로서 수비는 완벽했던 분이죠. 캐칭, 블로킹, 프레이밍 등을 옆에서 보고 배울 수 있었고, 조언도 많이 받았어요. 심재원 선배는 특히 송구 동작이 워낙 빨라 상대 발 빠른 주자들이 도루 시도조차 거의 못했거든요. 최고의 교본이 옆에 계셨으니 저에겐 행운이었죠. 심재원 선배를 만나지 못했으면 제가 포수로서 성장이 더뎠을 것 같아요. 다만 현역은퇴 후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더 많이 배우지 못한 점이 아쉬웠어요.”

심재원은 1992년을 끝으로 은퇴한 뒤 LG 배터리코치로 변신했다가 1994년 5월 41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방망이 솜씨만큼은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던 김동수는 백 감독과 심재원의 지도 아래 포수로서도 빠른 시간 안에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김동수는 1990년 구단 역사상 최초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면서 LG 트윈스의 영광의 시대를 힘차게 열어젖혔다.

MBC 청룡 선수단을 이어받아 특별한 전력보강이 없었지만, 김동수의 가세는 천군만마와 같았다. 만약 김동수가 없었다면 그해 LG는 우승할 수 있었을까.

김동수는 1990년 LG 최초의 신인왕뿐만 아니라 구단 역사상 최초로 포수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며 간판 스타로 우뚝 섰다.

1993년, 1994년, 1995년 3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1997년까지 LG에서 5차례나 포수 황금장갑을 받았다.

1999년까지 LG 선수로 활약했지만 그해 말 FA로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삼성 소속으로 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2003년에는 현대 선수로 7번째 포수 황금장갑을 품에 안았다.

그 뒤로 양의지가 8차례 포수 골든글러브(지명타자 부문 1회 포함 총 9회 수상)를 수상하면서 김동수가 보유하고 있던 KBO 포수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 기록은 깨졌다.

하지만 1990년대의 출발과 함께 '오리' 김동수가 써 내려온 전설은 지금도 LG 팬들에겐 진한 향수로 남아 있다.

LG 트윈스 전설의 시작을 알린 포수 김동수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스포츠서울
“저에게 LG는 첫 사랑이자 운명이죠. 어릴 때 서울의 MBC 청룡 팬이었고, 1차지명을 받은 뒤 처음 입단한 팀이 LG였잖아요. LG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고 팬들의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선수로서 여러 팀을 돌고, 지도자 생활을 다른 팀에서도 했지만 마지막엔 그래도 LG에서 코치와 프런트로 몸담았잖아요. 돌이켜 보면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제 서울고 감독을 맡아 아마추어 현장으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저는 LG를 못 버리고 있습니다. 요즘도 시간 날 때마다 LG 야구를 계속 봅니다.”

덧) 김동수의 별명은 ‘오리’다. 한양대 시절 선배 강영수가 엉덩이가 도드라진 김동수의 뒤태를 보고 ‘오리’라고 부른 뒤 평생을 따라다니는 별명이 됐다. 그 '오리'가 1990년 신인왕으로 날아오르면서 LG 트윈스의 황금시대가 시작됐는지 모른다. 우리가 김동수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LG 트윈스의 레전드 배터리인 김용수(가운데)와 김동수(왼쪽)가 2023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 앞서 시구를 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스포츠서울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