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미디어 환경 변화, 느슨해진 연대로 계승 난항" 지적
“대학교 때 언론 운동을 하면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알게 됐습니다. 처음 접했을 때 느낌은 ‘야 멋있다’ 단순히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업에서 뛰어 보니 생계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기 업의 본질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걸 걸고 하셨던 일이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있었기에 이후에도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에 나서는 또 다른 선배님들이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박상현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장은 17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18층 서울클럽 라운지에서 열린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선언의 의미와 단상을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박상현 본부장은 “선배님들이 언론 자유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성숙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움에 나섰는데 저는 우리 구성원들에게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이 있다”면서 “진정성이라는 측면에 있어선 저 역시도 선배님 세대와 비교했을 때 굉장히 낮은 수준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송구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지켜낼 방법을 계속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50주년 사업준비위원회가 개최한 이번 세미나에선 선언 50주년의 현재적 의미와 저널리즘의 위기를 자유롭게 토론하는 시간이 마련됐다. 토론자들은 1974년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의 유산 덕분에 사회가 민주화, 다원화됐다고 평가하면서도 최근 들어 더욱 집요해진 권력의 언론 장악 수법과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저널리즘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진단했다.
김희원 한국일보 뉴스스탠다드실장은 “미디어 환경이 1990년대 인터넷 혁명을 거치면서 매우 많이 바뀌었고, 사실상 저널리즘에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며 “굉장히 품을 들여 깊이 취재한 고품질의 기사가 시장에서 좋은 보상을 받지 못하니, 저비용의 선정적이고 정파적인 기사만 생산되는 악순환이 심화되고 있다. 그에 대한 해법이 사실 잘 안 보이고 기자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언론사 차원에서 오너와 경영진이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좋은 저널리즘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사례를 좀 보여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최우리 한겨레신문 기자도 “기사 유통이 더 중요해지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기자가 혼자 열심히 취재해 좋은 보도를 한다는 것의 의미가 굉장히 퇴색되는 현실을 느끼고 있다”며 “선배님들이 느끼셨던 사회에 대한 분노와는 또 다른 열패감, 부정적인 감정들이 기자 사회에 좀 있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모인 사람들인데도 그 안에서 소통이 점점 줄어들고 구심점을 찾기 어려운데, 동시에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젊은 기자들도 굉장히 많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더 집요해진 언론장악 수법, 느슨해진 언론사 내부 연대의식 문제
세미나에선 집요해진 권력의 언론 장악 수법에 기자들이 굴복하고 있다는 자기 고백도 나왔다. 고정현 언론노조 SBS본부 공정방송실천위원장은 “과거처럼 권력이 기자를 잡아넣거나 때리고 고문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이젠 기사를 못 쓰게 하는 이유가 수백 가지가 됐다”며 “갈수록 교묘해져 논리적 허점이 있으면 소송을 걸고, 그걸 보도본부 수뇌부들이 이용해 권력 감시를 더 어렵게 만들고, 그게 또 몇 년간 이어지다 보니 기자들이 지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SBS만 해도 과거엔 진보고 보수고 권력이 잘못을 하면 비판하는 식으로 가치중립을 지켰는데 지금은 기사를 쓰지 않는 방향으로 가치중립을 하려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풍이 점점 만들어지고 있어 내부적으로 자괴감이 많은 상태”라고 말했다.
박상현 KBS본부장도 “언론을 장악하려는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또 이들과 야합해 사익을 추구하려는 언론 종사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면서도 “자본주의 고도화에 따라 각자도생에 길들여진 언론인들이 많아지면서 언론사 내부에서도 연대의식이 굉장히 약해졌다. ‘불법연행이 자행되는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는 자유언론실천선언의 정신이 지금은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다만 기자들은 이 같은 현실에서도 기자 생활을 하면서 언제나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표상으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최우리 기자는 “지금 기자들이 좋은 직장이라는 개념으로 언론인을 꿈꿨거나, 들어와서 그런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걸 솔직히 말씀드린다”며 “하지만 선언을 통해 언론인은 권력, 자본 그리고 조직 내부의 모든 관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오로지 기사를 위해 존재해야 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제가 기자 생활을 계속하면서 항상 선언을 마음속에 저울처럼 생각하고, 나는 잘하고 있는지 그 저울의 무게와 비교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정철운 미디어오늘 편집국장도 “경제지에 있는 선배와 점심을 먹었는데 부장이 되기 싫다고 하더라. 왜 그러느냐 물어보니 부장이 되면 광고 영업직이 돼서 광고주들만 보는 기사를 써야 하고, 매달 행사를 계획해야 한다더라”며 “기자가 아닌 셈인데, 사실 그런 기자들이 대다수인 게 또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 기자들 입장에서 볼 땐 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신화 속 메시지인 수 있는데, 실천 정신을 언론계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계기들이 계속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유언론실천선언은…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기자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면서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배제하며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하며 △언론인의 불법연행을 일절 거부한다 등 3개 항을 결의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 외침은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기자들로 이어졌고 곧 전국 31개 신문·방송·통신사로 봇물 터지듯 퍼졌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유신체제 비판 보도를 내며 자유언론을 실천하자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에 탄압을 가했다.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말라고 광고주들을 압박해 동아일보 지면에 광고가 사라졌다. 광고 지면을 채운 건 시민들의 격려광고였다. 1975년 1월에만 2943건의 격려광고가 실렸다. 국민들 응원이 쏟아졌지만 동아일보는 권력에 굴복했다. 그해 3월 들어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임했고, 이에 저항해 편집국 등에서 농성을 벌이던 동아일보 기자와 PD와 아나운서 등 130여명을 3월17일 새벽 거리로 내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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