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만이 살 길"...남편에 살해당한 아내, '불륜했다' 거짓말한 이유 [그해 오늘]
[이데일리 박지혜 기자] “술에 취한 상태라서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정폭력을 당하다 경찰에 신고한 아내를 끝내 대낮 거리에서 살해한 남편 A(52)씨가 한 말이다.
현장에 있던 목격자는 “(A씨가) 너무 평온한 얼굴로 (B씨) 그냥 막 내리쳤다”며 “그게 더 무서웠다. 악에 받쳐서 이런 게 아니라…”라고 한 매체를 통해 말했다.
B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숨졌다.
A씨는 범행 한 달가량 전부터 이혼을 요구하는 B씨를 흉기로 위협했다. 이 과정에서 B씨는 경찰에 4차례나 가정폭력을 신고했고, 경찰은 첫 신고를 접수한 이후 A씨와 B씨를 분리 조치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A씨는 ‘신고했다’는 이유로 흉기를 휘둘러 B씨에 상해를 입혔고, 경찰은 법원에 피해자 보호명령을 신청했다.
통상적으로 가정폭력 가해자는 피해자 보호명령이 떨어지면 피해자로부터 100m 거리 이내 접근뿐만 아니라 통신 접근도 금지되지만, 피해자가 112신고를 해야 경찰이 위반 사실을 알 수 있는 ‘사후약방문’ 식이란 큰 허점이 있다.
이 사건 당일에도 A씨는 불시에 B씨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찾아가 범행을 저질렀다. 그날 오전에는 B씨가 직접 법원에 A씨에 대한 퇴거 신청서까지 제출했지만 끝내 살해당했다.
B씨는 보호명령 이후 경찰에게 받은 스마트워치를 사건 당시 착용하지 않았지만 착용했다 해도 1~2분 안에 범행이 일어나 경찰이 현장에 출동했을 땐 이미 늦었을 거란 지적이다.
이후 B씨의 아들은 대통령실 ‘국민제안’과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아빠가 죗값을 치를 수 있게 도와주세요”라며 ‘접근금지와 심신미약에 관한 법 강화에 관한 청원’을 올렸다.
아들은 “저희 엄마는 2004년부터 (아버지의) 술과 도박, 외도를 시작으로 가정폭력에 시달렸다”며 “폭행은 저희에게도 시작됐고, 추운 겨울에 옷을 다 벗기고 집에서 쫓아내고 화분을 던지고 욕을 하며 폭행도 일삼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어떤 이유에서건 살인은 정당화가 될 수 없다. 아빠가 무기징역이 아닌 유기징역으로 출소하게 되면 보복이 두려워 생활이 어려울 것 같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B씨의 사망으로 A씨가 자녀에 대한 유일한 친권자인 상황의 남용을 우려해 친권 상실을 청구하기도 했다.
그간 B씨가 전적으로 생계를 책임진 상황을 고려한 검찰은 자녀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도록 학자금과 긴급 생계비 등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검찰과 A씨 모두 양형 부당 등을 이유로 항소했다.
검찰은 항소심 결심 공판에서 “부부관계를 맺고 오랫동안 같이 산 아내를 도끼와 칼로 잔혹하게 살해하고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취지로 여전히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며 1심 때와 같은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A씨 측은 “외도 후 이혼을 요구하는 피해자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자리조차 마련되지 않아 흉기로 위협해서라도 대화하려 했던 것”이라며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2심은 “피해자의 불륜 정황은 확인되지 않으며, 오히려 지속적인 가정폭력과 학대에 시달리면서도 자녀만 생각하며 헌신적인 생활을 해오던 피해자가 이혼만이 학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해 (거짓으로) 불륜을 했다며 이혼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며 “그런데도 피고인은 자녀들에게 사죄하기는커녕 외도 주장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며 범행을 정당화하려 했다”면서 항소를 기각했다.
검찰과 A씨가 상고하지 않으면서 지난해 9월 20일 징역 40년이 확정됐다.
지난해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올해 1월부터 판결 전에도 스토킹 가해자에게 전자발찌를 부착할 수 있게 됐다.
‘고위험 스토킹 가해자’에게 수사 단계부터 최장 9개월까지 전자발찌를 부착시킬 수 있으며, 가해자가 100m 이내로 접근하면 피해자에게 알림 문자가 발송되고 경찰도 즉시 현장에 출동한다.
다만 현실적으로 모든 스토킹 가해자에게 전자발찌 부착 명령을 내릴 수 없고 스토킹범을 24시간 밀착 감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한계점을 지적하며 피해자에게 접근 시 곧바로 체포해 구류 처분을 내리는 등 현장에서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후속 조치가 시급하다고 조언하고 있다.
박지혜 (noname@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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