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덕후가 추천하는 글씨체에 맞는 펜
안녕하세요. 문구 브랜드 ‘아날로그키퍼’와 문구점 ‘파피어프로스트’를 운영하는 경연입니다. 7년 전 세계의 다양한 도시에서 문구(점) 여행을 한 뒤 ‘나의 문구 여행기’를 쓴 작가이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문구를 다 알고 싶다는 욕심과, 살면서 가장 오래 좋아한 일이 ‘쓰기’라는 자부심으로 문구를 만들고,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가을이에요. 문구인에게 가을은 내년을 위한 다이어리를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2025년 날짜를 입은 다이어리를 고르다 보면 자연스레 책상 위 도구들을 새롭게 장만하게 되는데요. 포스트잇, 클립, 스티커처럼 기록에 소소한 환기가 되어 줄 제품도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코 검정 펜입니다.
마음속 생각에 글씨라는 형체를 부여할 때 나에게 맞는 검정 펜을 쥐고 있다면 보다 자유롭고 즐겁게, 무엇보다 솔직하게 쓸 수 있습니다. 생각의 속도에 맞춰 기록할 수 있는 펜. 감정이 고스란히 표현되는 펜. 둥근 글씨의 다정함을 부각하는 펜. 작은 글씨를 선명하게 교정해 주는 펜. 조금이라도 더 쓰고 싶어지는 펜.
오늘 우리는 생각의 정교함을 더해 줄 예민한 도구인 검정 펜을 고를 거예요. 아무 데나 굴러다녀서 언제부터 썼는지 모를 펜이 아닌, 나의 기록 생활에 기둥이 될 애장품을 고른다는 마음으로 섬세히 따져보려 합니다. 펜을 고르기 전에 가볍게 준비 운동부터 할게요. 자주 쓰는 노트와 손에 익은 펜 한 자루를 꺼내보세요.
0. 나의 필체 관찰하기
아무런 조건 없이 늘 쓰던 대로 두세문장을 적어보세요. 가장 솔직한 나의 글씨체를 마주할 거예요. (만약 무엇을 쓸지 고민되어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면 다음의 문장을 따라 써 보세요.)
“일기를 쓴다는 것은 누구도 보지 않을 책에 헌신할 만큼 자신의 삶이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임상 심리학자, 로버트 마우어
Q-1. 글씨의 크기가 어떤가요? 대중적인 줄 노트 간격인 세로 7mm를 기준으로 큰지 작은지 살펴봅니다. 또한 글씨를 쓸 때 획을 날리면서 날렵하게 쓰는 편인지, 획의 끝까지 손의 힘을 풀지 않고 천천히 또박또박 쓰는지도 관찰해보세요.
Q-2. 글씨에 각이 많은 편인가요, 둥근 편인가요? ‘ㅁ’, ‘ㅂ’, 받침에 쓴 ‘ㄹ’, ‘것’ 등을 살펴보면 조금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어요. 손에 힘은 얼마나 들어갔는지, 속도는 어땠는지도 신중하게 감각해 봅니다.
아마도 이렇게 자신의 글씨를 뚫어져라 들여다 본 경험이 없으실 텐데요, 이제부터 글씨의 장점을 살리는 펜을 순서대로 만나볼게요. (종이는 시중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모조지 100~120g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1-1. 크기에 따른 추천: 작은 글씨
몸을 잔뜩 웅크리고 정성스럽게 십자수를 놓듯 글씨를 새기는 분이라면 촉이 얇고 종이 위로 날렵하게 움직이는 속기 펜을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잉크가 고루 나오고, 글씨의 공간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그래서 글씨의 섬세함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펜이 좋아요.
Uni Jetstream 0.38 (1,800원)
Uni Jetstream 0.38은 손에 힘을 크게 주지 않아도 단단하게 써지는 매력을 지녔습니다. 작은 글씨를 뭉개지 않고 쓸 수 있으며, 가벼운 바디는 작게 쓰기 위해 들어간 손가락의 힘을 자연스럽게 조절하기에 편안합니다. 가장 대중적인 펜이지만 0.38의 굵기는 글씨를 정성스럽게 쓸 때 그 내력을 정확하게 감각할 수 있습니다.
uni-ball Signo RT-1 (2,000원) / PILOT Juice up 03 (2,800원)
잉크펜 중에는 Uni-ball Signo RT-1 0.28과 PILOT Juice up 03을 추천해요. 두 펜 모두 산뜻하고 날렵한 특징을 지녔지만 Signo RT-1은 종이를 갉으면서 쓰는 사각거리는 필기감이 매력적이고, Juice up 03은 발자국 없이 걷는 듯한 부드러운 감촉이 장점입니다.
Uni Jetstream EDGE 0.28 (1만 5,000원)
더해서 조금 고가이지만 Uni Jetstream EDGE 0.28은 볼펜과 잉크 펜의 특징을 동시에 갖춘 펜이에요. 적당한 무게감에 쓰는 글에 진중함이 얹어지는 듯한 묘한 감각을 지녔습니다.
1-2. 크기에 따른 추천: 큰 글씨
수제비를 숭덩숭덩 빠뜨리듯 과감하고 힘 있게 글씨를 쓰신다면 0.7mm 이상의 심을 선택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Uni Jetstream Lite touch 0.7 (2,000원)
이번에 새로 나온 Uni Jetstream Lite touch 0.7은 큰 글씨를 뚜벅뚜벅 쓰기에 이상적인 펜입니다. 마치 손가락을 하나 더 얻은 듯 손에 감기는 느낌이 편안하고, 잉크가 종이 위에 새겨지는 감촉 또한 폭신합니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을 끊지 않고 다 들어주는 친구 같달까요?
MUJI Gel ink balpoint pen 0.38 (1,300원)
볼펜보다 잉크 펜을 선호하신다면 두 가지 펜을 고려해 보세요. 첫 번째는 무인양품의 MUJI Gel ink ballpoint pen 0.38입니다. 글씨를 크게 쓰면 필기한 공간이 넓어서 자칫하면 얇은 기둥이 넓게 박힌 듯 휘청이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는데요, 이 펜은 획의 굵기가 일정하고 글씨 끝부분의 맺음이 깔끔해서 꼿꼿하게 프린트한 것 같은 효과를 줍니다.
Uni-bal Signo DX 0.38 (1,600원)
Uni-ball Signo DX 0.38도 비슷한 느낌이지만, 필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라서 필압을 개성있게 조절하며 쓰시는 분들께 추천해요. 붓펜을 쓰듯 글씨의 강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펜입니다.
2-1. 글씨 모양에 따른 추천: 각진 글씨
정직하게 할 말만 하는 듯한 각진 글씨를 지니셨다면 글씨를 쓸 때 손 또는 손가락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을 텐데요, 선언하듯 또박또박 쓰는 정직한 글씨에는 ZEBRA blen 0.5가 잘 맞습니다.
ZEBRA blen 0.5 (2,000원)
가벼운 바디에 막힘없는 필기감을 가진 블렌은 흔히 말하는 ‘볼펜 똥’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단호하고 깔끔한 글씨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펜이에요. 획을 날카롭게 꺾어도 종이 위에서 정교하게 각도를 틀어주는 장점을 지녔습니다.
PILOT HI-TEC-C 0.25 (2,500원)
겔펜으로는 명불허전 PILOT HI-TEC-C 0.25(0.3)가 있습니다. 가늘고 날카로운 촉은 글씨를 쓸 때 어떠한 굴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느껴져요. 그래서인지 의식하지 않아도 글씨가 또박또박 써집니다.
uni STYLE FIT 0.28 (2,000원)
만약 ‘하이테크는 너무 지루해’라고 생각하신다면 Uni STYLE FIT 0.28을 사용해 보세요. 스타일핏 중 0.28mm의 심은 유독 섬세해서 마치 명검을 사용하는 듯 가벼운 묵직함이 돋보입니다.
2-2. 글씨 모양에 따른 추천: 둥근 글씨
동글동글 부드러운 글씨는 어느 펜이나 편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기록하는 내내 동그란 글씨를 유지하기 위해선 ‘바디’를 섬세하게 따져보는 게 중요합니다. 유독 좋은 펜이 분명히 있어요. 도자기를 빚는 것처럼 글씨를 둥글게 굴리는 경우 손과 손가락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 살금살금 쓰실 텐데요, 자칫 힘 조절을 안 하면 획 끝이 삐쳐 올라가 가독성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Uni Jetstream alpha gel 0.7 (13,000)
Uni Jetstream alpha gel 0.7은 은근한 무게로 중심을 잘 잡아주는 펜입니다. 어린 시절 쓰던 말랑한 샤프의 감촉을 고스란히 지녔으며, 자연스레 손에 적당한 힘이 들어갑니다. 심보다 바디의 특징이 월등하게 뛰어난 펜이에요.
PILOT LEGNO 0.7 (2만 7,500원)
조금 더 적극적으로 펜에 투자하고 싶으시다면 PILOT LEGNO 0.7은 어떨까요? 나무 바디의 온기가 느껴지는 펜이며 저중심 밸런스가 견고한 볼펜입니다. 저중심의 펜을 사용하면 흔들림이 적어서 글씨를 가지런하게 쓸 수 있어요. 갑자기 펜이 제멋대로 튀어 오르는 것을 방지하며 차분히 기록하기에 좋습니다.
3. 잘 모르겠으니까 하나만 추천해 줘
이쯤에서 ‘펜 하나 고르는데 너무 어렵고, 나는 이도 저도 모르겠다. 그냥 하나 추천해 줘!‘라고 생각하셨다면 제가 즐겨 쓰는 두 개의 펜을 영업해 보겠습니다. 이 두 펜은 기본적으로 쓰기에도 좋고, 기록의 형태나 목적에 맞게 선택해도 좋은 펜이에요. 마치 과일을 썰 때 과도를 쓰고, 빵을 썰 때 빵칼을 쓰는 정도의 다채로움이랄까요?
Schneider Slider memo (6,500원)
처음 펜은 Schneider Slider입니다. 바디의 종류에 따라 옵션이 달라지지만, 기본적으로 슬라이더 라인은 필기감이 거의 동일해요. 이 펜은 이름처럼 미끄러지듯 쓰는 1.0mm의 속기펜입니다. ‘오늘은 진짜 긴 글을 써야지’ 라고 마음먹은 날, 마음의 소리와 쓰는 속도를 동기화시키고 싶을 때 쓰는 정말 믿음직스러운 펜이에요.
PILOT frixion ball knock zone 0.5 (5,400원)
두번째 펜은 PILOT frixion ball knock zone 0.5입니다. 지워지는 펜으로 오탈자에 대한 부담 없이 기록할 수 있는 펜이에요. 달력이나 오기 없이 쓰고 싶은 업무 노트, 중요한 필기 노트 등에 제격입니다. 지워지는 펜 특유의 흐릿함이 많이 개선된 버전으로 선명하게 쓰고 맘 편히 지우며 원하는 정도의 완벽함에 도달할 수 있어요.
펜을 섬세하게 구분해서 추천하긴 했지만, 글씨는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얼마나 고유한지로 바라보는 게 중요해요. 컨디션과 심리 상태에 따라 변화하고, 중요도에 따라 여러 개의 글씨를 가지고 있기도 하죠. 점점 어른스러워 지기도 하고, 어린 시절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유일하게 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흔적인 나의 필체. 고치거나, 다듬는 목적이 아닌 장점을 더욱 부각하는 방향으로 펜을 고른다면 쓰는 경험이 더욱 만족스러워질 거예요.
좋아하는 펜이 있는 사람. 그래서 3개씩 사서 일터, 가방, 집 책상에 하나씩 심어둔 사람. 펜 하나를 끝까지 다 써본 사람. 쓰는 상황에 맞게 펜을 고를 수 있는 사람. 멋지지 않나요? 오늘의 글로 괜스레 필기구 코너를 기웃거리는 여러분을 우연히 마주치는 상상을 하며 글을 닫습니다. 다음을 준비하는 계절에 펜 한 자루로도 행복하시길 바라며.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